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94화
‘멸살법’의 세계에서 성좌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 성좌들.
그리고 특정한 성운(星雲)에 소속된 소속 성좌들.
[감히 하찮은 인간이 위대한 별들을 능멸하는가?]
그 쩌렁쩌렁한 기세에, 나는 침을 삼켰다.
지구에 신화의 거점을 둔 성운에는 유명한 것이 몇 가지 있다.
북유럽 신화의 <아스가르드>나 묵시록의 <에덴>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 못지않게 유명한 것이 바로, 눈앞의 녀석이 소속된 <올림포스>였다.
“······폼 잡지 마. 신도 아니면서.”
그 말에, 유상아의 표정이 변했다.
갑자기 성좌가 직접 강림을 시도하기에 조금 쫄긴 했지만, 역시나였다.
“시나리오 초반부의 개연성은 올림포스의 신들을 결코 허락하지 않아. 안 그래?”
[어찌······!]
개연성의 균형을 맞출 존재도 없으니, 올림포스 12신급이 강림했다면 서울 일대는 벌써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파급으로 거대한 후폭풍이 닥쳐왔겠지. 올림포스의 신들 중 상당수가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놈들이긴 해도, 아주 돌대가리만 있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유상아의 전신을 감싸고 넘실거리는 마력의 실을 보며 말했다.
“지금의 개연성으로 나올 수 있는 건 당신이 한계인 모양이네. ‘버려진 미로의 연인’.”
한국에 위인급 성좌가 있듯, 올림포스에도 위인급 성좌들은 있다.
사실, 올림포스의 ‘대다수’는 저런 위인급 성좌들이다.
버려진 미로의 연인.
그것은 바로 테세우스의 연인인 ‘아리아드네’의 수식언이다.
“개연성 코스트가 제일 낮은 당신을 대표로 보내다니, 올림포스도 어지간히 쪼잔하구만.”
[닥쳐라! 감히······!]
쿠구구구.
그녀의 주변에서 넘실대는 마력의 실들이 지상을 뚫고 폭음을 만들었다. 단지 기세를 발출한 것만으로 일대의 땅이 갈라졌다.
과연, 아리아드네라고 무시할 게 아니다.
이야기의 힘을 업은 성좌들은 아무리 약하다 해도 비성좌보다는 강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는, 절대로 나를 공격할 수 없다.
파츠츠츠츠!
허공에 튀어 오르는 스파크.
개연성의 족쇄가 움직인 것이다.
상태를 보아하니 완전 강림은 아닌 것 같지만, 화신의 의지를 빼앗아 일부만 강림했다고 해도 개연성은 엄청나게 소모된다.
게다가 아리아드네는 거대 성운 소속의 성좌.
그녀의 움직임은, 반드시 다른 강력한 존재들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쿠우우우우우―
서울 돔의 하늘에서 [그레이트 홀]이 울부짖고 있었다.
미증유의 공포감에 귀가 먹먹해지고 전신에 오한이 돌았다.
아리아드네가 강림한 유상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물들어갔다.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것이 ‘성좌’들의 현실이다.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최강을 논하는 존재들이지만, ‘개연성’이라는 무거운 족쇄를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다.
“이계의 신격들이 당신을 눈치챈 것 같으니까 말이야.”
[······어떻게 인간이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랑 실랑이하려고 나온 건 아니지? 당신 대신 개연성을 감내해주고 있는 성좌들도 그걸 원하는 게 아닐 텐데?”
꽈르르릉!
그레이트 홀을 중심으로 천둥이 쳤다.
역시, 위인급 성좌가 직접 강림하기엔 아직 이른 시점이다.
나는 말을 서둘렀다.
“나는 세 가지 질문을 할 거야. 만약 당신이 내 질문에 대답해 준다면, 나 역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겠어.”
[삼문답 교환을 하자는 것인가?]
“그래.”
삼문답 교환.
이것은 본래 개연성의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한 성좌들의 거래 방식이었다.
아리아드네가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인간이 성좌들의 거래 방식을·····.]
“할 거야 말 거야?”
[······기다려라.]
유상아의 눈꺼풀이 닫혔다. 아마 아리아드네는 지금 자신의 통신망을 통해 올림포스 소속의 다른 성좌들과 교신하고 있을 것이다.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제안에 흥미를 가집니다.]
아무래도, 올림포스의 구경꾼들도 나타난 모양이고.
마침내 교신을 마친 아리아드네가 눈을 떴다.
[문답을 허락한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질문에는 진실만을 대답해야 합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하겠어.”
[좋다.]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하나, 왜 너희들이 유상아의 몸에 깃들어 있는 거냐?”
[······.]
“너희 터전은 대륙 반대쪽에 있을 텐데, 그쪽 시나리오 신경 쓰기도 바쁘지 않아? 왜 이곳에······.”
[이번 세계의 ‘특이점’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특이점?”
[그것은 두 번째 질문인가?]
빌어먹을, 제법 똑똑한데.
‘질문권’은 질문자가 어렴풋하게나마 대답을 납득한 순간 사라진다.
“아니야. 이제 그쪽이 물어봐.”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 너희들이 감시하는 특이점 중 하나.”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당황한 아리아드네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역시 내가 특이점이었나 보네.”
그냥 떠본 거였는데, 설마 맞을 줄이야.
아리아드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화내지 말라고. 너희들도 자주 하는 짓이잖아?”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재치에 즐거워합니다.]
아리아드네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하지만 본래 ‘삼문답 교환’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 정말로 상대방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면 손해만 볼뿐이니까.
자신의 질문권은 유용하게 사용하고, 상대의 질문권은 헛되이 날려버리는 것.
그 치열한 수싸움이 ‘삼문답 교환’의 본질인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 ‘특이점’이라는 게 대체 뭐지?”
[그대와 같은 존재들을 뜻한다.]
어쭈, 머리 좀 쓰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로 납득할 수 없다.
“제대로 대답해. 계속 빙빙 돌리다가 끝내고 싶은 건 아니지?”
[······원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신탁’에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지 그래? 전혀 감이 안 온다고.”
잠시 고민하던 아리아드네가 말을 이었다.
[본래 그대를 감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대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지.]
······우연?
[우리가 감시하려 했던 것은 다른 존재다. 거대한 운명의 바퀴를 등에 업고, 개연성을 파괴하는 존재. 특이점이란 그런 자들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특이점’이 대체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다.
―두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올림포스 녀석들, 이번 회차에서 벌써 유중혁을 찾아낸 모양이다.
올림포스 급의 성운이라면 다량으로 생산되는 필터링들을 검색해 그 정보를 역추적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놈들에게는 뛰어난 정보 추적자인 ‘헤르메스’가 있으니까.
게다가 대성좌급의 존재들이라면, 유중혁에 의해 세계선이 어긋나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본래 ‘회귀자’에 대한 정보는 지금의 아리아드네가 닿을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답변이 되었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두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대는 다음 <배후 선택> 때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
이건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
설마 올림포스 쪽에서도 나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한반도를 좋아하는 몇몇 성좌들이 긴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수식언을 연호합니다.]
곤란한데. 어쩔 수 없지.
“대답하지 않겠어. 벌써 누구를 뽑을지 말하면 재미없잖아?”
―당신은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질문에 대한 거절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아리아드네의 말이 이어졌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세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그대는 어떻게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냐?]
제길,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군.
아마 아리아드네도 열심히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단순히 내 ‘정체’를 묻기만 해서는 또 대답을 돌릴 수 있으니까, 가능한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낸 것이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책을 열심히 읽었어.”
[뭐?]
“책을 열심히 읽다 보니까, 알게 됐다고.”
대답을 얻었다는 말이 안 뜨는 걸 보니, 역시 이걸로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멸살법’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어차피 꺼내봐야 필터링 처리가 될 테니 저쪽에서도 납득을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도 싫다.
“원래 우리 한국인들은 당신네들 신화를 잘 알아.”
[······무슨 뜻이지?]
“우리나라에서 당신들은 꽤 유명인사거든. 너무 대중적이라 애들 만화로 제작될 정도야. 당신도 우리나라에서 엄청 유명한 거 모르지?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쪽이 올림포스 계통이란 건 알 수 있을걸?”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리아드네의 당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럴 리가 없다. 겨우 동방의 작은 나라가······.]
“크레타 섬의 미궁.”
[······!]
“반인 반수의 괴물.”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당신을 잊은 연인. 낙소스 섬의 유폐. 주신(酒神)과의 정사······ 계속할까?”
[그, 그만! 잘 알겠으니 그만하라!]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세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완전히 상처받은 얼굴의 아리아드네가 입을 뻐끔거렸다.
[어떻게 하찮은 소국의 인간이 나의 이야기를······.]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어영부영 넘기는 데 성공했다.
괜히 아리아드네가 개연성 코스트가 낮은 게 아니지.
얼빠진 그녀가 올림포스의 대표로 나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레이트 홀]의 움직임이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었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 이번에 너희들이 받았다는 ‘신탁’ 내용은 뭐지?”
한참이나 고민하던 아리아드네는, 보이지 않는 저울을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거절권을 사용하였습니다.
―모든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었습니다.
―신성한 삼문답이 종료됩니다.
예상은 했지만, 아쉬웠다.
사실 마지막 질문이 제일 중요한 것이었는데.
[흥이 깨지는 걸 싫어하는 한 성좌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십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뢰들을 보며, 아리아드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의 남편이 그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여 잠시 여흥에 어울려줬다만, 장난은 여기까지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그녀가 목소리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강림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우리 올림포스는 그대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그대는 우리가 행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라. 우리는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 여자는 훌륭한 멸망의 방파제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왜 그 여자지?”
[이유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운명의 실을 잣는 세 자매조차, 그 이유는 알지 못하니.]
젠장. 올림포스 녀석들은 걸핏하면 운명 핑계를 댄다더니, 원작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시나리오에 구속된 화신이여. 운명의 방향이 틀어지고 있다. 모든 별들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이고, 성좌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무슨 소리지? <기간토마키아>를 말하는 거냐?”
[······그런 정보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하지만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오만을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파츠츠츠츠츳!
유상아의 몸 주변에서 튀는 스파크가 한계치에 이르렀다.
개연성 후폭풍의 징조였다.
[찰나의 꼭두각시인 그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종막이 도래하였을 때, 그대가 만약 올바른 편에 서 있지 않는다면―]
그때, 하늘의 벼락이 유상아에게 내리꽂혔고, 새하얗게 타오른 그녀의 몸속에서 아리아드네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아아아······.
꽈지지지직!
시공간이 통째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내 유상아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 유상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고개를 들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만약 위를 보게 되면······.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그러나 나는 홀린 듯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먼 하늘의 [그레이트 홀]에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힘을 소멸시킨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혓바닥 같기도 하고, 촉수 같기도 한.
하지만 결국 무엇과도 닮지 않은 무엇.
어떤 형용도 비유도 불가능한, 언어를 넘어선 공포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神格).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고, 이마와 등허리에서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과 자아를 지워버릴 듯한 시간의 흐름.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을 때, 그레이트 홀은 평소처럼 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몸을 떨었다.
저것이 내가 싸워야 할 놈들이다.
멀리서 한수영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흥분한 괴수종들의 포효가 어두운 달밤을 적셨고, 내리치는 벼락에 몸을 숙인 인간들의 비명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종막(終幕)과 관련된 시나리오에는 여러 이름들이 있었다.
라그나로크. 기간토마키아. 하르마게돈······.
아리아드네가 말하는 종막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였다.
원작과 똑같이 흘러가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끝에 도달할 수 없으니까.
나는 쓰러진 유상아를 조심히 눕히며 생각했다.
툭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육체.
자신의 배후성에게 지지 않으려는 듯, 꽉 쥔 유상아의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인간은 나약하다.
하지만 그저 거대한 개연성만을 두려워하는 별들이 간과하는 것도 하나 있다.
지구의 모든 신화는, 결국 그들이 무시하는 나약한 인간들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나는 쥐어진 유상아의 주먹에, 가볍게 내 주먹을 맞대었다.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설화’의 힘이 꿈틀거립니다.]
[당신의 첫 번째 ‘성흔’이 발아를 준비합니다.]
그 어떤 신화에도 무너지지 않을 ‘이야기’를 쌓을 것이다.
*
그 시각, 은빛의 늑대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키잇······ 빌어먹을 늑대.’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껏 새로 얻은 몸이 하필 이뮨타르의 늑대라니.
물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운인 상황이었다.
개연성에 육신의 대부분이 찢어지는 순간, 근처에 의식을 잃은 리카온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실낱같은 생존의 본능이 그녀를 살렸다. 오직 그녀가 기생종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두둑.
재앙의 파편에 맞은 리카온의 몸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길잡이는 재앙에 대항할 수 없는 몸. 이제 앤티누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숙주에 기생한다.’
앤티누스는 [질문의 재앙]을 죽이던 인간들을 생각하며 파르르 떨었다.
그의 행성을 멸절시킨 재앙을 막아내던 인간들. 그녀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 앞에서 절망했고, 다시금 결심했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고향인 클로노스를 망가뜨린 지구인들을, 반드시 멸종시킬 것이다······. 그녀의 더듬이가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이 기운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친숙한 기운. 마치, 과거 클로노스의 대충왕종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힘. 앤티누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만약 이만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에게 기생할 수 있다면, 복수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장소에서, 그녀는 뜻밖의 존재와 마주쳤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지구에 이런 존재가?
“키, 키이잇―!”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순간,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소년의 눈이 소름 끼치는 빛을 냈다.
“처음 보는 벌레다!”
소년, 이길영이 앤티누스를 향해 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