99화

99화 언젠가 한명오 부장이 몰디브 별장에 개인 요트를 샀다며 자랑한 기억이 있다. 뭐랬더라. 프로펠러가 물살을 가르는 순간 바다에 고속도로가 뚫린 것 같은 기분이랬나? 촤아아아! 그 느낌이 뭔지 정확히 알겠다. 그때 한 부장이 달린 바다가 경부 고속도로쯤이었다면, 나는 지금 아우토반에 있는 것 같으니까. “······놀랍네요 정말.” 퀸의 후면에 올라탄 유상아와 나는 갈라지는 한강 물살을 보며 넋을 놓았다. 신유승은 퀸에 대한 통제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곧바로 직진하지 않고 물살을 가르며 어룡의 무리를 이끌었다. 이제 한강은 안전지대가 되었으니, 기왕이면 용산구에 가까운 뭍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그오오오오. 마치 어미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처럼, 어룡들은 퀸 미르바드에 호응해 대열을 맞춰 헤엄쳤다. 나는 얼굴을 난타하는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진짜 느낌 죽이는구만. 세계가 예전 그대로였다면 누리지 못했을 사치다. 신유승은 퀸의 정신과 싱크로를 맞추며 퀸의 머리에 붙어서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신유승을 보던 유상아가 복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독자 씨. 지금 유승이가 강해져버리면 미래에서 올 유승이도 더 세지지 않을까요?” 역시나, 그런 걸 물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원작대로라면, 이번에 찾아올 재앙은 ‘다른 회차의 미래’에서 온 신유승이다. 유중혁에게 배신당해, 세계선 바깥으로 버려졌던 신유승. 그녀는 자신의 시간 분기를 잃고 우주를 떠돌다, 스타 스트림의 가호로 인해 시나리오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과거 회차의 시나리오에 ‘재앙’으로 강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자 유상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 지금의 유승이가 죽어도, 미래의 재앙은 죽지 않는 거 아닌가요? 분기가 완전히 다르니까······.” “‘끊어진 필름 이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뇨.” 나는 두 쪽으로 갈라지는 물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의 세계선에서 출발한 유승이의 역사를 하나의 ‘필름’이라고 가정해보죠.” “필름······ 영화의 필름을 말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있는 이 세계선을 ‘1번 필름’이라고 가정한다면, 분명 다른 세계선에는 무수히 많은 필름들이 있겠죠? 2번 필름도 있을 거고, 뭐 34번 필름도 있을 거고.” “네. 그렇겠죠?” “그런데 그 필름들 중 하나가, 앞쪽이 끊어진 채 1번 필름의 뒤쪽에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찢어진 34번 필름이 뒷부분만 1번 필름의 뒤쪽에 들러붙는다면? 그 필름을 상영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유상아는 잠시 골몰하는 듯했다. “그러면 영상이 도중에 바뀔 텐데······ 아, 잠깐만요. 그래서 두 개의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못 끼치는······?” “맞습니다.” “아······ 지금의 유승이가 그런 상황인 거군요. 1번 필름의 유승이가 현재라면, 34번 필름의 유승이는 재앙. 그런데 두 이야기가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니까, 우리 세계의 유승이가 변해도 재앙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거고······.” 역시 유상아는 똑똑하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해소가 안 돼요. 그럼 지금의 유승이가 죽어도, 재앙은 그대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테이프의 내용은 서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두 테이프는 ‘이어져’ 있습니다.” “네?” “만약 앞쪽의 테이프에 불이 붙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상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뒤쪽 테이프도······ 타겠군요.” 두 개의 세계선이 강제로 연결되었으니, 지금의 신유승이 죽으면 미래의 신유승도 죽는다. 하지만 지금의 신유승이 바뀐다고 해서, 미래의 신유승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그 애매한 패러독스가 바로 이 재앙의 핵심이었다. “독자 씨는 정말 아는 게 많으시네요. 저는 평행우주론은 들어봤지만, 그런 이론은 처음 들어봐요.”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를 거다. 왜냐하면 이건 ‘멸살법’ 작가가 만든 이론이니까. 누차 말하지만, 멸살법이 괜히 망한 게 아니다. 쿠우우우. 잠시 후, 가벼운 정거음과 함께 한강의 물살이 잠잠해졌다. 마침내 한강의 반대편에 도착한 것이다. 퀸은 우리를 바닥에 내려준 후, 한강 안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신유승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어땠어요?” “잘 하던데? 고생했어.” “네.” 신유승은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칭찬을 받는 게 좋은 모양이다. 이제 이 아이에게 칭찬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까. 용산구의 빌딩 숲 사이로 사나운 적의가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쿵. 쿵. 거대한 그림자가 빌딩 숲을 지나 다가온다 싶더니, 초록빛의 거대한 낫이 건물 사이로 등장했다. ······거대 사마귀? 충왕종의 꼭대기에 탄 소년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자 형?” 삐뚜름한 스냅백을 쓴 이길영과, 헤드폰을 낀 한동훈. 미끄러지듯 사마귀의 신체를 타고 내려온 이길영이 그대로 내 품에 달려들었다. 스냅백이 벗겨진 이길영의 까슬한 머리가 그대로 만져졌다. 정확히 일주일 만의 재회였다. 위이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스마트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한동훈이었다. ―반가워요, 형.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젠 좀 말로 하면 안 되냐?” ―싫어요. * 이길영과 신유승은 만나자마자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마치 더듬이라도 되는 듯 이길영의 머리카락이 심란하게 움직였고, 신유승은 시시각각 솜털을 곤두세우며 이길영을 견제했다. “아저씨, 저 남자애가 자꾸 째려봐요.” “형, 쟤 누구예요?” 역시 동류끼리는 알아보는 모양이다. 하나는 괴수 마스터고, 다른 한쪽은 벌레······ 마스터니까. 둘이 잘 맞으려나 모르겠네. 나는 이길영에게 물었다. “희원 씨는 아직 못 만났니?” “네. 근데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아요. 벌레들 보내서 찾아봤는데, 희원 누나는 지금 북쪽에 있어요.” 역시 이길영. 말하지 않아도 벌써 일행들을 찾아본 모양이다. 그나저나 북쪽이라면, ‘방랑자들의 왕’이 기거하는 곳이다. 어쩌면 정희원은 그쪽과 접촉했을지도 모르겠다. “형이 올 것도 알고 있었어요. 물방개를 잔뜩 보내 놨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길영의 머리 위에 벌레들이 늘었다. 분명 바퀴벌레만 있었는데······. 신유승이 징그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일행들의 전력을 점검한 뒤, 결론을 내렸다. “남은 이틀은 이곳에서 머무는 게 좋겠습니다. 각자 스킬 숙련치는 최대한 올려두고, 남는 시간엔 틈틈이 코인을 모아 두세요. 종합 능력치는 찍을 수 있는 데까지 모두 찍어두시고요. 아, 그리고······ 유상아 씨.” “네.” “가족이랑 연락은 하셨습니까?” 가족이라는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예상대로 아직 연락을 못 한 모양이다. “동훈아.” 헤드폰을 낀 한동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훈은 [광역 인터넷]을 스킬로 가지고 있다. 즉, 외부와 통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위이잉. 유상아의 작은 스마트폰이 울리며, 인터넷이 연결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유상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한참이나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족분들에게 이쪽 상황도 전해주세요.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서울 외곽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꼭 대비하라고 해두세요. 지금은 그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독자 씨는 연락 안 하셔도 되나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은 서울에 있습니다.” “서울에요? 그럼······.” “그 사람은 안전합니다.” 나는 말없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북쪽에서 ‘물의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방랑자들의 왕’도, 무사히 일을 마친 모양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범람의 재앙’뿐이다. * 「눈부신 검광이 파찰음을 일으키며 허공을 수놓았다. 찰나에 부딪친 수십 개의 검격. 정희원의 눈동자에서 타오른 혈영(血影)이 허공에 번지며 귀기를 흩뿌렸다. 이윽고, 정희원의 검이 멈춰섰다. “수련은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정희원은 자신의 칼날을 꼼꼼하게 점검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던 중년의 여인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전우치의 도술은 정말 대단하네요.” “희원 씨의 검도도 훌륭했습니다. 곧 배후성도 생기실 테니, 그때는 저도 상대가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찬이세요.” 정희원은 그녀의 하늘색 죄수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난 일주일, 정희원은 이들에게 신세를 졌다. 아마 남은 시간을 다해도 쉬이 갚을 수 없는 빚일 것이다. 중년 여인이 물었다. “정말 저희 <누벨바그>와 같이 다닐 생각은 없으십니까? 왕께서도 희원 씨가 같이 다니면 기뻐하실 겁니다.” “죄송하지만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서요.” 정희원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모았다. 중년 여인도 어쩔 수 없다는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여인도, 정희원의 일행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희원 씨가 이렇게 필사적이라는 걸 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군요.” “알 거예요.” 정희원은 살짝 못마땅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왠지 지금 보고 있을 것 같거든요.”」 ······이래서야 누가 [전지적 독자 시점]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정희원도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는 듯했다. 원작에서는 빛을 못 본 캐릭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는 것 같아서 기쁘다. 나는 이어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다른 사람의 시점을 찾아 나섰다. 안타깝게도 보이는 시점은 몇 개 없었다. ······음? 이건 뭐지? 잠시 후 화면이 일렁이더니,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저건 나잖아? 잠깐만. 이 녀석들은? 「“야, 너.” 이길영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게 말할 때 형한테서 떨어져.” 그러자 잠든 내 옆에 찰싹 붙은 신유승이 말했다. “싫은데?” “어디서 똥개 같은 게······.” “나한테 말 걸지마, 벌레 새끼야.” 이길영이 주춤했다.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선 바퀴벌레와 물방개가 사납게 더듬이를 움직였다. 간신히 침착함을 회복한 이길영이 반격했다. “형은 너 같은 애 싫어해.” “아저씨가 누굴 좋아하는진 나도 알아.” “······형이 누굴 좋아하는지 안다고? 누군데?” “어떤 언니야.” 이길영이 피식 웃었다. “언니?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독자 형은 남자를 좋아해.” “네가 어떻게 알아?” “난 형이랑 오래 다녀서 잘 알아.”」 뭔가 끔찍한 대화가 시작되려는 찰나, 나는 간신히 잠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신유승과 이길영은 머리를 기댄 채 쿨쿨 잠에 빠져 있었다. ······잘못 봤나? 그냥 꿈이었나? “독자 씨, 무슨 일 있어요?” 불침번을 서던 유상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역시 꿈이었나 보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눕는데, 어디선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벌레. 그러고 보니 너 아까 아저씨한테 안겼지?’ ‘······.’ ‘애기냐? 아저씨는 어른스러운 사람을 좋아하거든?’ 역시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 너희들 안 자니?” 유상아의 목소리. 그러자 다시 주변이 잠잠해지고 이내 아이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서브 시나리오 ― 생존활동’이 종료되었습니다.] 들려온 시스템 메시지에 일행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마쳤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시나리오. 허공에서 비형의 메시지가 깜빡였다. [9421.] 뜬금없는 숫자. 비형은 다시 한번 말했다. [9513.] ‘뭐야?’ [뭐겠냐? 9611.] 나는 숫자가 뭔지 바로 알아챘다. 그때 ‘1만’을 공약으로 내세웠었지 참. [한반도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구독좌의 숫자에 긴장합니다.] 나는 비형을 향해 물었다. ‘하란 대로 했지?’ [······하긴 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운이 좋길 빈다. 9781.] 고오오오오. 하늘에서 소용돌이치는 그레이트 홀이 심상찮은 징조를 내보이고 있었다. 우레가 쏟아지고, 간헐적인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파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군요, 여러분.] 간만에 보는 중급 도깨비는, 관리국에서 꽤 시달린 모양인지 얼굴이 수척했다. [그간의 생존 활동은 즐거우셨나요? 드디어 기다리셨던 본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차질이 생겨서 일정 변동이 좀 있었지만······ 네, 뭐. 그래도 기대하신만큼 재미있는 시나리오일 겁니다.] 녀석은 나와 몇몇 화신들을 보더니, 못마땅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간 다섯 재앙 중 무려 네 개를 해치우셨더군요. 여러분의 공로,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곧 찾아올 마지막 재앙에 비하면, 나머지 네 개는 그저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행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실제로 그 말은 맞다. 다른 재앙을 모두 합쳐도, ‘범람의 재앙’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이 시나리오의 성공 유무에 따라,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해온 일이 모두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럴 확률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한데 다행히도, 그런 여러분들을 가엾게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드디어 시작되는군.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 돌입하기 전, 마지막 이벤트가. [그럼, 지금부터 두 번째 <배후 선택>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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