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89화 슈우우우우우! 전신을 휘감는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새삼 ‘멸살법’에 나왔던 문장들을 되새겼다. 곁에서 아바타를 소환하던 한수영은 내가 무슨 스킬을 사용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뭐야, 너 그거 못 배웠다며!” “뒤로 물러나 있어.” [바람의 길]. 「왼손에는 질풍을, 오른손에는 폭풍을. 직선과 곡선이 부딪치는 장소에서 바람의 길은 열릴 것이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문장이, 내 발끝을 감도는 바람을 느끼는 순간 현실이 되었다. 불쑥 다가온 명일상의 주먹이 코끝을 스쳤다. 분명 맞았어야 할 공격이,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능력치 격차를 메우는 스킬의 힘. 이것이 이뮨타르의 비기였다. 명일상의 눈이 이채롭게 빛났다. “······응? 빨라졌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깨달음에 집중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책갈피의 남은 시간은 30분. “아하, 알겠다. 그거 늑대 새끼들 스킬이지?” 나를 보는 명일상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리고 있었다. “고작 잡스런 스킬 쓰면서 뭔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구네?” “······.” “그거 알아? 내가 이 손으로 그놈들 왕을 죽였어.” 그랬겠지, 물론. 나는 낯선 행성에서 죽어간 클로노스의 생명체들을 떠올렸다.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고향이 사라져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또 다른 행성에서 펼쳐지는 시나리오의 소재로 쓰여야만 하는 생명체들의 운명. 만약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면, 지구인들 또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콰아아아아! 명일상의 오른손에서 중흑염포가 발포되었다.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니 태극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 음양을 이룬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구문이 가진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렸다. 눈앞에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모여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바람의 방향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파츠츠츠츳! 미미하게 방향이 꺾인 흑염포의 에테르가 서로 부딪치며,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에테르 공격은 매질을 통해 전파되는 것. 전파의 근본을 흩트리면 공격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명일상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제법이네. 그 정도 재주는 부릴 줄 안다 이거지?” 입술을 질끈 깨문 명일상이 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블링크 Lv.4’를 사용합니다!] 또 블링크인가. 하지만 이제 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람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근처에 있는 모든 기척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나는 유중혁의 [주작신보]가 부럽지 않은 빠르기로 길을 달려 명일상을 찾아냈다. 나는 다짜고짜 사람을 붙잡고 질문을 이어가는 녀석의 등짝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퍼어억! 내 발차기에 얻어맞은 명일상이 건물의 철골을 뚫고 날아갔다. 뼈마디가 부서질 만한 타격이었는데도, 녀석은 멀쩡히 일어섰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네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간발의 차이로, 녀석의 다음 봉인이 풀려 있었다. “······간지러운데?” 마치 놀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 녀석은 어차피 자신이 이길거라 믿고 있을 것이다. 봉인이 풀릴수록 놈의 상처들은 아물고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력 소모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하하핫, 어디 또 막아보라고!” 실제로 [바람의 길]을 버프 스킬로만 활용해서는 절대 놈을 죽일 수 없다. 이것만으로 [질문의 재앙]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애초에 클로노스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시 ‘그걸’ 해야 한다. 문제는······ 이 기술을 쓰려면, 누군가 시간을 끌어 주어야 한다는 건데. ······응? 뭔가가 갑자기 반대쪽 하늘 위에서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하강하는 매처럼 나타난 검은 신형은, 창공을 꿰뚫고 명일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끔찍한 폭음과 함께 작은 크레이터가 발생했다. 바닥 속으로 짜부라진 명일상 위에, 익숙한 사내의 신형이 보였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사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중혁?” 이 자식, 회복하는데 이틀 걸린다고 하지 않았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유중혁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설마, 이 와중에 날 때리러 온 건 아니겠지? 그러나 유중혁은 내 두어 걸음 앞에서 멈춘 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시작해라.” 마치 내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듯, 유중혁은 나를 등지고 섰다. “놈은 내가 막는다.” 근처에 엎어져 있던 한수영이 나를 대신해 중얼거렸다. “하, 씨발. 역시 주인공······.” 하지만 기세등등한 목소리와 달리, 유중혁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다. 아직 성치 않은 몸. 온몸의 혈관이 거무죽죽 도드라져 있었다. 어느새 크레이터를 헤치고 나온 명일상이 히죽히죽 웃으며 핏물을 뱉었다. “아, 조금 짜증나네······.” 그 공격을 맞고도 여전히 별 타격이 없는 모습. 놈이 앞으로 나타날 ‘귀환자’들 중에서도 약한 편에 속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명일상이 달려들었고, 유중혁이 맞서 달려갔다. 그리고 나는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네 개의 바람이 만나 방위를 형성하고, 그에 다시 네 개의 바람이 더해져 팔괘의 묘를 이루니, 그로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리카온이 깨달음을 얻었던 그 구절을, 이제 내가 사용할 차례였다. 꽈드드드득! 팔괘의 형을 따른 신묘한 공기의 벽이 주변을 소용돌이치며 둘러싸기 시작했다. 작은 돔 형태의 공간. 빈틈없는 밀폐감에 숨이 조여왔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일격을 당한 유중혁이 뒤로 튕겨 나왔고, 명일상의 표정이 굳어졌다. 드디어 놈도, 이게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뭘 꾸미는······!” 다음 순간, 나는 돔 속의 공기를 모두 배출했다. 슈와아아아아! 일순 귀가 먹먹해지며 소리가 사라졌다. 바람은 무섭게 휘몰아쳤지만 돔 속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명일상이 입을 열었다. “······!” “······?” 몇 번이고 입을 움직였지만, 녀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매질이 없는 곳에서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녀석은 완전한 진공 상태에 있었다. 푸슈슈슈. 기압 차이로 인해 순간적으로 폐 속의 공기가 빠져나갔다. 나는 빠르게 그것을 다시 빨아들였다. 돔의 밖에서, 한수영이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가 발동합니다!] 「뭐야 이게?」 명일상의 속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왜 목소리가 안 나오지? 마법인가?」 당황한 명일상이 외쳐대고 있었다. 그럴 법도 했다. 모든 귀환자들은 패널티가 있다. 특정 조건하에 빠르게 본래의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귀환자들은 더욱 그렇다. [‘질문의 재앙’의 패널티가 발동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힘이 약화됩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네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으아아아, 안 돼!」 그들은 쉽게 강해질 수 있는 만큼이나 ‘쉽게 약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세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질문의 재앙]이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이유? 간단하다. 누군가에게 들리는 질문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능력치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씨발! 이거 풀어! 빨리 풀지 못해!」 녀석의 주먹이 몇 번이고 공기의 벽을 때렸지만, 벽은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매질이 없는 공간에서는 흑염포의 불길도 타오르지 않는다. [귀환자, ‘명일상’의 스물두 번째 봉인이 재생됩니다.] [바람의 길]을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진공감옥(眞空監獄). 이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질문의 재앙]에 대한 최적의 공략법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명일상이 뒤늦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죽으면 [진공감옥]이 부서질 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된다. 이곳은 내가 만든 거니까. 나는 [바람의 길]을 이용해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감옥의 면적을 빠르게 줄여나갔다. 쿠구구구구! 벽이 수축하는 순간, 나는 좁은 통로를 만들어 유중혁을 데리고 돔 밖으로 탈출했다. 돔 안에 남겨진 것은 이제 명일상 하나뿐이었다. 「······이 개자식들이!」 귀환자가 괜히 귀환자는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녀석의 공격에, 돔에도 조금씩 금이 갔다. 손을 들자, 바람이 엇갈리면서 약해진 부분을 메꿨다. 그리고 돔의 크기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주르륵. 과도한 집중에 코에서 피가 흘렀다. 내 최종 목표는, 저 ‘진공감옥’을 녀석의 신체에 한정하는 것. 하지만 컨트롤이 쉽지 않았다. 제기랄, 유중혁은 쉽게 하던데 뭐가 이렇게 어려워? “억지로 통제하려 하지 말고, 바람을 인도해야 한다.” 유중혁의 목소리. 그 순간 깨달음이 스쳐갔다. 어쩌면 ‘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녀석의 신체 근처에서 매질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슈우우우우! 「으, 으어어, 으아아아아! 숨막혀!」 자신의 목을 벅벅 긁던 명일상이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제법이군. 아주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니다.” 유중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명일상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되었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대흑염포 Lv.3’를 사용합니다!] 명일상의 오른팔이 시커먼 불길에 휩싸였다. 콰아아아아아! 놀랍게도 대흑염포가 바람의 돔을 뚫고 튀어나왔다. 나는 유중혁의 몸을 보호한 채, 납죽 엎드렸다. 둔한 충격이 머리 위를 긁고 지나갔다. 남은 마력을 다 쥐어 짜내려는 모양인지, 놈의 대흑염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괜히 바람일까. 대흑염포가 지나가면 다시 그 자리를 바람이 순식간에 메웠다. 놈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불똥처럼 튄 흑염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 내 표정을 본 유중혁이 말했다. “김독자, 허튼 생각 마라. 죽어도 상관없는 놈들이다.” “분명 그런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력을 다해 대흑염포에 맞섰다. 쏟아진 흑염의 불길이 강력하게 회전하는 돔의 위력에 흩어지고 비틀어졌다. 뒤이어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다 차단하지 못한 흑염의 불길이 내게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흑염이 살갗을 태웠고, 뼈마디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할 수 있다. 지금의 놈은 강하지 않아. 그 순간 나는 내 한계를 넘어 다른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감각이 희미해지자 내 몸이 곧 바람이 된 것 같았다. [노력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의 고통을 즐깁니다.] [당신의 영혼에 잠들어 있던 일말의 재능이 개화합니다.] 왼손으로는 [진공감옥]을 통제했고, 오른손으로는 바람을 움직여 대흑염포의 기운을 흩어냈다. 완전한 무아지경 속에서, 나는 [바람의 길]의 새로운 경지를 맛보고 있었다. 손끝에서 노니는 바람이, 내가 여태껏 알지 못했던 풍경을 사생하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의 두께가 일시적으로 얇아집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이게, [등장인물]들이 보는 세계였구나. 아무리 텍스트를 열심히 읽고, 궁구해도 알 수 없었던 어떤 감각. 오직 손끝의 페이지로만 느껴졌던, 하지만 나는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서사의 일부가 온전하게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읽은 것과 이해한 것은 다르다. 어쩌면 나는, 아직 이 세계의 일 퍼센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명일상의 흑염포가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씨발! 개새끼들! 죽어! 죽어어!」 급격하게 줄어드는 흑염포의 기세. 그리고 내 마력은 아직도 충만한 상태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아무리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해도, 내 마력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등 뒤에서 유중혁이 짓씹듯 말했다. “······네놈은 내가 죽일 거니까.” ······어쩐지 등이 뜨끈하다 싶었더니, 유중혁의 마력이었나. 그리고 잠시 후, 명일상의 공격이 그쳤다. [귀환자, ‘명일상’의 모든 봉인이 재생되었습니다.] 유중혁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8’이 해제됩니다.] 공포에 질린 명일상이 목을 쥔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커, 커헙, 크허헙······!” 황급히 숨을 몰아쉬며 달아나려는 녀석을 향해,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던졌다. “커허헉!” 녀석은 등에 칼이 꽂힌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놈은 이제 블링크로 달아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녀석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 말 못하니까 진짜 답답하네. 이제 궁금증은 다 풀렸냐?” “커어억······.” “이제부터 질문하면 죽인다. 아무것도 묻지 마라.” 귀환자.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오만하고 잔인한 존재들. 명일상은 그런 귀환자들 중에서도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지금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하나뿐이거든.” 뻐억! 뻐어억! “끄아아아악!” 억울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는 명일상의 눈빛에 공포가 어렸다. 나는 그 공포가 온전히 뭉개질 때까지, 놈을 때리고 또 때렸다. 얼굴이 피곤죽이 된 명일상이 간신히 혀를 비틀었다. “이, 이럴 리가 어, 없는데······.” 간신히 눈을 끔뻑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녀석의 전사(前事)를 떠올렸다. 「“내, 내가 용사라고? 내가 진짜 용사가 되었다고? 진짜?”」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었던 명일상. 세계를 구할 용사로 선택되어 클로노스에 떨어졌던, 순진무구했던 소년. 분명 녀석도 이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한 대륙의 생명체들을 멸절시키고, 잔학무도한 살인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되었다. “재앙이 되기를 선택한 것은 너야.” 그리고 이제 와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등장인물 ‘명일상’에 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명일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분명, 이, 세계의, 주인, 공······.”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놈의 말은, 안타깝게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진짜 주인공이, 녀석의 머리에 칼을 꽂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유중혁의 칼날에 숨이 끊어진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 세계를 멸망시킨 재앙의 최후라기엔, 허무한 죽음이었다. [당신은 시나리오 최초로 ‘귀환자’에게 대적하여 승리했습니다!] [공헌자 : 김독자, 유중혁] [업적 보상으로 40000코인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설화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됩니다.] [설화, ‘이적(異蹟)에 맞서는 자’가 추가됩니다.] [새로운 성흔의 가능성을 입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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