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96화 그날 밤, 아이는 죽지 않았다. 유상아가 죽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나 역시 그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맘대로 해.” 씩씩거리며 나간 한수영이 사라졌고, 폐건물에는 나와 유상아만이 남았다. 아이는 [점혈]로 잠깐 재워둔 상태였다. 유상아는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 주더니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애가 ‘재앙’이라고요?” “네.” “그것도 독자 씨 능력으로 알아내신 건가요?” “비슷합니다.” 나는 ‘멸살법’에 나오던 문장을 떠올렸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재앙. ‘범람의 재앙’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슬픈 재앙이다.」 유상아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질문의 재앙] 같은······ 그런 건가요?”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범람의 재앙. 그녀가 만약 본연의 힘을 모두 낸다면, [질문의 재앙]은 비교도 되지 않는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질문의 재앙]은 고작해야 강동구를 반파시키는 수준에서 잡혔지만, [범람의 재앙]은 그 정도가 아니다. 그녀가 전력을 낸다면, 서울은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재앙같이 보이지는 않아요. 고작 닷새 만에, 이 아이가 재앙이 될 수 있을까요?” 사실, 현시점에서 보면 유상아의 말은 맞다. 지금의 그녀는 재앙이 아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신유승 나이 : 11세 배후성(背後星) : 없음(현재 2개의 성좌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용 특성 : 비스트 테이머 (희귀), 반성적 살해자 (일반) 전용 스킬 : [길들이기 Lv.5], [다종 교감 Lv.7], [기민한 발 Lv.6], [이종 호의 Lv.4] 성흔 : 없음 종합 능력치 : [체력Lv.12], [근력Lv.12], [민첩Lv.16], [마력Lv.24] 종합 평가 : 준수한 마력 성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낮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희귀한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약한 성정 때문에 성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신유승. 이 아이의 이름은, 이 아이가 틀림없는 ‘재앙’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아이는 닷새 뒤 반드시 서울을 파괴하게 된다. 유상아의 말이 이어졌다. “재앙들은 운석에서 부화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는 운석에서 부화한 것도 아니고······.” “맞습니다. 이 아이는 운석에서 부화하지 않았죠. 이 애는 그냥 지구에서 태어나 자란 지구인입니다. 닷새 뒤에도 계속 지구인일 거예요.” “그럼 대체 왜······.” “[질문의 재앙]도 본래는 지구 출신이었죠.” 유상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아이도 설마 [질문의 재앙]처럼······.”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네?” 지구 출신의 모든 ‘재앙’은 곧 [귀환자]들이다. 다른 세계를 멸망시키고 돌아온 파괴자들. 이 아이 또한 [클로노스]를 멸망시켰으니 귀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클로노스의 다섯 재앙 중에서도 이 아이는 특별하다. 그리고, 가장 위험하다. “재앙으로 찾아오는 것은 이 아이가 아니라, 이 아이의 미래입니다.” “미래라고요?” “이 아이는, 수십 년 뒤의 미래에서 지구를 끝장내기 위해 돌아오는 겁니다.” 지금은 착하고 순수하며, 심지어 예의까지 바른 이 아이는 훗날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 중의 하나가 된다. “한수영이 아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이 아이를 죽여야만, 다가올 아이의 ‘미래’를 없앨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 재앙은, 유중혁조차 막을 수 없다. * 「유중혁은 자신의 가슴에 뚫린 공허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당장 [기사회생]을 쓰지 않고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 그는 분노한 얼굴로 그 상처를 만들어 낸 여자를 향해 물었다. “신유승. 왜······ 생각이 변한 거냐?” “변해? 나는 변하지 않았어.” 신유승이 웃었다. “나는 대장이랑은 다르게 세계선의 회귀자가 아냐. 나는 시나리오의 톱니바퀴에 갇힌 장난감일 뿐. 지금의 나는, 과거 회차의 대장이 만났던 ‘재앙’과 똑같은 인격이야.” “그럼 대체 왜······.” “지금이 3회차라며? 2회차에서도 기회는 줬을 거 아냐. 그런데 또 대장은 실패한 거고. 그렇게 많은 정보를 줬는데도, 또 실패했다는 거지.” 신유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유중혁을 향해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 세계는 변할 수 없어. 대장은 그대로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신유승이 하늘의 그레이트 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한 거야. 역시,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고.”」 간만에 ‘멸살법’을 정독하고 있자니, 또 스멀스멀 옛날 감성이 밀려온다. 역시 ‘멸살법’은 이 맛에 보는 거지. “야, 뭐하냐?”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스마트폰을 껐다. 한수영이었다. “어쩌기로 했어?” “생각 중이야.” 우유부단한 내 목소리에,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얼마간 떨어진 유상아와 신유승을 신경 쓰며 속삭였다. “잊었어? 3회차에서 유중혁은 마지막 재앙한테 거의 죽을 뻔한다고.” “죽진 않았잖아.” “그게 그거지. 중요한 건 정면으로 싸우면 못 이기는 싸움이었다는 거야.” 한수영의 말은 사실이다. 3회차의 유중혁은, 실제로 신유승에게 죽을 뻔하게 된다. “만약 그때 망상악귀 김남운이 쟤를 죽이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때 신유승을 죽였던 망상악귀는, 불행히도 이번 회차에는 없다. “난 분명히 말했다, 반대라고. 그리고 경고하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닐걸?” [고구마를 싫어하는 일부 성좌들이 속을 태웁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고구마를 대비해 탄산을 준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이번 대화는, 제대로 필터링이 안 된 모양이다. 슬슬 미래 정보의 필터링이 조금씩 풀릴 때도 됐으니······. 신유승과 이야기하며 한숨을 푹푹 쉬어대던 유상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독자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에요.” 그녀는 간절한 얼굴이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잖아요. 여기서 우리가 이 아이를 잘 돌보면, 재앙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나비 효과 같은 게 일어나서······.”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이 세계에 찾아오는 것은 ‘미래의 신유승’. 그리고 지금 이 세계는, 신유승의 미래를 만든 ‘최초의 세계선’이다. 즉, 지금의 신유승을 변화시킨다면, 그 재앙은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기다. 신유승을 죽여서 재앙을 막는 것도 같은 이치니까. 하지만. “이 아이를 재앙으로 만드는 사건은 먼 미래에 발생합니다. 지금의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나비효과라는 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태평양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지구 반대쪽에서 태풍이 분다? 그건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얘기다. 중요한 것은 그 날개짓이 ‘태풍’이 되기까지의 시간이니까. 유상아의 표정이 급격하게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현시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가 이 아이를 변화시킨다고 해도······ 닷새 뒤에 찾아올 재앙이 바뀌진 않습니다.” 실제로 중후반 회차의 유중혁도 몇 번인가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 가장 먼저 신유승을 찾아냈고, 그녀를 달래 재앙을 막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지금의 신유승에게 어떤 변화를 줘도, 닷새 뒤에 미래의 신유승은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서울을 멸망시킨다. 유상아의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빠졌다. “······왜 이 아이는 재앙이 되는 걸까요?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기를 뜯고 있는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맛있니?” “······네.”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유상아와 한수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죠?’ ‘죽여.’ ‘그러지 않을 거죠?’ ‘죽이라고.’ 사실, 지금 신유승을 죽인다고 해서 결말까지 가는 중요한 부분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 신유승을 죽이지 않으면, 조금만 실수해도 서울은 끝장난다. 즉, 단기적으로 보면 신유승을 살리는 것은 손해다. 고기를 뜯던 신유승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건가요?” “······응?” “저······ 미래에 굉장히 나쁜 사람이 되는 거죠?” 아마, 우리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솔직히 답해주었다. “아마도.”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요?” “아마 서울에서는 제일 나쁜 사람이겠지.” “조커나 타노스만큼 나빠요?” “그럴지도 몰라.” 신유승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일도 아니네요.” “왜?” “전 이미 나쁜 사람이거든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이야긴지 알 것 같았다. 어린 신유승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내가 죽였어.」 그녀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를 죽였다. 「미안해요.」 이미 습격당해 쓰러진 노인에게서 외투를 훔친 일. 자신의 그린존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늘 보살펴 주던 여자를 따돌린 일. 누군가에게 쫓기던 남자를 무리에게 넘기고 식량을 얻은 일. 사실 이런 세계에서 누구나 저지를 법한 일들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런 일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벌을 받을 거야. 살아 있을 가치 따위 없어.」 공포에 떨던 아이의 눈동자가 조금씩 의연해진다.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표정은 아이나 어른이나 다를 것이 없다. “저······ 죽이셔도 돼요. 준비됐어요.”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면, 나는 지금 망설임 없이 신유승을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자고. 독자는 독자의 선택을 한다. 물론 나는 작가가 아니기에, 내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저 뻔한 것들뿐이다. 나는 신유승의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바라는 결말에 네 죽음은 없으니까.” 만약 이 아이를 죽인다면, 유중혁의 회귀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과거를 바꾸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할 자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유중혁을 위해, 이 아이의 죽음을 막을 것이다.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등장인물 ‘신유승’이 당신에 대해 희미한 신뢰를 보입니다.] [등장인물 ‘신유승’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하지만, 제가 죽어야······.”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있어.” 뒤쪽에서 한수영이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곁에서, 유상아가 입술을 꼭 깨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도와준다면 가능해.” 애초에 내가 바라는 결말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작은 불가능들을 하나씩 가능으로 바꿔 나가다 보면, 언젠가 불가능한 결말도 가능한 결말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유승은, 그 불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작은 초석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곧바로 비형에게 부탁해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몇 가지 아이템을 구매했다. 신유승이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냥 애고, 배후성도 없는······.” “배후성이 왜 없어?”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성장 패키지Ⅰ’을 후원하였습니다.] 신유승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성장 패키지Ⅱ’를 후원하였습니다.] [당신은 화신 ‘신유승’에게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후원하였습니다.] ······.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시지. 신유승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 이게 다······.” “괜찮아, 나 돈 많아.” “아저씨는······ 대체 누구세요?” “난 독자야. 김독자.” 나는 현실감을 잃은 아이의 머리를 툭툭 두들겨 주며 말했다. “앞으로 닷새 안에 너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강해질 거야.” 내 말은 사실이었다. 비스트 로드(Beast lord) 신유승. 이 아이는 훗날, 이 세계 최강의 100인 중 하나가 된다. 언젠가 재앙이 될 수도 있는 이 아이는, 이번 회차에서 내 ‘첫 번째 화신(化神)’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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