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98화
Episode 20. 범람의 재앙
식은 한수영의 맥을 짚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수영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놀랐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조금씩 이성이 돌아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독자 씨?”
뭔가를 눈치챘는지, 유상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유상아의 도움을 받아 죽은 한수영의 주검을 살폈다.
“상처는 없어요.”
상황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상처가 없다. 그렇다면 독인가?
중독 흔적도 없이 한수영을 죽일만한 독이라면 무형지독 뿐이다.
그런데 그런 독이 지금 풀렸을 리가 없다.
의문은 그뿐이 아니었다.
독을 썼다면 왜 나머지는 무사하단 말인가?
설령 그런 독을 보유한 녀석이 있어도 한수영만을 골라서 독을 뿌릴 이유가 없다.
애초에 내가 갑자기 잠이 든 것부터가 이상하다.
······잠깐만, 잠이 들어?
“으······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이 잤죠.”
부스스 눈을 뜨는 신유승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문득 유상아를 돌아보았다.
“혹시 유상아 씨도 계속 주무셨습니까?”
“······네.”
유상아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유상아도 못 일어났다면, 어젯밤 우리 중 불침번은 아무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마지막 불침번인 내가 잠들면서 모두가 잠들었다는 것.
바보였다.
내 의심은 ‘누가 어떻게 한수영을 죽였을까’가 아니라, ‘내가 왜 잠에 들었을까’부터 출발해야 했다.
수면 마법?
아니다. 그런 마법은 귀환자나 즐겨 쓰니까.
점혈?
쓴다고 해도 내 감각을 속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남은 답은 하나뿐이다.
화톳불 쪽으로 다가가자, 어제 먹었던 그롤의 뼈가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일행 모두가 잠들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이쪽뿐.
깨끗이 발라 먹은 뼈무덤을 치우자, 바닥에 부스스 떨어진 녹색 가루들이 눈에 띄었다.
‘야나스프레타의 줄기.’
역시나. 이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될 리가 없다. 누군가 그롤의 고기에 줄기 가루를 섞은 것이다. 야나스프레타의 줄기는 진액과 같이 먹지 않으면 강력한 수면 효과를 유발한다. 이계의 식재라 [동의보감]으로도 피독이 안 되는 식물. 그래서 늘 점액을 같이 끓여 먹었던 건데······.
“어제 그롤을 요리한 게 누구였죠?”
“아마 수영 씨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먹은 것은 신유승이 길들이기에 실패한 새끼 그롤의 고기였다. 그리고 새끼 그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한수영.
“한 방 먹었네요.”
나는 창백하게 누워 있는 한수영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아바타는 머리가 터지지 않는 한 소멸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이런 장난을 쳤을까?
어차피 ‘임시 서약서’에 묶여 있어서 도망도 못 갈 텐데.
그때, 한수영의 심장 쪽에서 파란색 빛이 올라왔다.
······저건?
“잠시.”
나는 일행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그대로 한수영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러자 푸른빛이 터지며, 아바타가 그대로 소멸했다.
[인물 ‘한수영’의 아바타가 계약 위반의 효과를 대신 받고 있습니다.]
[인물 ‘한수영’이 자신의 아바타를 제물로 ‘임시 서약서’의 패널티를 대부분 상쇄합니다.]
“아······.”
그제야 뭔가를 납득한 듯, 유상아가 신음을 흘렸다.
나도 아바타에 설마 이런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원작’에서 본체를 대신해 피해를 입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 설마 계약의 대가를 대신 치를 수도 있을 줄이야.
‘대부분’이라는 부사가 붙어 있는 걸로 봐서 완벽하게 상쇄가 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본체가 죽지는 않았으리라.
신유승이 물었다.
“그 언니는 가버린 건가요?”
“그런 것 같네.”
왜,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한수영은 나와 함께 다녀서 좋을 게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너랑 같이 다니면서 성좌들 후원 줄었어.
나는 곧 충무로의 일행들과 조우할 것이고, 그들은 유상아 못지 않게 한수영을 적대시할 것이다.
―쳇. 신뢰 못 받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한수영은 혼자가 될 것이고, 적들 속에 둘러싸인 상태가 되겠지. 잠깐이지만, 나는 그녀가 일행이 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바타가 새하얀 가루로 흩어진 자리엔 약간의 코인과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밥값
정말, 그 녀석다운 작별이다.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을 무로 돌리는 것처럼, 녀석의 아바타는 불어온 한강 바람에 훌훌 날아 없어졌다.
다만 궁금한 것은, 아바타를 통한 [대리 사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수영이 왜 지금까지 나와 같이 있었냐는 것인데······.
모르겠다.
유상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듯, 한수영의 마음도 읽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멸살법’도 이런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도 일어나죠.”
찌릿, 하는 느낌과 함께 묘한 감각이 찾아온 것은 그때였다.
전지적 독자 시점?
나는 본능적으로 느낌이 온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딱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착각인가?
*
“멍청이.”
한수영은 멀찍이 떨어진 고층 건물 위에서 폐건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스며드는 한강 바람이 차가웠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중얼거렸다.
“······솔직히 찾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말을 하면서도, 사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독자’일 테니까.
그녀는 메모장을 켜서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영감이 떠오를 때는 적어야만 하는 작가의 어쩔 수 없는 버릇이었다.
「책을 잘 읽는다고 해서, 사람까지 잘 이해하리란 법은 없다.」
‘곧 다시 만나겠지.’
그녀는 김독자가 원하는 결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결말을 향해 움직이는 한, 그들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들이 적일지 아군일지는, 그녀 역시도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덮고, 길을 따라 걸어갔다.
*
오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날 오후, 신유승의 마력과 민첩은 시나리오 한계치인 60에 도달했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 느낀 나는, 비형에게 [배후 계약서]를 구입했다. 비형은 투덜거리면서도 내게 계약서를 내주었다.
[······너 이런다고 ‘재앙’이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지?]
‘······.’
[저 녀석의 현재는 미래의 재앙에 ‘직결’되어 있지 않아. 재앙은 최초의 세계선에서 파생된 우주에서 오는 거라고. 존재가 연결되어도, 역사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계약서나 내놔.’
나는 계약서를 모두 쓴 뒤, 신유승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지금 성흔도 없고, 다른 성좌들처럼 힘을 빌려줄 수도 없어. 하지만 코인은 꽤 많아.”
“······.”
“싫으면 계약 안 해도 돼. 하지만 나랑 계약한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엄마가 이런 거 함부로 쓰지 말랬는데······.”
“괜찮아. 내가 정말로 배후성 노릇을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이걸 쓰면 다른 성좌랑은 계약 못하는 건가요?”
“그래.”
신유승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아저씨 믿기로 했으니까.”
[‘배후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의 배후가 되었습니다.]
눈부신 광휘가 솟아나 신유승과 나를 감쌌다. 하지만 화려한 빛살과는 달리, 떠오른 메시지는 초라한 것이었다.
[당신은 성좌가 아닙니다. 배후성의 권한 대부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 가능한 권한 목록>
[1. 화신 후원]
[2. 화신 독려]
뭐, 예상은 했다.
아직은 이 정도겠지.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콧김을 뿜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첫 계약을 축하합니다.]
[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좌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십악 공필두 때와는 또 다르다.
이제 신유승은 나의 직속 화신이 되는 것이니까.
고로 ‘화신 찾기’ 집단의 성좌들은 내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성좌가 아니면서, ‘화신’을 둔 ‘화신’.
그러니 나와 계약을 하면 자연히 신유승은 계약한 배후성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내가 화신의 숫자를 늘릴수록, 나를 원하는 성좌들의 숫자도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다.
[채널 터지겠네······!]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비형을 뒤로하고,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출발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강을 건너죠.”
“하지만 아직 다리를 못 찾았는데, 괜찮을까요?”
“수영을 할 겁니다.”
“네?”
“할 줄 아시죠?”
“할 줄은 알지만······.”
유상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한강을 번갈아 보았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 만하다.
한층 더 높아진 한강의 수위. 그 안에는, 어제보다도 많은 숫자의 어룡들이 간헐적으로 포효를 뱉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7급에 해당하는 녀석들. 신유승이 말했다.
“저는 수영 못하는데······.”
“넌 이거 붙잡고 건너와.”
나는 미리 구해온 스티로폼 박스를 내밀었다. 나는 유상아에게 부탁해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박스와 나를 연결했다.
“갑시다.”
내가 망설이지 않고 한강에 뛰어들자, 유상아도 곧바로 쫓아왔다. 신유승도 살짝 겁먹은 눈치긴 했지만, 곧 스티로폼을 붙잡고 한강 물에 발을 담갔다.
차가운 한강의 수온이 몸을 감쌌다. 낯선 괴수들의 비린내. 어룡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상아가 물었다.
―진짜로 괜찮을까요?
물론 괜찮지 않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고려하면, 이것만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정말 위험해지면 바로 나올 겁니다.
―······네.
―그러니 진짜 위험해지기 전에, 위험해진 것처럼 구세요.
―네?
―그래야 유승이가 빨리 각성합니다. 일부러 위기를 연출하세요. 알았죠?
나는 그대로 스티로폼을 끌고 한강의 중심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신유승에게 걱정 말고 스킬 레벨만 올리라고 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특성창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타고난 상황 적응력과 임기응변이 있다.
평범한 여자아이는, 결코 다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을 수 없다.
그저 착한 아이인 것 같지만, 신유승의 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자신의 반려견을 죽이고, 어른들을 속이며, 강자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을 위장하는 아이. 신유승은 그런 아이다. 처음 우리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계산들이 오가고 있었겠지.
나는 벌써부터 주변 눈치를 보는 신유승을 향해 말했다.
“유승아.”
“네, 네!”
“도망치지 마.”
“······.”
“만약 여기서 도망치면,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희미하게 벌어졌던 신유승의 입이 닫힌다.
신유승은 영악하기보다는 영리한 아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잔꾀는 먹히지 않는다.
아이라는 이유로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
“······알겠어요.”
두려움은 공포로, 공포는 이내 결의로.
[등장인물 ‘신유승’이 ‘상급 다종 교감 Lv.3’을 발동합니다!]
주변으로 밀려드는 살기.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들의 기척이 늘어나고 있었다.
일단 수면 위에 보이는 것만 열 마리.
한 번에 해치우기는 어려운 숫자다. 하지만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는 있다. 어쨌든 한강만 벗어나면, 어룡들은 쫓아오지 못하니까.
“독자 씨!”
유상아의 경고성. 어룡들의 피습이 시작되었다.
날카로운 어룡의 송곳니가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신념의 칼날’이 활성화됩니다.]
나는 칼날을 휘둘러 곧바로 어룡의 아가리 하나를 꿰뚫었다. 비껴간 어룡들의 몸체가 수면을 때렸다.
콰아앙!
한강을 뒤집는 어룡들의 용틀임. 나는 비산하는 강물과 함께 허공을 날았다. 돌아보니, 스티로폼을 놓친 신유승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날파람이 불더니, 유상아가 신유승을 향해 거미줄을 뻗었다.
[헤르메스의 산책법]에 [아라크네의 거미줄]의 연계.
유상아가 무사히 신유승을 받아내는 사이, 나는 죽은 어룡 하나를 발판 삼아 다가오는 어룡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쪽이다 자식들아!”
십여 마리의 어룡들이 물살을 가르며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강물이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내가 딛고 선 어룡의 시체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바람의 길]을 사용하면 쉽게 위기를 타개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처절함이 부족하다.
“아저씨!”
유상아의 품에 안긴 신유승의 표정이 다급해진다. 몇 개의 송곳니가 내 살갗을 파고들었고, 나는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몇 마리의 어룡이 치명상을 입고 나가 떨어졌지만 숫자는 줄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피는 금방 식었고, 숨은 점점 벅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웃었다.
더 조급해져라.
더 간절해지고.
더 절박해져라.
그래야만 해.
푸슈슈슈슛!
어룡의 송곳니가 스친 곳에 흉측한 상처가 만들어졌다.
너덜거리는 살점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귀청을 찢는 듯한 메시지가 귓가를 울렸다.
[등장인물 ‘신유승’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화신 ‘신유승’이 트랜스 상태에 돌입합니다.]
신유승의 눈이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전력을 다할 때의 이길영과 똑같은 모습.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이 모든 것은, 신유승의 이 순간을 위해 연출되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길들이기 Lv.9’를 발동합니다!]
60레벨의 마력이 폭포수 같은 아우라를 쏟아내며 한강의 물살을 타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달려오던 어룡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거대한 정신에 감응하기라도 하듯, 어룡들이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기이이이······?
수면 위로 보이는 어룡의 무리가 더 늘어났다.
아까는 열 정도였는데, 이제 스물을 훨씬 넘는다. 그렇다는 것은 수면 아래까지 합치면 그 두 배 이상의 어룡들이 주변에 모여들고 있다는 뜻.
하지만 이내 어룡들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혼란해진 어룡들은 더욱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고, 살기는 한층 더 흉폭해졌다.
기아아아아아!
빌어먹을, 실패인가?
“유상아 씨!”
어쩔 수 없다. 이제 그녀의 성흔을 이용해 빠르게 벗어나는 것만이 최선이다. 고개를 끄덕인 유상아가 실을 뿜으며 어룡들을 피해 다가왔다. 나는 신유승을 불렀다.
“유승아. 그만해도 돼. 신유승!”
그러나 신유승은 대답이 없었다.
신유승의 주변에서 일어난 기파가 점차 거세지더니, 이제 그녀의 몸은 완연한 푸른빛 아우라로 덮여 있었다.
한강의 중심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나는 손을 쓸 틈도 없이 물살에 휩쓸렸다. 주변의 어룡들이 일제히 몸을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고, 나는 어룡의 비늘에 간신히 매달린 채 원심력을 견뎌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물보라가 치솟더니, 다른 어룡들의 대여섯 배는 될 법한 크기의 어룡이 천천히 일어섰다. 너무 커다란 녀석이어서, 나는 그게 정말 어룡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내가 죽인 씨-커맨더 보다도 더 큰 녀석이었다.
위엄이 넘치는 수염. 하나의 종족을 지배하는 고고한 눈빛.
주변의 모든 어룡들이 머리를 수면으로 굽히고 있었다.
[5급 해수종(海水種), ‘퀸 미르바드’가 나타났습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이 녀석을 불렀단 말인가?
신유승의 재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설마 ‘퀸’을 부를 정도의 재능일줄은 몰랐다.
무려 소재앙에 필적하는 괴수종.
내가 [책갈피]를 열어 [바람의 길]을 발동하려는 순간,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자 씨?”
돌아보자, 신유승의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퀸 미르바드에게 뻗어진 아우라의 길을 따라, 신유승이 천천히 퀸의 몸체에 다가갔다. 퀸은 신유승을 바라보았고, 신유승은 퀸을 바라보았다. 신유승의 작은 손이 퀸의 콧등을 고요히 쓸었다.
주변의 물살이 가라앉고, 수면 위의 어룡들이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돌아보았을 때, 신유승은 퀸의 머리에 타고 있었다.
나는 새삼 신유승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했다.
비스트 로드.
모든 괴수들의 지배자.
천천히 눈의 색깔이 돌아온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코피를 쓱 훔친 녀석이 말했다.
“가요, 아저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