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91화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뭐야? 대체 무슨 소란인데? 갑자기 멀쩡하던 개연성을 왜 걸고넘어져?” “뭐긴, 괜히 시비 털려는 거지.” “시비? 왜?” 왜긴 왜겠어. 내가 이적 제안을 거부했다고 이렇게까지 나온다 이거지? 하늘에 떠 있는 독각이 관리국 쪽에 보고를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개연성 적합 판단······. 설마 그걸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이야. 슬슬 다른 대형 채널의 도깨비들이 시비를 걸어올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찔리는 게 있는 비형은 아까부터 얼굴이 새파래진 채 나와 독각을 번갈아 보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어,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솔직히 말해봐. 너 나랑 계약한 거 들켰어? 비형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깨비 보따리 열어준 게 들켰나? ―그, 그것도 아냐. ―진짜지? ―아, 아마도······. ―그럼 쫄 것 없어. 게다가 그거 다 걸렸다고 해도, ‘개연성 적합 판단’에 요청될 만한 일도 아냐. 애초에 규정 위반도 아니잖아? 내 말은 사실이었다. 화신이 직접 ‘스트림 계약’을 맺거나 ‘도깨비 보따리’를 사용한 전례가 없을 뿐이지, 그 모든 일들이 스타 스트림의 메인 규정에 직접 위배 되는 일들은 아니었다. 뒤늦게 안심한 듯, 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알겠어. 어린아이처럼 쩔쩔매는 비형을 보고 있으니, 대체 내가 도깨비인지 이놈이 도깨비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나는 다시 독각을 비롯한 하급 도깨비들 쪽을 바라보았다. [#BI-7623채널의 시나리오 조작 경위가 보고되었습니다.] [현재 관리국에서 해당 사안에 대한 논의를 진행 중입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적합 판단은 결국 무산될 것이다. 만약 놈에게 ‘개연성’에 태클을 걸만한 증거자료가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적은 정보를 숨기고 있고, 나는 당장 그걸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봐, 시간 그만 끌고 보상이나 빨리 주지? 성좌들 지루해 하는 거 안 보여?” [곤란합니다. 이 사안은 보상 지급보다도 더 중요하니까요.]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아까 한 제안에 동의하신다면, 이 일들은 모두 없었던 일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나는 독각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래, 정면 승부를 해보자 이거지? “무슨 사안인데? 들어나 보자. 대체 내가 소속된 채널의 어떤 부분이 불법 조작이라는 거야? 증거 있어?” 만약 놈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걸로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고, 허세라면 사태는 즉각 종결될 것이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독각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듣고 싶으십니까? 후회하실 텐데요.] “말해봐.” [이 사안은 김독자 당신과도 관계있습니다.] “······나랑?”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내가 텍본을 가지고 미래 정보를 모두 이용하고 있다는 것 때문인가? 하지만 필터링 때문에 그런 정보들은 성좌나 도깨비들에게 퍼지지 않았을 텐데? 그것 때문에 태클이 걸렸을 거면, 벌써 진즉에 나는 개연성 폭풍을 맞았어야······. [화면이 보이십니까?] 나는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스크린을 보았다. 스크린에는, 얼마 전 내가 벌였던 전투의 장면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첫 번째 스크린에 나온 것은 독희 이설화와의 결전이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대체 뭐가 증거라는 건데?” 화면에는 그저, 이설화를 죽이지 않는 내 모습이 나올 뿐이었다. 독각이 화면을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도 증거입니다.] 두 번째 화면은, 리카온과 앤티누스의 격전을 지켜보는 내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이어서 세 번째 증거는 이것입니다.] 세 번째 화면. 화면 속의 나는 [질문의 재앙] 명일상에게 일행들과 함께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봉인이 풀리는 명일상의 모습. 갑자기 속이 답답해진다. [이 화면들의 공통점을 모르시겠습니까?] 그 순간 깨달았다. 녀석은,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면을 보신 성좌님들은, 혹시 아시겠습니까?] 순간 주변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독희와의 싸움, 앤티누스와의 싸움, 그리고 질문의 재앙과의 싸움. 이 세 가지 싸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이 돌아가면서 떠올랐다. [그는 사실 독희를 죽이고 ‘재앙’을 막을 수 있었고.] 녀석의 손가락이 독희를 가리켰고. [앤티누스를 죽여 ‘재앙’을 막을 수 있었으며.] 앤티누스를 가리켰으며. [‘질문의 재앙’이 봉인이 풀리기 전 ‘재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명일상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런데 그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잠깐만! 너 지금······!” 그제야, 나는 독각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그렇구나. 이것이 도깨비란 놈들의 치밀함이구나. [성좌 여러분. 화신 김독자는 채널의 이야기꾼인 ‘비형’과 결탁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자신의 힘을 숨기고, 시나리오의 전개를 조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억지스런 연출로 시나리오를 농락하고, 악의적인 목적으로 답답함을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마지막 화면. 그곳에서, 나는 [바람의 길]을 사용해 명일상을 해치우고 있었다. [오직, 마지막에 있을 카타르시스를 ‘연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자식은, 처음부터 ‘개연성 적합 판단’을 요청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독각······. 이 녀석의 진짜 목적은. [오직, 당신들에게 코인을 뜯어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비형의 채널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몇몇 성좌들이 침음합니다.] 사실 독각이 내민 증거들은, ‘개연성 적합 판단’의 어떤 항목에도 위배 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재미있는 시나리오를 만들기 위해 도깨비가 화신을 조종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문제는, 그것을 싫어하는 성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시나리오에 진지하지 않다고 생각한 순간, 성좌들은 흥미를 잃는다. 연극에서의 소격 효과와 같다. 관객과 인물 사이에 있는 [제4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 관객들은 바로 흥이 식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각이 의도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멍하니 입을 벌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킬킬거리며 웃습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합니다.] 어떤 성좌는 놀랐고, 어떤 성좌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어떤 성좌는 시큰둥하게 굴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다른 성좌들이었다. [흥이 깨진 일부 성좌들이 채널에서 퇴장합니다.] [채널의 공정성을 의심하는 성좌들이 채널에서 퇴장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채널에 코인 환불을 요청합니다.] ‘비형’의 채널에서 성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채널의 규모가 감소합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간접 메시지. 창백해진 비형의 체구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녀석의 뿔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채널 망했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줄어드는 성좌들의 숫자를 보며, 나는 독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으니까, 얘기 끝났으면 보상 줘. 네 제안 받아들일 테니까.” 독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래도 현명함이 남아있긴 하군요. 믿을 수 없다는 듯, 비형의 눈이 커졌다. [너, 너······!] “그렇게 보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열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신감에 비형의 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식이, 겁먹기는. ―비형, 나 믿냐? ―무슨······. ―그냥 딱 한 번만 믿어봐라. 어차피 이대로면 다 망하게 생겼잖아? 통신을 끝낸 나는 독각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만 이동하지.” [좋습니다. 그럼, 달콤한 보상의 시간을 가져 보죠.] 독각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주변의 정경이 사라졌다. 나타난 곳은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연상시키는 방이었다. ······여기가 녀석의 ‘감투’인가? 나는 조금 긴장하며 주변을 살폈다. 호화로운 융단 위로 도깨비들이 사용하는 높이가 낮은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벽감의 한쪽에 비치된 다양한 종류의 술들. 뒤늦게 도깨비 녀석들이 상당한 애주가였다는 설정이 떠오른다. 대충 파악을 끝낸 나는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은······. 맙소사. 시야를 가득 메운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장대한 우주의 암흑 사이로, 멀리 반짝이는 별들의 흐름이 보였다. 쏟아지는 보석들처럼 도도하게 흘러가는 대우주의 절경(絕景).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며, 제각기 거대한 은하를 이루는 성좌들. 우습게도 그 순간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동하고 말았다. 저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Star stream)이구나. 모든 시나리오를 관장하는 위대한 별들의 흐름. 저곳에서 모든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대단한 정경이죠.”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독각이 서 있었다. “저도 가끔 저 풍경을 망연히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니까요.” “너 지금······.” “아, 놀랐습니까? 이게 제 ‘진짜’ 목소리입니다.” 도깨비의 목소리를 육성으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방송으로만 듣던 도깨비의 목소리. 그렇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독각은 녀석의 진짜 ‘본체’라는 것이었다. 독각의 눈이 고요히 빛났다. “허튼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무슨 생각? 아, 혹시 내가 널 죽일까봐?” 푸흐흣,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불가능하다는 건 아시는군요.” “나도 도깨비한테 대항할 만큼 미친놈은 아니야.” “마음에 듭니다. 그럼 계약을 시작하죠.” 독각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눈앞에 계약서와 함께 또 다른 도깨비가 나타났다. 비형이었다. 전신을 코드가 적힌 시스템 문자로 구속 당한 채 입까지 틀어 막힌 비형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비형은 공증인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그와의 계약을 파기해야, 저랑 계약할 수 있으니까요. 파기 대가는 비형이 알아서 감당할 겁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이 녀석, 역시 나와 비형과의 계약을 알고 있었군. 즉, 이 녀석은 처음부터 내가 ‘화신 찾기’ 집단을 끌기에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접근했다는 뜻이다.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난 상관없으니까.”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일단 계약서를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저도 이런 종류의 직접 계약은 처음이라 말이죠.” 나는 계약서를 읽어 보았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계약서는 완전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후원금의 분배는 5대 5. 거기다 내 자유를 구속하는 몇몇 항목들. 심지어 나는 이제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독각이 웃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업계 평균입니다만, 원하신다면 조금 조정을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업계 평균 같은 소리하네. 비형도 처음부터 이딴 계약서를 들이밀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나쁘지 않네. 그런데 계약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 “제안? 뭐죠?” “나만 채널을 쏙 옮기면 뭔가 아쉽잖아? 설마 나 하나로 만족할 건 아니지? 비형 녀석 채널에는 제법 강한 성좌들이 몇몇 있다고.” “호오? 누가 있습니까?” “긴고아의 죄수, 심연의 흑염룡, 거기에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랑······.” 수식언이 이어질 때마다, 독각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차올랐다. “긴고아의 죄수? 설마 그런 성좌를 데리고 있을 줄은······ 비형, 제법이군요.” 입이 막힌 비형이 읍읍,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솔직히 이 성좌들, 이 채널에 두고 가기 아깝거든. 그래서 말인데, 이 성좌들이 나랑 같이 채널을 옮길 수 있도록 네가 다리를 좀 놔 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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