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97화 잠깐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화신을 돌볼 것을 종용합니다.] 우리엘이 보낸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젠장, 어제 ‘배후성 선언’을 하고부터 성좌들은 계속 저 모양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껄껄 웃습니다.] 사실 말이 배후성이지, 아직 설화도 제대로 못 쌓은 마당에 진짜 배후성이 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성흔 하나 못 빌려주는 성좌가 배후성은 무슨 배후성이겠어. 그래도 내가 어지간한 위인급 보다 돈은 많을 거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을 건방지다고 생각합니다.] 내 화신 등록 선언에 성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좋아하는 쪽은 아마 ‘화신 찾기’ 집단일 것이고, 건방지다고 생각하는 쪽은 ‘유희 찾기’ 집단, 그중에서도 나를 싫어하는 녀석들이겠지. 물론 개중 어느 쪽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녀석도 하나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전략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1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처음 수식언을 봤을 때는 위인급 성좌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저 녀석을 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평균적인 후원 규모도 그렇고, 저 여유도 그렇고. 저 녀석은 최소 ‘설화급’ 이상이다. 하지만 ‘멸살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은밀한 모략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계의 성좌거나, ‘멸살법’에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녀석이란 얘긴데. 대체 누구지? 우우우웅. 어젯밤부터 신유승은 폐건물의 한쪽 구석에서 스킬을 맹연습 중이었다. 신유승은 내가 준 마력 회복 물약을 한가득 쌓아 놓고, 근처에서 잡아온 새끼 그롤에게 계속해서 스킬을 걸고 있었다. 크르! 크르르르! 신유승에게서 뻗어 나온 희미한 기운이 그롤의 표피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길영에게서 봤던 [다종 교감]의 힘이었다. 나는 눈 밑에 시커멓게 다크서클이 내려온 신유승을 보며 물었다. “유승아, 잠은 좀 잤어?” “아직이요.” “안자면 패널티 받는 거 몰라? 잠 좀 자라.” “······조금만 더 하고요.” [등장인물 ‘신유승’이 ‘다종 교감 Lv.8’을 발동 중입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길들이기 Lv.7’를 발동합니다!] 그러나 신유승의 집중력은 곧 흐트러졌다. [‘길들이기’가 실패하였습니다!] [괴수가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한순간 통제에서 벗어난 그롤은 신유승에게 달려들었다.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곁에서 잠꼬대를 하던 한수영이 암기를 날렸다. 휘이익! 콰악! 새끼 그롤은 그대로 폐건물의 벽에 박혀 숨을 거두었다. 한수영이 잠꼬대를 하며 돌아누웠다. 허탈한 얼굴로 호흡을 다스리는 신유승을 향해 내가 물었다. “잘 안돼?” “······네.” 신유승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하긴.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요약 버전으로.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신유승 전용 특성 : 비스트 테이머 (희귀), 반성적 살해자 (일반) 전용 스킬 : [길들이기 Lv.7], [다종 교감 Lv.8], [기민한 발 Lv.8], [이종 호의 Lv.6]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9], [근력Lv.14], [민첩Lv.44], [마력Lv.45] * 현재 성장 패키지Ⅰ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Ⅱ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역시 성장 패키지를 두 개나 갈아 넣었더니 스킬 성장 속도가 엄청났다. 게다가 특성 진화를 촉진시키는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까지. 모르긴 몰라도 한반도의 화신들 중에 이만한 패키지 지원을 받는 녀석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본래 재능도 있는 녀석이니까 다종 교감은 조만간 10레벨을 돌파해 ‘상급 다종 교감’으로 진화하겠지. 문제는 이만한 능력치를 가지고 고작 8급 괴수종인 그롤 하나 제대로 못 길들이고 있다는 것. 사실 시스템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신유승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전 재능이 없나봐요.” 네가 재능이 없는 거면 난 그냥 자살해야 할 거다. “걱정 마. 넌 재능 있어.” 기껏 얻은 귀한 화신이 좌절하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아마 신유승이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은, 그녀의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무서워서요.” 무엇이 무서운지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괴수는 반려동물이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래도 반려로 삼아도 괜찮을지도 몰라. 얘들 튼튼하고 강하거든.” 신유승은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자기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 사실이, 지금까지도 이 아이의 마음속 깊이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거 아니? 시나리오를 다 깨면 소원을 이룰 수 있는데······.” “아저씨는 거짓말할 때 얼굴에 티 나요. 콧구멍이 커져요.” 그러고 보니 길영이도 그런 말을 했었지. [다종 교감]이 가능한 아이들은 신체 언어에 민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깡패처럼 나가기로 했다. “······뭐 어쩌라는 거냐?” “잘 할 수 있겠죠?” “잘 할 수 있어.”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하지 말고······.” “내가 선택했으니까.” 신유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서울 대신 널 택했어. 그리고 후회하지 않아.” “······.” “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어.” 잠시 나를 올려다보던 신유승이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저씨, 제가 정말 강해지면······.” “강해지면?” 한참이나 망설이던 신유승이 옅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시 열심히 해볼게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스킬을 시전하는 신유승. ······갑자기 뭔가 기분이 찜찜한데. 문득 원작에서 신유승이 어떤 녀석이었는지 떠올랐다. 「“중혁 오빠 잘생겼어요.”」 「“중혁 오빠 최고예요.”」 「“중혁 오빠가 제일 좋아요.”」 ······이 녀석, ‘멸살법’의 원작에서는 유중혁의 팬이었지. 나이가 나이인지라 당연히 히로인 후보는 아니고, 그냥 졸졸 쫓아다니는 여동생 포지션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유미아랑 엄청 다퉜던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걱정이 된다. 이렇게 열심히 키웠는데, 나중에 유중혁한테 빼앗기면 어떡하지?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한수영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수영이 픽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어제부터 온종일 뾰로통한 상태다. “야.” “왜.” “계속 삐져 있을 거냐?” “나한테 말 걸지 마.”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보고 싶은 거라는 말에, 한수영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는 신유승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 정도 외모면 어떻냐? 유중혁이랑 비교해서.” 한수영이 귀에 벌레라도 들어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의도로 묻는 건데?” “아니, 순수하게 정말 궁금해서 그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 번도 내가 어떻게 생겼느냐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에 만났던 유중혁 동생도 그렇고, 예전 선지자들의 반응까지 생각해 보면, 뭔가 전부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화장실에서 가끔 셀카 찍어 보면 나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바람기 많은 한 성좌가 당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그냥 삶을 받아들여.” “아니, 위로받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지금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다.” 제길. “······그 정도냐?” 나는 조용히 신유승 쪽을 바라보았다. 결심했다. 절대로 저 애랑 유중혁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 *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의 괴수종들을 사냥했고, 코인을 모았다. 나는 코인이 모이는 족족 신유승에게 투자했는데, 덕분에 신유승의 능력치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코인은 주로 민첩과 마력에 사용했다. [기민한 발]과 [길들이기] 그리고 [다종 교감]을 최대치로 활용하기에는 그 두 능력치가 제일 중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될 무렵, 신유승은 마침내 [상급 다종 교감]을 터득했다. 그러나 여전히 ‘길들이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신유승이 물었다. “······미래의 나는 훨씬 더 강하겠죠?” 물론이다. 정면으로 싸우면 지금의 신유승은 상대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집중적으로 수련을 하면 적어도 미래의 신유승이 가진 중요한 능력을 봉인할 수 있다. ‘범람의 재앙’이 위험한 것은 그녀가 혼자의 힘으로 하나의 군세를 이끌 수 있기 때문.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보다, 현재의 너를 좀 더 믿도록 해.” 미래의 신유승이 할 수 있다면 현재의 신유승에게도 가능성은 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미래와 대적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승산은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신유승은, 절대로 현재의 신유승을 죽일 수 없을 테니까. “잘 먹었습니다.” 뼈까지 깨끗하게 발라 먹은 그롤 고기를 치우며, 유상아가 짧게 기도를 했다. “유상아 씨 종교 있었어요?” “아뇨, 무교에요.” “그럼 왜 기도를······.” “올림포스의 신들한테 했어요.” 너무 현실적인 기도라서 나는 조금 벙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아는 신들이 현실이 되었으니, 이제 기도의 대상도 굉장히 명확해진 셈이다. “오늘은 저랑 한수영이 먼저 불침번을 설게요. 유상아 씨가 먼저 주무세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네.” 유상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먼저 잠에 들었다. 한수영은 그녀와 반대쪽 벽에 기대어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본래 적이고, 한수영의 사상은 유상아의 대척점에 서 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두 사람은 협력하기보다는 반목할 일이 많을 것이다. 피곤에 절은 신유승까지 잠들자, 고적한 밤 위에는 타닥타닥 불씨를 일으키는 모닥불 소리만이 남았다. 한수영이 먼저 말했다. “너도 자.” 바닥에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이제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나흘. 신유승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고, 오늘 낮에는 강서 지역에서 메시지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서쪽에서 강림한 ‘얼음의 재앙’을 처치하였습니다.] 라는 메시지였다. 누가 처치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만약 그대로 강림했다면 서울 일대를 빙하기로 만들었을 재앙을, 유중혁이 직접 나서서 막아낸 것이다. 아마 이현성과의 조우도 무사히 끝냈겠지. 타오르는 불씨를 보던 한수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야,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못생겼어.”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딴 거 궁금하댔냐? 좀스런 새끼.” “······그럼 뭔데?” “넌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뭘 하다니?” “목적이 뭐냐고. 매번 너 볼 때마다 이상해서. 왕좌 박살 낸 것도 그렇고, 쟤 안 죽이는 것도 그렇고······ 넌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원하는 결말이 있어.” “결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의외로 한수영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나도 쓰고 싶은 결말이 있었는데.” “네 소설?” “응.” “나도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왜 표절했어? 너 원래 글 잘 쓰잖아.” “표절 아니라니까? 너 ‘멸살법’을 무슨 성경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다 어디서 따온 소설이거든? 초월적 존재들의 후원. 생존 미션. 게임 시스템에 회귀자 주인공. 요즘 그런 거 안 쓰는 소설 찾기가 더 어렵지 않냐?” “네 거랑 제일 비슷하니까 문제지.” “그것도 다 이유가 있어. 내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옛날 옛날에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는데······.” “가난에 찌든 문학소녀가 자신의 꿈에 좌절하고 먹고 살길을 찾다가 결국 남의 소설을 표절하게 된 이야기라면 사양할게.” 멍하니 입을 벌린 한수영이 입술을 실룩였다. “너 사실 다른 사람 마음 읽을 수 있지?” “······어?” “아무튼, 그 뭔가 비슷한 게 가능하잖아. 그렇지?” “내가 무슨 신인 줄 아냐? 그딴 스킬이 있으면 지금 이렇게 고생 안 했지.”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3’를 사용 중입니다.]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킥킥 웃으며 물었다. “혹시 나한테도 가능하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 말 안 해도 돼. 아무튼 그거 가능하면, 지금 내 마음도 읽어봐.” “못 읽는다니까.” “나, 사실 표절 안 했어.” 내가 수상한 눈빛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한수영은 보란 듯이 자신에게 [거짓 간파]를 사용했다.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뭐? “‘멸살법’을 읽은 건 맞는데, 비슷하게 쓴 건 그냥 우연이야. 난 내가 꿨던 꿈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뿐이라고.” [인물 ‘한수영’이 해당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 녀석 이젠 무의식을 방패로 삼고 있다. “어쨌든 봤잖아. 봤으니 꿈을 꾼 거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머뭇거리던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 “만약 이 현실에 원작이 있고, 내가 그 원작의 재현에 불과하다면, 애초에 나란 존재는 원작의 표절이 아닐까, 하는······.” “뭔 헛소리야? 그래서 너 표절 안 했다 이거냐?” “누가 뭐래? 그냥 그런 생각도 들었단 얘기야.” 사실 나도 안 해본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멸살법’이 현실이 되었을 때부터 줄곧 들었던 생각이었다. 이 세계는 소설 위에 덧씌워진 현실일까. 아니면 현실이 소설로 바뀌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일어났다. “야, 불침번 바꾸자. 너부터 자라.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 자꾸 꺼내면 채널에 성좌들 줄어든다고.” “······안 그래도 요즘 너랑 같이 다니면서 성좌들 후원 줄었어.” “그건 네가 자꾸 암 걸리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우리는 그 후로도 서로를 향해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고, 이내 입을 다물었다. 폐건물의 벽에 기댄 채, 나는 코를 골며 잠든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저 녀석이 있어서 조금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세계가 ‘소설’이라는 걸 아는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그런 기묘한 위안.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깜빡 졸았다. 너무 피곤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위로에 방심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잠들고 말았다. 짧았지만 달콤한 잠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들지 않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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