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8화 [배후 선택이 종료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을 떠도는 메시지들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 이제 시작이구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선택에 크게 진노하였습니다.] [흑운(黑雲) 소속 성좌들이 ‘심연의 흑염룡’의 노여움에 동요합니다. 당신은 당분간 ‘흑운’ 소속 성좌들의 후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예상한 메시지였기에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자기가 거절 좀 당했다고 패거리들까지 죄다 등 돌리게 만드는 성정이라니······. 원작에서 김남운의 배후성이 이 녀석이었지. 역시 그 성좌에 그 화신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녀는 앞으로 당신의 정의를 집요하게 감시할 것입니다.] 대천사 우리엘의 경우는 실망 선에서 그쳤다. 애초에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은 엄청난 불의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누군가를 미워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선택에 흥미로워 합니다.]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경우는 아예 예상 밖이었다. 관형사로 추측한 성좌의 특성상, 아마 내 신중함을 높이 산 게 아닐까 싶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선택에 재미있어 합니다.] 그리고 제천대성······. 마음이 착잡해진다. 과연 제대로 된 선택이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엄청난 기회를 눈앞에서 떠나보낸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은 배후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좌를 고른다는 것은 곧 그만큼의 가능성을 제약받는 것이기도 했다. 배후성과의 계약은 결코 공평한 형태의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을 거다. 하지만, 네놈들의 노리개가 되면서까지 살아남지는 않겠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지금 당장 배후성을 택하지 않아도 강해질 방법은 있었다. 어쩌면 최강의 배후성을 가진 화신들보다도 더 강해질 방법이. [하하, 이것 참······ 흥미로운 선택을 한 분이 계시네요? 뭐, 그래요. 기회는 또 있으니까요.] 초승달처럼 휘어진 도깨비의 눈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자자, 그럼 다들 선택도 끝나셨을 테고, 여기서 잠시 쉬고들 계세요. 저는 이만 다음 시나리오 준비하러 가봐야 해서. 10분 뒤에 뵙죠!] <배후 선택>이 끝난 후, 도깨비는 그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말이야 쉬라고 했지만, 이 10분은 정말 중요한 10분이었다. 10분 안에,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나는 머릿속으로 내가 가진 능력들을 떠올려 보았다. [등장인물 일람], 그리고 [전지적 독자 시점]. 아직 정확한 쓰임새는 알 수 없지만 대강 어떤 스킬들인지는 감이 온다. 이거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다들 모여주세요.” 내 말에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던 생존자들이 쭈뼛쭈뼛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이현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이현성입니다.” “김독자입니다.” “반갑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일지는 모르겠지만 반갑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군인이고······, 이젠 군인이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지만요.” “자대랑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죠?” “······예.”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상당했다. 과연 ‘멸살법’의 초반 탱커 답달까. 이현성은 반드시 데리고 가야 한다. 비록 지금은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이현성은 멸살법의 후반부로 갈수록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 그리고 독자 씨.” “예?”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독자 씨가 아니었다면 저흰 모두 죽었을 겁니다.” “아뇨, 그건.” “혹은, 살았어도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끄럽습니다.” 허리까지 깍듯이 숙이는 이현성.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사실 이현성은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았어도 살아남았을 테니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은 것은 그때였다. “하하, 우리 계약직이 큰 건 하나 했네. 독자 씨, 내 이름은 알지?”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어깨에 붙은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압니다, 한명오 씨.” “어허, 한명오 씨라니? 부장님이라고 해야지?” 이 상황에서도 직급을 내세우다니, 정말이지 한명오다웠다. “여긴 회사가 아닙니다만.” “하, 이것 보게. 이제 출근 안 하려고? 그런 버르장머린 어디서 배웠어?” 으르렁대는 한명오의 모습에, 새삼스레 나는 내가 알던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재차 깨달았다. 눈앞의 이 남자는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이 세계의 ‘포식자’였던 존재였다. 그리고 나는 그 포식자 앞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분명 그랬었다. “그리고, 아깐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어. 응? 벌레 같은 게 있었으면 나한테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그렇게 함부로 내던지면 어떡해?” “······.” “김독자 씨, 나한테 잘 해야지? 이제 계약 얼마 안 남았지? 응? 지금이 말야, 독자 씨한텐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갑자기 우스워진다. 내가 살아온 세계는 이렇게나 연약한 것이었구나. “한명오 씨.” “엉?” “그만 닥치세요.” “뭐, 뭐?” “아직도 상황 파악 안 됩니까? 아까 그 애새끼한테 맞았어야 정신 차릴 겁니까? 미노 소프트? 이 사달이 났는데, 아직 그런 회사가 남아 있겠습니까?” 얼굴이 희게 질린 한명오가 입을 뻐끔거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기왕 말을 꺼낸 거,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한명오 씨만 문제가 아닙니다. 모두 정신 차리세요. 도깨비 말대로 이건 장난이 아니니까.” “······.” “다들 말은 안 해도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눈치챘을 거라 믿습니다. 특성창에 전용 스킬. 게임 같은 인터페이스. 혹시 아직도 감 못 잡으신 분 있으십니까?” 역시, 아무도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은 인터넷과 전자기기 보급률이 높으니 RPG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많지 않다. 게임을 안 해본 경우라면, 하다못해 판타지 소설이나 웹툰이라도 읽었을 것이다. 이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당직서며 몰래 읽던 소설에나 나오던 일인데, 아직도 실감이 안 나네요. 역시 꿈은 아니겠죠?” “당연히 현실입니다.” 내 의연한 대답에 이현성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희미한 신뢰감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서 좋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독자 씨는 뭔가 의견이 있으십니까?”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나, 나가다니. 지금 제정신이야?” “독자 씨, 저도 그건 좀······.” 이번에는 유상아까지 거들었다. 아직도 다들 정신 못 차렸군. “그럼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사실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지금 내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는 데가 있었다. 밖은 괴수들의 천국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다들 부모님 생각은 안 하십니까? 이 사달이 났는데 부모님들은 무사하실까요?” “아, 안 그래도 아까부터 전화가 계속 먹통이에요. 카톡도 안 되고······.” 역시 ‘부모님’이란 말에는 마법이 있는 모양이다. 유상아는 물론이고, 이현성과 한명오마저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면. 이길영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어깨를 묵묵히 감싸주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유상아였다. “나가요. 나가야겠어요.” “아, 안 돼! 아까 그 새끼 말 못 들었어? 여기서 쉬라잖아! 함부로 움직이면 대가리 깨진다고!” “다수결로 하죠.” 유상아가 먼저 손을 들었고, 나와 이길영이 이어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저도 자대로 가보긴 해야 합니다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함부로 움직이는 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아까 경고도 들었고요.” “니들끼리 나가! 난 안 나가! 안 나간다고!” 한명오야 어차피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니까 상관없었지만, 문제는 이현성이었다. 이현성은 어떻게든 데리고 가야 하는데······. 쿠웅, 하는 진동과 함께 두꺼운 철판이 우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3707칸으로 통하는 철문이 조금씩 찌그러지고 있었다. “뭐, 뭐야?” 한명오의 고함에도 아랑곳않고, 철문은 재차 굉음을 냈다. 쿠웅! 누군가가 철문 너머에서 문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설마 다음 시나리오인가? 아니야. 아직 도깨비가 돌아오지 않았잖아. 그렇다면······.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오소소 솜털이 일어서며, 짧은 전율이 전신을 스쳤다. 놈이다. “뭐, 뭐해! 다들 막아!” 한명오가 고함을 지르며 문 쪽에서 멀어졌다. 철문 쪽으로 다가가려는 이현성을 제지한 것은 나였다. “가 봤자 못 막습니다.” “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나는 무거운 눈으로 철문을 노려보며 말했다. “예? 하지만.” “지금 나가지 않으면―” 3707칸의 유일한 생존자. 철문의 너머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너무 빤한 일이었다. “다음 시나리오가 도착하기도 전에, 우린 모두 죽게 될 겁니다.” 그래, 드디어 놈이 오는구나.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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