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9화
나는 망설이는 이현성과 한명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저 철문 너머에 있는 녀석에게 죽든가, 아니면 열차 밖으로 나가서 운을 시험해 보든가. 어느 쪽을 고르실 겁니까?”
“으, 으으······.”
“독자 씨, 저 철문 너머에 있는 게 꼭 적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강철검제는 결정적인 순간에 유약하다. 이현성이 파티의 리더가 못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칸에서 넘어온다면 생존자일 가능성이 클 텐데요.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는 대답 대신 피투성이가 된 객실을 훑어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인 이현성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죠.”
“나, 나가자! 빨리 나가자고!”
순간 두 사람도 자각한 것이다. 다른 칸의 생존자들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에겐, ‘곤충’이라는 행운이 없었으리라는 것도.
“이쪽은 고장 났어요!”
“젠장, 이쪽도 안 돌아가!”
이현성과 한명오의 외침을 들으며, 나 역시 개폐 장치를 확인했다. 아까는 결계가 쳐져 있었던 개폐 장치에 이제는 손을 댈 수 있었다.
통로를 잇는 개폐 장치를 제외하면 지하철 한 량의 출입 개폐 장치는 총 8개. 그리고 아직 확인하지 않은 출구는 총 3개였다.
쿵!
철문은 이제 1분을 채 버티기 힘들어 보였다. 아무리 주인공이라고 해도 초반이라 근력 레벨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 저 두꺼운 철문을 부술 생각을 하다니 솔직히 경이로웠다.
“독자 씨! 여기―”
멀쩡한 수동 개폐 장치를 발견했다.
“엽니다!”
그러나 개폐 장치가 매끄럽게 돌아간 것과는 별개로, 문은 한 번에 열리지 않았다. 오분의 일쯤 열리던 문은 턱에 걸린 것처럼 도중에 멈춰 섰다.
“······여기도 고장 난 것 같군요.”
“다른 곳은 어때요?”
“그나마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는 곳은 이곳뿐입니다.”
아이라면 모를까. 성인 남녀가 빠져나가기엔 좁은 틈이었다. 한명오와 이현성이 문 한 짝씩을 붙들고 기를 써댔으나,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유 코인 : 4700 C]
코인의 사용처 중 하나는 종합 능력치를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체력 레벨을 10으로 만드는데 이미 2700코인을 사용했다. 남은 코인으로 근력 레벨을 높인다면 어떻게든 해결은 되겠지만,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초반 코인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기대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현성 씨. 스킬을 쓰세요.”
“예? 스킬이라 하심은······.”
나는 조용히 [등장인물 일람]을 가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현성
나이 : 28세
배후성(背後星) : 강철의 주인
전용 특성 : 불의를 외면한 군인 (일반)
전용 스킬 : [총검술 Lv.2], [위장 Lv.1], [인내심 Lv.1], [정의감 Lv.1]
성흔 : [태산 밀기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8], [근력Lv.8], [민첩Lv.7], [마력Lv.5]
종합 평가 : 전체적인 능력치가 매우 준수합니다. 불의를 놀랍도록 잘 참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좌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아무런 제약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이현성의 정보들. 선택한 배후성도 특성도 다행히 내가 책에서 읽었던 그대로였다.
“아까 특성창 여셨을 때 확인하셨을 텐데요. 이현성 씨는 군인이시니까 이 상황에서 쓸 만한 스킬이 하나쯤 있을 겁니다.”
“그게··· 하나 있긴 합니다만, 어떻게 쓰는지―”
“속으로 그 스킬을 사용한다고 생각하세요.”
“······그걸로 되는 겁니까?”
“돼요. 저도 아까 해봤으니까요.”
이현성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흐아아아아압!”
문을 붙잡은 이현성의 이두박근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무사히 [태산 밀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사실 [태산 밀기]는 엄밀히 따지면 스킬이 아니라 ‘성흔(星痕)’이었다. 그리고 성흔은 배후성으로부터 받는 힘이다. 굳이 ‘스킬’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드드드드드.
마치 거대한 태엽을 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이 친구 완전 장사였잖아!”
“됐다! 정말 됐어요!”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의심은커녕 도리어 신뢰도가 올랐다. 이럴 때 보면 이현성은 단순한 인물이다.
“내리죠, 어서!”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나는 이길영을 들어 이현성에게 건네주었다.
“현성 씨. 아이를 업어요.”
“알겠습니다.”
이제 철문은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이 맞다면, 당장 문제는 저 철문이 아니다.
[······이것 참.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까 제가 말했죠?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젠장! 아직 시나리오 준비가 안 끝났는데―]
화가 난 듯한 모습의 도깨비가 동호대교 상공에 떠 있었다.
“으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오지 말자고 했잖아!”
머리가 터질 거로 생각했는지 한명오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휴······ 뭐 어쩔 수 없죠. 정말 운이 좋은 인간들이라니까.]
왜냐하면 바로 열차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가 ‘두 번째 시나리오’의 시작이니까.
[두 번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서브 시나리오 - 탈출>
분류 : 서브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끊어진 다리를 건너 옥수역으로 진입하시오.
제한시간 : 20분
보상 : 200코인
실패시 : ???
+
“독자 씨, 뭔가 이상해요. ‘끊어진 다리’라고 되어 있는데, 아직 다리는······.”
“신경 쓰지 말고 달려요! 빨리!”
“아, 알겠어요!”
사실 유상아의 지적이 맞다. 다리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그건 바꿔 말하면, ‘다리는 반드시 끊어질 것’이라는 얘기였다.
“독자 씨도 어서 오세요!”
“갑니다.”
아직 다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너무 빨리’ 열차에서 내린 까닭이었다. 도깨비가 말한 준비 시간은 10분.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3분이나 일찍 탈출했다.
비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그런 편법을 쓰지 않고는 클리어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체력적으로 불리한 사람이 끼어있다면 더욱. 곁을 달리는 유상아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헉, 헉. 역시 이현성 씨는 군인이라 그런지 체력이 좋네요.”
“……숨을 아껴 두세요.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일행 중 가장 앞서 달려간 것은 아이를 업은 이현성이었다. 코인 투자도 안 한 순정 상태의 몸으로 체력, 근력, 민첩의 총합이 23을 넘어서는 괴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겁지겁 뛰어가는 한명오가 그다음을 이었고, 나와 유상아가 대열의 마지막이었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싶었다.
“으앗, 저게 뭐야!”
한명오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한강의 중심에서 뜬금없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더니 물보라가 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보라의 중심에서 나타난 거대한 괴수.
어룡(魚龍)이었다.
문제는 그 어룡의 크기가 아까 유리창 너머로 본 녀석의 곱절은 되어 보인다는 것. 저 정도면 씨-써펜트가 아니라······ 씨-커맨더(Sea-Commander) 급은 되겠는데.
일반 어룡인 씨-써펜트만 해도 7급 괴수다. 9급 괴수인 땅강아쥐만 돼도 보통의 인간이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하면, 7급쯤 되면 보통의 인간은 이빨만 스쳐도 찢겨 죽는다.
즉, 지금 오는 저 녀석은 초반의 화신체들이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괴수였다. 물론 잡을 필요는 없다. 잡으라고 만든 놈도 아니고.
쿠구구구구!
한강물이 해일처럼 밀려오며, 어룡의 아가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리를 통째로 물어뜯어 붕괴시키려는 모양이었다.
“다리가 부서지겠어!”
“달려요! 달리면 건널 수 있으니까!”
이제 남은 거리는 200미터 남짓. 내 계산이 맞다면, 이 속도면 충분히 다리가 붕괴하기 전에 건널 수 있었다.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죠?]
물론 어디까지나, 변수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시나리오 난이도가 조정되었습니다.]
[시나리오 난이도 : E -> D]
아차, 하는 순간 허공에서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도망가면 재미없잖아요? 분위기를 좀 연출해 보자구요!]
[죽은 자의 사념이 돌아옵니다.]
[주변의 대지가 검은 에테르로 차오릅니다.]
[마인(魔人)들이 깨어났습니다!]
그워어어,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뒤쪽에서 뭔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유상아가 사색이 되어 중얼거렸다.
“좀비?”
좀비를 닮은 시체들이 엄청난 인파를 이루며 몰려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우리와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도 보였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빨리!”
어룡과의 거리는 이제 백 미터도 남지 않았다. 다행히 이현성은 이길영을 업고 안전선을 돌파했다. 문제는 나를 비롯한 나머지 셋이었다. 한명오가 비명을 질렀다.
“이 자식들!”
쫓아오는 마인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지하철 안에서 죽은 사람들만 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워어어!”
다리 위에서 죽은 운전수들까지 마인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
이현성이 돌파한 길은 순식간에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마인들로 뒤덮였다. 나는 길을 막은 마인들과, 다가오는 어룡을 번갈아 보았다.
“······다들 엎드려요.”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앙!
다리의 지축이 크게 흔들리며, 거대한 어룡의 입이 동호대교 전체를 흔들고 지나갔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언뜻 어룡의 비늘이 빛나는가 싶더니, 한강물이 허공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곳곳에서 피비린내와 물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위가 걷히자 주변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잘려나간 철골들과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어룡이 깨끗하게 먹어 치운 마인들의 사체가 육편이 되어 너부러져 있었다.
다리가 끊겼다.
“···독···씨! ······찮아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유상아가 한명오를 부축한 채 서 있었다.
종전의 지진으로 한쪽 다리를 다친 것인지, 한명오는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끊어진 다리의 건너편에서 이현성과 이길영이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안전지대를 넘어간 그들의 목소리는 결계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어떡한다.
다리가 끊어지는 경우를 가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명오와 유상아가 함께 있는 경우는 상정해 본 적이 없었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누군가가 성좌의 가호를 받았습니다.]
[성좌의 가호로 시나리오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발동합니다.]
목소리와 함께, 끊어진 동호대교의 사이로 찬란한 빛의 다리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떠오른 메시지 창.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짝수 다리]
설명 : 성좌의 가호로 만들어진 빛의 다리.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홀수의 인원이 다리를 건너려 할 시, 다리는 즉시 소멸한다.
+
“독자 씨. 이거, 제 머릿속에서, 그러니까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유상아와 눈이 마주쳤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성좌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있는 권능.
“······유상아 씨의 후원자군요.”
어떤 성좌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유상아를 자신의 화신으로 선택했고, 그녀가 살기를 원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출현은 ‘멸살법’ 전체로 살펴봐도 드문 현상이었다.
그리고 유상아는 본래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다. 순간 의문이 들었다. 유상아는 대체 어떤 성좌를 배후성으로 삼은 거지?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내 스킬로 볼 수 없는 인물이라고? 대체 왜? 특별한 배후성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신 방벽을 가지고 있나? 하지만 초반부터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아니, 잠깐만. 설마 이거.
“독자 씨, 이제 어떡해요?”
당황한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쿠구구구.
한강물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다리를 통째로 먹어 치운 어룡이 한강의 반대편에서 거대한 몸을 선회하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로 다리의 설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오직 ‘짝수’의 인원만이 다리를 건널 수 있다.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비극을 좋아하는 빌어먹을 성좌들이 만든 장난감인 것이다.
모두가 살아날 방법은 없다.
눈이 마주친 한명오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