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100화
하늘 위에서 찬란한 빛이 반짝이더니, 서울 전역으로 쏘아졌다.
어떤 빛은 북쪽으로, 어떤 빛은 서쪽으로. 하지만 산란의 폭은 크지 않았다. 대부분의 빛은 서울의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시나리오를 대비해 화신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드디어 계약이다! 나도 계약한다고!”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신들이 살가운 목소리를 냈다.
아직 나 말고도 배후성을 못 얻은 화신들이 있었던 모양.
곧 미계약 화신들의 머리 위에 작은 별들이 떠올랐다.
별의 개수는 곧 그 화신을 원하는 성좌들의 개수였다.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 모든 미계약 화신들은 내가 보는 것과 같은 정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조금 다른 정경이겠지만.
1. 긴고아의 죄수
2. 심연의 흑염룡
3. 은밀한 모략가
역시 긴고아의 죄수와 은밀한 모략가는 이번에도 있었다. 계속 거절하기도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다.
······심연의 흑염룡 이 녀석 또 왔네.
한수영한테나 가지, 왜 자꾸 나한테 찾아오는 거야?
4. 서애일필
5. 대머리 의병장
6. 흥무대왕
한반도의 위인들도 줄지어 오셨다.
서애일필은 아마 유성룡일테고······.
어이쿠, 우리 사명대사님도 오셨다.
여우 같은 김유신도······ 내가 진짜 자길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21. 고려제일검
22. 술과 황홀경의 신
고려제일검을 지칭할만한 사람이라면 역시 고려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그분이겠지. 거기에 디오니소스까지······. 올림포스도 슬슬 ‘김독자 쟁탈전’에 발을 들이민 모양이었다.
목록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조금씩 당혹스러운 기분에 젖어갔다. 예상외의 성좌들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48. 검은빛의 인도자
49. 하늘의 서기관
50. 복수와 묵시의 통치자
나도 모든 수식언을 기억하는 게 아니기에, ‘검은빛의 인도자’나 ‘복수와 묵시의 통치자’는 누구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하늘의 서기관’은 확실했다.
저 녀석은, 절대선 계열에서 손에 꼽는 강력함을 지닌 성좌다.
대천사 메타트론.
천사로서의 권위만 놓고 보자면, 이 녀석은 우리엘보다 격이 높았다.
자타공인 천상의 2인자.
빌어먹을, 대체 어떤 녀석들이 날 보고 있는 거지?
······.
문득 내 머리 위를 보니, 수백 개의 별들이 환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인근의 밤을 모조리 밝혀버릴 듯한 조도(照度).
몇몇 화신들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거······.”
“저 사람 대체 뭔데?”
역시나 멍하니 내 머리 위를 보던 신유승이 말했다.
“아저씨,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네요.”
[한반도를 좋아하는 성좌들이 당신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신의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왔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비형을 불렀다.
‘비형.’
[왜.]
‘지금 몇 명이야?’
독각을 물리치면서, 나는 성좌들에게 공약을 내걸었다.
<배후 선택> 당일까지 비형의 채널 구독좌가 1만을 돌파하면, 배후성을 선택하겠다고.
[9812. 아니, 14······. 16.]
계속해서 올라가는 성좌들의 숫자. 비형도 긴장한 말투였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3분 남았습니다.]
이제 3분 안에, 결과는 정해질 것이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초조해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간절하게 쳐다봐도 소용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2분 남았습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에게 3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에게 4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드디어 후원 경쟁에도 불이 붙었다.
성좌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내 눈에 띄어야 하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몇몇 설화급 성좌들이 위인급 성좌들의 치졸함에 혀를 찹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에게 5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정확히 내가 바라던 대로의 전개였다.
좋아좋아.
더 많이 내 보라고.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에게 300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역시 메타트론. 후원의 급이 다르다.
무려 ‘하늘의 재상’이라 불리는 존재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늘의 서기관’을 노려봅니다.]
[<배후 선택> 종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나는 비형에게 물었다.
‘이제 몇 명?’
[9973······ 76, 77.]
드디어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왔다.
[9981······ 84.]
30초.
[9993.]
20초.
[9998.]
[다수의 성좌들이 가슴을 졸입니다.]
10초.
[9999······.]
5초, 4초, 3초······.
[<배후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한숨.
내가 비형을 바라보자, 비형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아쉽네요, 여러분.]
[상당수의 성좌들이 말도 안 된다며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현재 구독좌 수 : 9999]
비형이 허공에 띄운 그 화면만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화신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벌렸다.
신유승이 물었다.
“아저씨 무슨 스타 유튜버에요?”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늘을 향해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네. 1만 명이 되면 바로 선택하려고 했는데.”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이 누굴 선택하려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비형이 끼어들었다.
[해당 화신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그건 밝힐 수 없습니다.]
잘한다, 비형.
[상당수의 성좌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쿠구구구구.
용산구 일대의 하늘이 일그러지며 벼락들이 애꿎은 사람들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쉴 새 없이 스파크가 튀었다. 개연성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힘을 행사하다니, 성좌들도 분노에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자자, 성좌 여러분들. 진정들 하세요. 정말 안타깝지만 한 명 차이로 이벤트는 무산되었으니······.]
비형은 내 눈치를 흘끗 보며, 그대로 말을 이었다.
[사과의 의미로, 보상 이벤트를 하겠습니다.]
그러자 떨어지던 벼락이 일시적으로 멈췄다.
[아마 여러분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겠죠? 시발, 어차피 내가 가지지도 못할 화신, 이대로 계속 두면 뭘 하나?]
[상당수의 성좌들이 도깨비 ‘비형’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는 그런 여러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래서! 감히 두 번째 <배후 계약>에서도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은 저 화신에게, 엄벌을 내릴까 합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성좌 여러분들께서 찬성하신다면······.]
[상당수의 성좌들이 도깨비 ‘비형’의 의사에 격하게 찬성합니다.]
비형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유승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저게 대체 뭐하는 짓이래요?”
“나 엿먹이려는 전개지 뭐겠냐.”
“아저씨는 왜 배후성 선택 안 한 건데요?”
“그냥, 안 내켜서.”
솔직히 메타트론까지 떴을 때는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여기서 누굴 선택하면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모두 말짱 도루묵이다. 나는 누구의 밑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
“유상아 씨. 애들 데리고 숨어요.”
“······생각이 있으신 거죠?”
“물론 있습니다. 절대로 제가 먼저 신호하기 전에는 나오지 마세요.”
[새로운 ‘현상금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현상금 시나리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상대로 ‘현상금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
+
<현상금 시나리오 ― 천벌>
분류 : 현상금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화신 ‘김독자’를 처참하게 찢어 죽이시오. 잔인하게 죽일수록, 당신이 받을 수 있는 코인의 값이 증가합니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40000 ~ ????? 코인
실패시 : ―
+
누가 보면 내가 다섯 번째 재앙인 줄 알겠다.
겨우 나 하나 잡는데 4만 코인이라니.
시나리오를 받았는지, 신유승의 안색이 하얗게 질렀다.
“······아저씨?”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신유승을 유상아가 데리고 물러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나를 발견한 화신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벌써 내 머리 위에는 이미 <표적> 표시가 떠 있었다.
“미친! 4만 코인?”
“야, 저 새끼 잡아!”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나리오의 전개에 즐거워합니다.]
내 선택에 분노하던 성좌들은, 어느새 내가 쥐새끼처럼 쫓기는 모습에 희희낙락하기 바빴다.
다들, ‘1만 이벤트’ 따위는 잊은 기색이었다.
그래, 이게 성좌들의 본성이지.
달아나는 나를 보며 비형이 허탈한 표정으로 통신을 걸었다.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될 줄 알았어. 게임 회사 다닐 때 자주 하던 짓이니까.’
이벤트에 화난 유저들을 달랠 방법은, 새로운 이벤트를 여는 것뿐.
바들바들 뿔을 떨던 비형이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들키면······ 시발, 이번엔 진짜 ‘개연성 적합 판단’에 들어가는 거라고.
사실, 비형의 구독좌 숫자가 ‘9999’를 돌파하지 못한 것은 명백한 ‘채널 조작’이었다.
왜냐하면, 비형의 #BI-7623 채널은 처음부터 정원이 9999였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독각’이 시비를 걸면 피하지 못하겠지만, 다행히 시비를 걸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 하급 도깨비들은 죄다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감수하기로 했잖아.’
그래도 여전히 위험한 방법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머리 회전이 빠른 몇몇 성좌들은 틀림없이 이 일을 의심할 테니까. 하필 9999에서 멈추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지나치다. 그래서 성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추가 이벤트가 필요했다.
성좌들은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쾌락에는 취약하다.
그것을 위해 이용한 이벤트가, 지금 내가 받는 <천벌>이었다.
비형이 히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성좌님들, 참고로 이 <천벌> 이벤트는 성좌님들의 후원을 통해 화신 ‘김독자’에게 패널티를 걸 수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이 급격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한 성좌가 당신에게 ‘속도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받는 코인이 늘어날수록 내 몸에 걸리는 패널티도 늘어난다. 평소라면 쫓아오지도 못했을 화신들이,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붙고 있었다.
“다들 코인에 눈이 멀었나 보네. 그치?”
나는 씩 웃으며, 뒤쪽을 향해 ‘신념의 칼날’을 휘둘렀다.
“크와아앗!”
[당신의 불행을 원하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공격력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평소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진 공격력에, 화신들은 주춤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갑다. 죽일 생각도 없었으니까.
[당신의 죽음을 갈망하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방어력 패널티’를 걸었습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엿 같은 후원.
쐐애액! 콰지직!
어디선가 날아온 단도를 맞은 오른팔에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가 아니었다면 팔이 잘려나갔을 것이다.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위기에 안타까워합니다.]
그 와중에 나를 응원해주는 성좌들도 있다.
눈물나게 고맙구만 그래.
나는 다친 팔을 붙잡은 채 그대로 용산구의 남서쪽으로 달렸다.
내 생각이 맞다면, ‘범람의 재앙’이 잠들어 있는 운석은 그 방향에 있다.
부화를 앞둔 운석의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형.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요. 본게임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여흥이죠.]
허공에서 투닥거리는 도깨비들의 목소리.
이제 비형도 제법 발언권이 세진 모양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달리고 또 달렸다.
조금만 더······.
그리고 마침내 한강이 나타났다.
“붙잡아!”
나는 다리를 붙드는 갈퀴들과, 우악스러운 손아귀들을 가까스로 피해내며 한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한강에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다른 화신들은 쉽사리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저 미친놈이!”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7급 해수종인 어룡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약해진 나를 먹잇감으로 삼기 위해 달려드는 녀석들.
[상당수의 성좌들이 희열에 차오릅니다.]
나는 그런 어룡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재능이 없다.
수련을 해도, 원하는 만큼 숙련이 오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내가 ‘약하다’고 말할 생각도 없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강해지는 방식은, 결코 남들과 같지 않으니까.
[‘인물 책갈피’가 활성화됩니다.]
[사용 가능한 책갈피 슬롯 : 4개]
[활성화 가능한 책갈피의 목록을 불러옵니다.]
“3번 슬롯에 ‘선동가 천인호’를 해제하고, ‘비스트 테이머 신유승’을 넣겠다.”
[3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환한 빛살이 내 몸을 감싸며, 갑자기 코끝에서 느껴지는 괴수들의 냄새가 달라졌다. 어떤 냄새는 친근했고, 어떤 냄새는 적의로 가득했다. 새삼 가까운 곳에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결국,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세계를 읽는 감수성이다.
[책갈피 스킬의 레벨에 비례해 활성화 시간이 결정됩니다.]
[활성화 시간 : 30분]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해당 인물의 스킬 중 몇 개를 선택해서 가져올 수 있습니다.]
멀리 있던 어룡 하나가 나와 싱크로를 맺으며, 머릿속에 복잡한 회로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상급 다종교감 Lv.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길들이기 Lv.9」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
그 꼬맹이 녀석들, 늘 이런 기분이었구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와라, 퀸 미르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