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90화 나는 명일상의 죽음이 남긴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죽음은 그저 몇 줄의 메시지로 남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살짝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이야기에 크게 기뻐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시나리오를 스타 스트림에 추천하였습니다.] [25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가 된 강동구의 모습. 고작 재앙 하나가 잠깐 지나갔을 뿐인데 지상 시설 전반이 파괴되고 고층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 있었다. 노을이 맺힌 거리로, 새카맣게 먼지를 묻힌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왔다. 모두, 아이템들 노리고 여기까지 달려왔던 사람들이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그저 [등장인물]로 남아야 했던 사람들. 상처를 붙잡은 채 끅끅대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내가 그동안 ‘멸살법’을 모두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 설정 하나하나를 이해했고, 설명의 의미를 곱씹었으며, 마침내 작가의 의도를 알아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멸살법의 어디에도, 이들의 죽음을 묘사하는 문장은 없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유중혁도 나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유중혁은 몇 번이나 혼자서 이 광경을 보아왔을 것이다. “유중혁.” 유중혁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몇 번인가 혀끝에서 말을 굴리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시나리오는 계속될 것이고,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순간들을 보게 될 것이다. 몇 번이고, 다시 텍스트로 표현되지 않는 광경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더니 뜻밖의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도깨비 ‘독각’이 당신을 자신의 채널에 초대합니다.] ······누가 누굴 채널에 초대해?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메시지는 또 떠올랐다. [도깨비 ‘독각’이 당신을 자신의 채널에 초대합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이쪽을 내려다보는 도깨비들의 무리가 보였다.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외다리 도깨비. 뒤쪽에 쭈그러져 있는 비형 녀석이 참담한 눈빛으로 나와 독각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도 ‘갑질’은 존재한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겠군 그래.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켠 후, 일부러 시시껄렁한 목소리를 냈다. “뭐해? 보상 안 줄 거야?” 내 말에 독각의 듬성듬성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녀석의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아, 당연히 드려야죠. 죄송합니다. 변변찮은 실수를 했군요.] 독각은 무서운 도깨비다. 허당 같은 비형이나, 자존심만 센 중급 도깨비와는 체질적으로 다른 녀석. 아무나 저런 메이저 채널의 이야기꾼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서브 시나리오 ― ‘SSS급 사냥’이 종료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보상으로 50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갑자기 막대한 코인이 들어오자,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 시나리오 한 방으로 무려 5만 코인이라니. 대단한 혜자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서브 시나리오가 도깨비의 임의로 성립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 코인들은 대부분 독각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것이다. 제법 배가 아플 것이라 생각했는데, 독각은 오히려 빙긋 웃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은 도깨비들의 큰 기쁨.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중얼거리는 녀석. 하긴, 도쿄 돔의 초대형 채널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니 이 정도 출혈로는 끄떡없을 것이다. 지금쯤 일본에서 잘 나갈 녀석이 누가 있더라? 아직 위인급들이 활약할 시기니까 ‘오다 노부나가’나 ‘미야모토 무사시’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래······ 소속 화신들이 톡톡히 벌어 줘서 배가 불렀다 이거지? “그럼 추가 보상도 빨리 주지 그래. 이게 다가 아닐 텐데?” [아, 물론입니다. 당연히 드려야지요. 이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신데.] 어쩐지 비꼬는 말투라 더 열 받는다. 저 자식만 아니었더라도, [질문의 재앙] 시나리오는 훨씬 쉽게 끝났을 텐데. 뒤쪽에서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비형이 내게 통신을 걸어왔다. ―야······ 있잖아. 그러나 통신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독각이 비형의 말을 끊었다. [비형, 보상을 준비하십시오.] 화들짝 놀란 비형이 소리를 냈다. [예?] [보상을 준비하십시오. 두 번 말해야 알겠습니까?] 얼씨구······ 저놈 봐라? 머뭇거리던 비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서브 시나리오 담당자는 독각님이신데······.] [재미있군요, 비형. 혹시 화신들 앞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겁니까?] 마치 누구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서슴없는 아우라가 비형의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도깨비의 힘은 곧 채널의 크기에 의해 좌우된다. [요즘 채널 좀 커졌다던데, 정말인가 보군요.] 독각의 덤덤한 목소리에 작은 비형의 몸이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아,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여섯 번째 시나리오는 한국과 일본이 함께 하는 거였죠? 잊으셨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옙!]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래도 내 채널을 관리하는 비형이 굽신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금 비형에게 독각은 고등학교 시절 나를 괴롭혔던 송민우와 비슷한 존재일 것이다. [추가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기본 보상으로 ‘패러사이트 종족의 호부’를 획득하였습니다.] [추가 선택 보상이 존재합니다.] [당신은 해당 시나리오의 최대 공헌자입니다.] [당신은 추가 보상의 우선 선택권을 가집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카탈로그를 보았다. 역시, 그래도 재앙을 잡았다고 꽤 쓸만한 걸 주려는 모양이다.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 SSS급 [흑염의 반장갑] - SSS급 [실피드의 도약 부츠] - SSS급 트리플 S급의 보상 아이템들. 나는 아이템들의 옵션을 쭉 훑어보았다. 안주머니에 특수 옵션으로 ‘아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물건을 넣어 다닐 수 있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 그리고 어둠과 불꽃 속성의 스킬 성능을 크게 증폭시켜 주는 [흑염의 반장갑]. 마지막으로 하루에 세 번 특수 옵션 ‘도약’을 사용할 수 있는 [실피드의 도약 부츠]. 비록 성유물급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 보상이면 10번대 시나리오를 넘어설 때까지도 쓸만한 물건들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아니, 그래도 SSS급인데 10번대 시나리오까지밖에 못 쓰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멸살법’의 세계가 원래 그딴 식인 걸 내가 어쩌겠는가. ‘멸살법’의 세계는 아이템 등급의 인플레가 상당하기 때문에, 초반에 입수한 아이템과 중후반에 얻은 아이템은 같은 등급이라도 성능의 차이가 꽤 큰 편이다. 물론 지금 얻은 SSS급이라고 나중에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고, 특수한 재료로 장비 초월을 하면 된다. 성유물이 좋은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다른 등급제 아이템들과는 달리 성유물은 초월이 필요 없다. 시나리오가 개방됨에 따라, 성유물은 개연성의 제약을 벗어나 자연히 본래의 힘을 회복해나가기 때문이다. [······보상 골라 보세요.] 시무룩한 얼굴의 비형이 내게 말했다. 자식이 괴롭힘 좀 당했다고 힘이 다 빠져서는. 순간 비형의 도깨비 통신이 들려왔다. ―개인적으로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추천해. 저거, 숨겨진 옵션이 하나 더 있거든. 나중에 초월하기도 쉽고. 그래도 딴에는 내 매니저라고, 일은 하는구만. 눈치 빠른 독각이 금세 비형을 노려봤다. [비형?] [······옙!] [성좌님들한테도 아이템 설명해주셔야죠. 잊었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독각의 말에, 비형이 서울 돔 채널의 성좌들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유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유중혁, 넌 뭐 고를 거냐?” 우선 선택권은 내게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유중혁에게 양보해주기로 했다. 도움받은 것도 좀 있고. ······물론 이러면 유중혁이 날 살살 때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중혁?”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또 선 채 기절했냐?” 녀석의 눈 앞에 몇 번인가 손을 흔들었지만 놈의 동공엔 변화가 없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회복 동면 Lv.3’을 사용 중입니다.] ······하긴, 그 몸으로 그렇게 날뛴 게 비정상이었지. [회복 동면]까지 사용할 정도라면 몸 상태가 완전히 개차반인 모양이다. 그래도 그냥 고를 수는 없어서, 나는 일단 [한낮의 밀회]를 통해 간단한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곁에서 내가 하는 꼴을 지켜보던 한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 내가 대신 골라도 돼?” “나중에 유중혁한테 처맞고 싶으면 그러든가.” 한수영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비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를 고르겠다.” 그런데, 대답한 것은 비형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독각이 손가락을 튕기자 카탈로그가 꺼졌다. [좋은 아이템을 고르셨군요. 그럼 바로 지급 장소로 이동하죠.] 지급 장소? [추가 보상은 절차상 이곳에서 지급이 안 됩니다.] 이것 봐라. “어디로 간다는 거지?” [제 ‘도깨비 감투’로 모시겠습니다.] 도깨비 감투. 전래동화에서는 ‘감투’가 의복의 일종이지만, 여기서는 다르다. ‘감투’는 모든 도깨비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방’이다. 그들의 본체를 감추고 있는 방. “그건 곤란한데. 그냥 여기서 줬으면 좋겠어.” 감투는 녀석의 고유 공간. 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내가 알기로, 추가 보상을 받는데 ‘도깨비 감투’로 이동하는 절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감투에 들어간 놈이 무슨 제안을 할지도 뻔했다. 옆에서 비형이 조마조마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독각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자꾸 툴툴거리시면 아이템을 지급을 취소하는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든가.” 시나리오의 보상에 한해서는 또 철두철미한 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이다. 아무리 도깨비의 재량에 의존하는 ‘서브 시나리오’라도, 시나리오가 끝난 마당에 준다고 한 아이템을 도로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다. 독각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재미있군요.] ―그렇게 나오면 좋지 않을 텐데요. 도깨비 통신. 독각이 천천히 입을 열자, 두 개의 목소리가 교차하며 들려왔다. [김독자. 당신의 이야기는 자주 들었습니다. 얼마나 유명한지, 반도 건너편 땅의 성좌들도 당신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도깨비 비형과 계약을 한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들 간에는 ‘화신 양도’라는 게 가능하죠. [도깨비 앞에서도 당당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겠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내 채널로 오십시오. 이번에 한반도 쪽으로 채널 규모를 넓힐 생각입니다. 원하는 계약 조건이 있다면, 얼마든지 맞춰 주겠습니다. 흥미롭다. 이런 식으로 스카웃 제의를 해올 줄이야. 독각의 제안은 축구로 치면 아시아 중상위리그 팀에서 프리메라리가의 상위 팀으로의 이적 권유나 마찬가지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적 이후다. 나는 ‘독각’이라는 녀석을 잘 알고 있다. “뭘 잘못 본 모양인데, 난 사실 겁이 많아. 이렇게 너랑 말하는 것도 벌벌 떨리거든. 그러니까 빨리 아이템 주고 꺼졌으면 좋겠어.” 내 말에, 자신만만하던 독각의 표정에 처음으로 굳어졌다. [재미있군요. 거기다 겸손하기까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군요. 알아서 겸손해질 날이 올 겁니다. “······무슨 뜻이지?” ―비형의 채널은 곧 사라질 테니까요. 독각의 입가에 미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원래 이 이야기는 ‘보상’을 지급한 후 발표하려고 했는데, 유감이군요.] ······발표? 뭘 발표해? 내게서 눈을 뗀 독각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을 내뿜는 성좌들을 보며, 녀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울 전체가 울릴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시나리오를 흥미롭게 지켜봐 주신 성좌님들께, 조금 유감스러운 소식을 하나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급 도깨비 무리가 비형의 주변에서 빠르게 물러나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비형. 도깨비들이 저런 포지션을 취할 때는 반드시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 [불행하게도 서울 돔에서 활동하는 채널들 가운데, 시나리오 불법 조작을 자행한 채널이 발견되었습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독각’의 발언에 주목합니다.] [바로 도깨비 비형의 #BI-7623채널입니다. 조사 결과, 서울 돔의 하급 도깨비들은 해당 채널의 과도한 시나리오 조작으로 ‘개연성’이 침해당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잠깐만, 뭐라고? [고로 본 도깨비는 서울 돔의 하급 도깨비들을 대표하여, 관리국에 해당 채널의 「개연성 적합 판단」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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