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92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진심을 가늠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어쩐지 귀찮아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적극적으로 귀찮음을 피력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정말로 채널을 옮길 거냐고 묻습니다.]
흥미롭다는 듯 독각이 미소를 지었다.
“다리라면?”
“네 채널을 나한테 연결시켜 줘.”
“그럼 중복 접속이 될 텐데요?”
“상관없어. 그래야 성좌들도 고생하지 않고 나를 통해 바로 채널을 옮길 수 있잖아?”
“흐음. 그렇긴 하겠죠. 이거 재미있군요.”
“그리고 사실 나도 조금 궁금해.”
“궁금하다?”
“내가 계약할 채널에 어떤 성좌들이 있는지 말이야. 이런 깡촌 같은 채널에만 있다 보니 커다란 채널은 어떨지 좀 궁금하기도 하거든. 미리 보고 싶은데. 안 될까?”
나는 일부러 비형 쪽을 향해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다. 실시간으로 상처받는 비형의 얼굴. 독각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비형, 정말 좋은 화신과 계약하셨군요. 이제부턴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독각의 손이 허공을 누비더니, 이내 시스템이 조작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대도시의 공기를 느껴 보시죠.”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 몸에 새로운 코드가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와 이어지는 듯 분명한 연결감.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나를 보는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온몸의 솜털이 솟았다.
비형의 채널에 있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단지 시선만으로 느껴지는 다수의 존재감.
대단하다.
이것이 도쿄 돔을 장악한 도깨비의 채널이라는 건가?
“어떻습니까? 당신이 활동할 새로운 리그가.”
단순히 일본의 성좌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이 자식, 이계나 다른 대륙의 고정 구독좌들까지 가지고 있는 건가?
이런 곳에서 활동하면, 한 번에 대체 얼마나 많은 코인을 쓸어 담을 수 있는 거지?
솔직히 가늠도 잘 되지 않는다.
“대단하네. 진짜 큰데?”
“그럼 이제 다시 계약을······.”
“그 전에, 잠깐만 인사를 하고 싶어. 괜찮지?”
“······그렇게 하시죠.”
독각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허락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쿄 돔의 성좌님들. 제 말 들리십니까?”
[한반도를 싫어하는 몇몇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몇몇 분들은 제 이야기를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절대 왕좌]를 부수고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된 김독자입니다. 참고로 저는 배후성이 없고······ 음, 뭐. 그렇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쿄 돔의 성좌들이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간단한 소개를 했을 뿐인데, 몇몇 성좌들이 벌써 내게 간접적인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좋다.
시작이 나쁘지 않은데?
“그런데 말입니다. 채널에 접속한 기념으로, 제가 작은 이벤트를 하나 열어볼까 합니다. 뭐냐하면, 한일 합작 이벤트라고나 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 당장 #BI-7623 채널로 접속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찍 온 성좌들한텐 추첨해서 코인도 줄 거니까 꼭―”
뚝, 하고 채널이 끊어졌다.
눈을 뜨자, 독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뭐하긴. 이벤트 하는 거지.”
“대체 무슨 생각을······ 죽고 싶은 겁니까? 내 채널의 성좌들이 그런 얕은수에 놀아날 것 같······.”
기꺼이, 놀아나 줄 것이다.
왜냐하면 딱 궁금한 지점에서 네가 끊어줬으니까.
그리고 독각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성좌님들.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흐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비형의 채널에, 조금씩 성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BI-7623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많이들 와주셨네요. 고마워요. 이벤트 때문에 오신 거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잡스런 성좌들의 등장에 짜증을 냅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적대 성좌들의 등장에 분개합니다.]
“잠깐만, 싸우지들 말고. 싸우라고 부른 거 아닙니다.”
[무라마사를 즐겨 쓰는 성좌가 어서 코인 추첨을 진행하라고 닦달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그래서 코인 이벤트는 언제 하느냐 묻습니다.]
“닦달하지도 마세요. 좀 있다가 할 거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겨우 그 한 푼 두 푼 받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애초에 화신이 없으면 당신들도 코인을 쓸 곳이 없잖아요? 천천히 가자고요 천천히.”
[몇몇 성좌들이 불만스런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혹시 아까 못 들은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말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배후성이 없는 김독자라는 놈입니다. 왕들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재앙은 시작되기도 전에 두 개를 막았습니다. 아마 전 세계를 뒤져 봐도 나보다 강한 화신은 많지 않을 겁니다. 배후성이 없는 화신 중에서는 아예 없을 거고. 그런데 말입니다······ 슬슬 이 짓도 힘들더라고요.”
내 의도를 눈치챈 듯, 독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잠깐! 당신······!”
나는 독각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연출?
그래, 내가 진짜 ‘연출’이 뭔지 보여주마.
“서울 돔은 지금 다섯 번째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똑똑한 당신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곧 당신들이 좋아하는 그 이벤트가 있을 겁니다.”
이제 시나리오 시작까지는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재앙 시나리오’는, 시작 전 특별한 이벤트를 개최한다.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는 모든 성좌들의 연회.
이제 곧, 두 번째 <배후 선택>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기념으로, 나도 깜짝 이벤트를 한 번 진행해볼까 합니다. 만약 <배후 선택> 당일까지, 이 채널의 구독좌 숫자가 1만을 넘긴다면······.”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침을 꿀꺽 삼킵니다.]
“나는 이 채널의 성좌들 중 하나를, 내 파트너로 삼으려고 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롭다는 듯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별도, 종족도, 출신 세계도 상관없습니다. 강하든 약하든, 유명하든 아니든. 어느 쪽이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열정뿐입니다. 나와 함께, 이 빌어먹을 이야기의 끝을 볼 수 있다는 열정.”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자신의 머리를 닦습니다.]
“누구든 좋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만입니다. 기억하셨죠? 꼭 다른 분들한테도 제대로 전해주세요.”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뒤늦게 독각이 더듬거렸지만, 이미 일은 터진 뒤였다.
악을 쓰는 독각의 목소리.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채널 메시지들.
곳곳에서 들려오는 간접 메시지에, 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멍하니 있던 독각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피어올랐다.
뭔가를 결심한 듯, 놈이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화신 김독자. 당신은 여기서 죽어줘야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웃었다.
“지금 많은 성좌들이 이걸 보고 있다고. 후폭풍이 두렵지 않은 모양인가봐?”
“도쿄 돔의 주인을 얕보지 마시죠.”
분노한 독각의 표정에는 약간의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벌레 하나 죽인다고 몰려올 개연성을, 제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독각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부딪쳤다.
정말로 벌레 하나를 터뜨려 죽이듯, 무심한 손짓이었다.
파지지지직!
그리고 강력한 스파크가, 내 주변에서 튀어 올랐다.
독각의 특기인 ‘풍선 터뜨리기’였다.
이제 저 전류는, 내 몸을 풍선처럼 부풀린 뒤 터뜨릴 것이다.
부어오른 내장은 파편이 되어 비산할 것이고, ‘나’였던 모든 조각들은 먼지가 되어 우주의 잔해로 흩어질 것이다.
원래라면 그래야 했다.
“······이게 왜 이러지?”
따악!
다시 한번.
따악!
독각은 두 번이나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나 내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파크조차 사라져버렸다.
“대, 대체 이게······.”
당황한 독각이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녀석은 알지 못했다.
문제는 녀석의 손가락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소소 소름이 돋는 느낌과 함께, 뒤쪽에서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가 시야를 어둡게 만들었다.
“야. 쪽바리 도깨비.”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나를 지켜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스템을 사용하는 도깨비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같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존재뿐이다.
“힘자랑하니까 재밌냐?”
처음으로 들어본, 비형의 목소리였다.
경악한 독각이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구속의 문자]를······?”
“아, 그거? 그냥 힘주니까 툭 끊어지던데?”
독각의 얼굴이 붉어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녀석의 표정에 격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고작 하급 도깨비가······ 비형! 이게 지금 무슨 무례입니까?”
“하급? 너도 구독좌수만 많지 하급이잖아.”
“나는 일부러 진급을 안 하고 있을 뿐입니다. 감히 도쿄 돔의 주인인 나에게 대드는 겁니까?”
“도쿄 돔? 좋지, 도쿄 돔. 거기 좋은 성좌들 많더라?”
내 뒤에서 나온 비형이 성큼성큼 독각의 앞으로 다가갔다.
“근데 너, 이렇게 작았냐?”
왜일까.
분명 겉모습은 그대로였는데도, 비형은 독각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였다.
거인 같은 비형의 그림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도깨비는 구독좌가 많아질수록 권능이 강해진다.
공포에 질린 독각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어, 어떻게······?”
“너 아까 잘도 지껄이더라. 뭐? 내가 시나리오를 불법적으로 조작해?”
비형의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난 검은 팔이, 독각의 멱살을 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대놓고 남의 화신 훔쳐가는 새끼가······ 상도덕은 혹부리 영감한테 배웠냐?”
“으, 으으. 이런 짓을 하면, 당신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알게 뭐야 씨발!”
그림자의 오른쪽 팔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랗게 부풀고 있었다.
“넌 안드로메다에 간 네 개념이나 찾아와라!”
투콰아아앙!
그림자의 주먹을 맞은 독각이 천장의 보호막을 뚫고 먼 우주 저편으로 날아갔다.
도깨비니까 저런다고 죽진 않겠지만, 한동안 꽤 타격을 받은 상태일 것이다. 조금은 분이 풀린 듯, 비형이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뻣뻣해진 목을 풀며 비형에게 다가갔다.
그저 채널이 성장했을 뿐인데, 비형의 모습은 조금 낯설어 보였다.
머쓱하니 서로를 쳐다보는 순간, 비형의 멍한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형의 입술.
아마 도깨비는, 진짜 기쁠 때 저런 표정을 짓는 모양이었다.
“너 내가 지금 뭐 보고 있는지 알아?”
모른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아마 내가 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채널 레벨이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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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역사적 화해를 원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배후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별 바꾸기를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진의를 궁금해합니다.]
[하위문화를 즐기는 한 성좌가 당신에게 관심을 가집니다.]
끝도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가, 나와 비형의 귓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이제 무대는, 세계로 확장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