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95화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아침이었다. 벌떡 일어난 나를 보며,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마지막 불침번이 저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뭔 악몽이라도 꿨어?” “조금.” 밤새 타오른 장작의 불씨가 하얗게 새어 있었다. 나는 불씨를 적당히 헤집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무의식중에 발동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본 정경······. 길영이 녀석,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유상아 씨는?” “정찰 갔어.”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만지며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넌 뭐 보고 있냐?” “소설.” “니꺼?” “그럼 누구 걸 보냐?” 하긴, 이런 상황에서 다른 소설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이긴 하다. “항상 궁금했는데, 작가들은 자기가 쓴 거 보면 재밌냐?” “난 재밌어.” “뒷 내용을 다 아는데도?” 사실 별 생각 없이 던져 본 말이었는데, 관자놀이를 만지던 한수영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같은 내용을 읽어도 이야기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어.” “뭐?” “작가라고 자기 소설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지는 않아. 문득 돌아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많이 나 있지. 결국 독서라는 건 그 불규칙적인 구멍들을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작업인 거야.”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내가 쓴 것도 남이 쓴 것처럼 볼 수 있다는 뜻이야.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에게 타자(他者)라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어서 나는 조금 감탄했다. 한수영이 그런 어려운 말도 할 수 있을 줄이야. “하긴, 생각해 보니 넌 더 그렇겠다. 넌 진짜로 남의 소설 갖다 쓴 거잖아.” 한수영이 빽 소리를 질러서 나는 잠시 귀를 막았다. 아니, 그러게 누가 표절 하랬나? 스마트폰을 끈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시나리오 시작까지 기다리는 거지.” “누가 그런 대책 없는 이야기 듣고 싶대? 제대로 된 계획이 있을 거 아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한수영이 말하게 내버려 두었다. 실제로 그녀는 계속해서 떠들었다. “서쪽은 유중혁이 맡고, 북쪽은 그 방랑자들의 왕인가 뭔가 하는 여자가 맡는다고 쳐. 중앙은 어쩔 건데?” “다 같이 막는 거지 뭐.” “쉽게 가는 방법이 있을 텐데? 잊었어?” 나는 순간 멈칫했다가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너 그것도 표절했냐?” “······안 했거든? 그냥 내 소설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것뿐이야.”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 내민 채 얼버무렸다. “아무튼, 내 말 맞지? 내가 알기로 ‘중앙의 재앙’은 쉽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확실히, 그녀의 말은 맞았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모든 재앙을 막을 수 있게 된다. 한수영이 채근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쉽게 갈 거지?” “그건······ 일단 가면서 생각하자.” 때마침 멀리서 주변을 둘러보고 온 유상아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수영이 툴툴거렸다. “너 저 여자 오고 나서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인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쳇. 신뢰 못 받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5일. 우리는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목적은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한강 일대에서 행방불명된 공필두를 찾는 것이었고, 둘은 근방의 괴수종을 잡아 코인을 모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코인 이벤트’ 중이니까, 뽕을 뽑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뽑아야 한다. “유상아 씨, 왼쪽으로! 한수영 너는 뒤를 맡아!” 이동하는 족족 보이는 7급종을 우리는 남김없이 사냥했다. 유상아까지 사냥에 가세하자, 7급종은 물론이거니와 어지간한 6급종까지도 널널히 사냥이 가능했다. 나는 그런 유상아를 보며 생각했다. 아마 올림포스 녀석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놈들을 불러냈던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을. 할당된 개연성을 사용한 녀석들은 당분간 유상아에게 함부로 간섭할 수 없다.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유상아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유상아 씨. 앞으로 성흔은 한 번에 하나만 쓰세요.” “아······ 죄송해요. 지난번에 너무 민폐였죠?” “아뇨,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운의 지원을 받는 존재는 특별하다. 물론 성운의 지원을 받는다 해서 해당 성운의 모든 성좌가 그녀를 후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스타 스트림의 법칙은 화신 하나에 성좌 하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까. 법칙을 거스른 대가는, 결국 성좌들과 화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성좌들이야 자기들끼리 피해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화신 쪽이다. “여러 개의 성흔을 계속 중첩해서 사용하는 것은 유상아 씨의 몸에 부담을 줄 겁니다.” 빌어먹을 올림포스 놈들은 말해주지 않았겠지만, 하나의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성흔은 성좌의 역사를 품고 있고, 밀도 높은 시간 속에 마구잡이로 섞여든 역사들은 인간의 영육(靈肉)을 손상시킨다. 만약 유상아가 지금처럼 다수 성좌들의 성흔을 빌려 쓰게 된다면, 그녀의 남은 수명은 순식간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앞으로 길어야 1년······. 유상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닫고 입을 열었다. “혹시 알면서 그랬던 겁니까?” 고요히 눈을 내리깐 유상아가, 사이를 두고 말했다. “독자 씨는 아직도 제가 유능한 회사원 유상아로 보이세요?” 유상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독자 씨랑은 달라요. 바뀐 세상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여긴 토익도 자격증도 봉사 점수도 다 쓸모 없는 세상이니까.” “강해지면 그게 모두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조금은요.” 그녀의 말은 정답이었다. 실제로 강함은, 세상의 문제를 아주 조금 해결해줄 뿐이다. “이 세계에 유용한 스펙을 쌓기로 했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건 그것뿐이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유상아의 손등에는 무수한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상처들이 내겐 커다란 구멍처럼 느껴졌다. 한수영은 말했다. 독서라는 건 불규칙적인 구멍을 나름대로 이어나가는 작업이라고. 만약 그것이 독자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나는 아직 뭔가를 제대로 읽기엔 턱없이 부족한 인간인지도 모른다. 위이잉. 품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노란 알림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한동훈 : 형, 괜찮아요?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이었다. 나는 잠시 멍해져서 그 메시지를 읽었다. ―한동훈 : 최근에 인터넷이 잘 안 터져서 연결이 늦었어요. 제 능력으로도 힘들어서... 꽤 오래전부터 메시지를 보내 왔는지, 메시지는 제법 쌓여 있었다. 아마 뒤늦게 인터넷이 터지면서 그동안 쌓인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도착한 듯했다. 나는 분위기를 바꿀 겸, 유상아에게 그 메시지들을 보여주었다. 스르르 피어나는 유상아의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나도 완전히 무능한 독자는 아닌 모양이라고. * 메신저를 통해 연결이 된 것은 한동훈 하나였지만, 나는 한동훈을 통해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한동훈 : 저희는 용산구 쪽에 있어요. 길영이도 같이 있고요. ―김독자 : 길영이도 거기 있어? ―한동훈 : 네. 주요 일행들의 위치는 대충 파악이 끝났다. 이현성과 정희원의 위치도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확인했으니, 중요한 건 다시 모이는 것뿐. 정민섭이나 이성국 같은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거기까지 신경 쓰긴 어려웠다. 그래도 사전 지식이 조금은 있는 녀석들이니, 어련히 알아서 헤쳐 가겠지. 이지혜는······ 뭐, 유중혁이 알아서 할 테고. ―김독자 : 당분간 용산 벗어나지 말고 있어. 곧 그리로 갈 테니까.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랑도 연락 시도해 보고.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또 통신이 끊긴 모양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슬슬 강을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위치한 곳은 한강 이남. 그리고 용산구는 한강 이북에 있었다. “저걸 건너자고?”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한강을 바라보았다. 갸오오오오. 넘실거리는 물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자들. 한때 동호대교 인근을 오가던 어룡들이, 다시 수위가 차오른 한강을 지배하고 있었다. 줄곧 강을 따라 왔지만 한 번도 건널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저 녀석들 때문이었다. “천호대교 봤잖아? 죄다 끊겼어.” 어룡은 7급 괴수종. 잡으려면 못 잡을 것도 없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저만한 숫자를 모조리 상대하려면 며칠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헤엄을 쳐서 한강까지 건넌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일단 강을 따라 이동해 보자. 안 끊긴 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몇 시간을 들여 강의 하류로 이동했지만, 안타깝게도 멀쩡한 다리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한 무리의 방랑자들이었다. 한수영이 인상을 쓰며 병장기를 쥐려는 순간, 먼저 나선 것은 유상아였다. 그녀가 배낭에서 고기를 꺼내자, 한수영이 짜증을 냈다. “지금 뭐하는 거야?” “굶주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뭐? 그거 나눠 주겠다고? 제정신이야? 아포칼립스에 제일 위험한 게 사람이라는 것도 몰라?” “전 마음만 먹으면 저 사람들 모두 죽일 수 있어요.” 순간 유상아의 얼굴에 맴돈 살기에, 한수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모두 살릴 수도 있어요.” 유상아는 말없이 괴수종의 고기를 떼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에게 감읍하며 고개를 숙였다. “야, 저거······.” “어차피 남는 거야. 줘도 상관없어.” 나는 발광을 하려는 한수영을 내버려 두고, 가방에 있던 ‘야나스프레타’ 줄기를 꺼냈다. 세계가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수렵’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쯤 전 세계에서는 온갖 괴수종에 관한 연구가 한창일 것이다. 내게서 줄기를 받은 남자가 연신 허리를 굽혔다. “아! 고맙습니다, 정말······.” “아닙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나눠야죠.” 물론, 나는 유상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내 모든 선행은 결국 계획된 경제활동일 뿐이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큰 호감을 가집니다.] [등장인물 ‘신유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등장인물 ‘마강철’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새로운 인물들이 책갈피에 추가되었습니다.] 한수영이 비꼬듯 말했다. “가식 쩐다 너.” “······나도 가끔 착한 일은 해.”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4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수영이 투덜거리며 유상아 쪽을 보았다. “젠장, 저런 여자는 소설 속에나 있는 줄 알았는데.” 동감이 가는 말이었다. 멸망이 오기 전에도 유상아는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소설의 여주인공 같았지. 이제 현실이 소설이 되어버렸으니 별다를 것도 없겠지만······. 그때, 방랑자들 무리 속에 있던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길영이 또래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무슨 일이니?” 도톰한 볼살에 서양적인 눈매. 영롱한 붉은 기가 감도는 눈동자. 이국적인 귀여움이 물씬 풍기는 얼굴이었다. 곧장 내 앞까지 온 아이는, 나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아.” 예의가 바른 아이였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아이가 말했다. “이제 안 계세요.” “두 분 다?” 아이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보호자도 없는 어린애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까지 혼자서 살아남다니. 어디서 뚝 떨어지기라도 하지 않는 한, ‘멸살법’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다. ······잠깐만, 떨어져? 내가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한 순간, 아이가 다시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아.” 설마 정말 인사만 하러 찾아온 거야? 나는 아이를 붙잡으려다, 반사적으로 곁에 있던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침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조심히 가렴.” 곧 날이 저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은 이 근처에서 쉬죠.” 우리는 잠을 청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한강 근처는 불을 피워도 추웠기 때문에 반쯤 무너진 폐건물을 이용하기로 했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한수영이 유상아를 향해 경고했다. “두고 봐. 아까 그 자식들 다시 찾아올 테니까. 우리 무기 탐내던 거 못 봤어? 분명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니까?” 한수영은 인간이란 건 다 악인이며, 전부 선의를 악의로 보답하는 쓰레기라고 천명했다. 나는 유상아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아포칼립스라고 다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냐.” “아니, 다 나빠. 거의 다 나쁘다고.” 그리고 한 시간이 흘렀다. “곧 올 거야. 이제 침 질질 흘리면서 올 거라니까.” 두 시간이 흘렀다. “음, 인내심이 강한 놈들이네.” 세 시간이 흘렀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마침내 네 시간 뒤, 바깥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상아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고, 한수영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병장기를 꺼낸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폐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저······ 계신가요?” 벌떡 일어나려던 한수영이 멈칫했다. 찾아온 것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낮에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던 아이. 살짝 볼이 붉어진 아이가 뭔가를 내밀었다. “저, 이거······.” 어디서 가져 왔는지 돌돌 만 이불보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추울까 봐, 근처에서 모포를 구해 온 모양이었다. 한수영은 깜짝 놀란 얼굴이었고, 유상아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아포칼립스라 해도 항상 선의가 악의로만 보답받지는 않는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애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일행을 대표해서 나선 것은 유상아였다. “고마워, 잘 쓸게.” “네에······.” “그런데 혼자니? 이렇게 늦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지금은 어디든 마찬가지예요.” 뭘 그런 걸 걱정하냐는 투의 말투에, 유상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우리랑 같이 있을래?” “네?” “우리랑 같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유상아는 허락을 구하듯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의 대답이 더 빨랐다. “폐 끼치기 싫어요.” 꾸벅 고개를 숙인 아이가 쪼르르 달아나려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암기가 아이의 발 앞에 툭 꽂혔다. 깜짝 놀란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한수영의 살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깐만. 넌 못 돌아가.” “지금 무슨 짓이죠?” 유상아가 한기가 풀풀 흩날리는 목소리로 한수영을 보았다. 그러나 한수영은 나를 보고 있었다. “김독자,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너도 그래서 여기 묵자고 한 거잖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젠장, 눈치 못 챘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보는 족족 [특성 간파]부터 사용하는 이 녀석이 모를 리가 없지. 한수영이 말했다. “아하, 또 위선 떨 거야? 상대가 아이라고?” “······.” “이번에도 착한 역할만 하겠다 이거지? 그럼 악당인 이 몸이 해결해줘야겠네.” 손을 꺾으며 다가서는 한수영을, 유상아가 막았다. “멈추세요.” “비켜. 네가 죽일 거야?” “갑자기 평범한 애를 왜 죽인다는 거죠?” “평범한 애?” 한수영이 피식 웃더니, 아이를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멈추라고 했죠.” 동시에 유상아의 단도가 한수영의 목을 겨누었다. 곧 한수영이 십여 기에 달하는 아바타를 소환했다. 한수영이 으르렁거렸다. “김독자, 빨리 설명해. 내가 빡돌아서 다 죽여버리기 전에.” ······결국 이렇게 되는군. 나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 애는······.” 무구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감을 느꼈다. “······닷새 뒤, 서울을 멸망시킬 겁니다.” 유상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약 못 발견했으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해피 엔딩으로 향하지 않는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미소를 짓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시나리오의 전개에 흥미를 가집니다.] 성좌들의 메시지가 그토록 증오스럽게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 애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재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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