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86화
이뮨타르 종족의 왕자, 리카온은 내게 꾸벅 경의를 표하더니, 금방 등을 돌리고 앤티누스를 바라보았다.
역시 인외종이 아군이 되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앤티누스.”
“리카온······.”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패러사이트의 여왕이 웃었다.
“임무를 잊은 것인가? 왜 이 세계의 인간들과 싸우고 있는 거지?”
“킷킷, 임무? 우리에게 그런 게 있었나?”
놀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리카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는 ‘길잡이’. 찾아오는 재앙에 맞서 다른 세계의 주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존재다.”
“벌써 도깨비 놈들에게 홀린 모양이군. 정신 차려라, 리카온.”
“정신 차려야 할 것은 너다, 앤티누스!”
리카온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고 있었다.
“클로노스 전사들의 희생을 잊었는가? 다섯 지배종이 멸절당하던 그 순간을 그대는 벌써 잊었단 말이냐? 우리는 여기서 재앙을 막아야 한다. 이곳의 생명체들과 협력해서 테라포밍된 행성을 지키고, 이 세계에서 클로노스의 문명을 재건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신성한 사명이다!”
클로노스 문명의 재건.
앤티누스는 더 이상 킷킷 웃지 않았다.
“리카온, 그건 불가능하다. 이 행성은 멸망하게 될 테니까. 그것이 ‘시나리오’의 운명이다.”
“아니, 이번엔 다르다.”
리카온의 눈이 나를 흘끗 보았다.
“나의 호주는 재앙이 시작되기도 전에 소재앙을 처치한 분이시다. 그 증거로 우리 종족의 호부도 갖고 계시지. 어쩌면 멸망을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깟 소재앙 따위, 열화판이었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어.”
“지구는 이제 고작 다섯 번째 시나리오다! 다섯 번째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재앙을 처치한 행성은 없었다. 잘 생각해라 앤티누스! 이 행성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앤티누스의 겹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가래가 끓는 듯한 곤충의 울음.
그녀의 울음에 진득한 원한이 배어 있었다.
“위선 떨지 마라. 재앙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네놈이 정말 이들을 도울 생각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재앙의 행선지가 ‘지구’로 정해질 때 반대하지 않았지?”
“그건······.”
둘의 이야기를 엿듣던 한수영이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녀석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한수영도 이 시나리오에 디테일한 과거사는 모르는 듯했다. 3회차나 4회차의 ‘길잡이’들은 지금처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뭔가를 설명해주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앤티누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리카온! 네놈도 나와 같다. 우리는 복수를 위해 이 행성에 온 거다! 우리에게 재앙을 안겨다 준 놈들에게, 똑같은 재앙으로 보답하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하면 너도 죽게 된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길잡이’의 독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앤티누스가 웃었다.
“리카온, 진짜 나는 클로노스의 내 종족들과 함께 죽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송곳니를 드러낸 리카온이 살기를 뿜어냈다.
“앤티누스. 너와의 연은 여기 까지다.”
“킷킷킷! 리카온! 이뮨타르의 가엾은 늑대여! 클로노스의 역사를 잊었는가? 늑대는 단 한 번도 벌레들에게 승리한 적이 없음을!”
늑대의 왕자와, 기생충의 여왕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크르르르릉!
리카온이 포효했다.
주변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었다.
어떤 바람은 빠르게, 다시 어떤 바람은 느리게.
그리고 어떤 바람은, 강하게.
“나는 네가 알던 ‘이뮨타르’가 아니다!”
쿠구구구구!
주변의 바람들이 일제히 산란하며 앤티누스의 기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 단계 진화한 리카온의 [바람의 길]이 드디어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키잇······ 재미있구나! 네놈의 ‘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내가 확인해 보겠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앤티누스였다.
콰콰콰콰!
[바람의 길]이 만든 대기 장벽과 앤티누스의 꼬리가 부딪쳤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도 한수영도 그 순간만큼은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5급 인외종들의 싸움.
물리적인 우열이나 종의 상성을 뛰어넘는 이계인들의 대결이었다.
대기의 빈틈을 뚫고 순식간에 도약한 앤티누스의 신형이 순식간에 리카온의 코앞에 도착했다.
쐐애액!
외변형을 이룬 앤티누스의 꼬리가 거대한 쐐기가 되어 리카온을 향해 쇄도했다. 단 한 번의 공격이었지만, 자칫 그 한 번에 승부가 날 짝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앤티누스의 움직임이 갑자기 느려졌다.
마치 그녀의 꼬리를 밀어내는 척력이라도 존재하는 것처럼.
키잇?
반면, 리카온의 움직임은 미묘하게 빨라졌다.
일순의 가속이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앤티누스의 꼬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가속하는 날개 Lv.8’를 발동하였습니다.]
앤티누스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더니, 파르르 진동하던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S급 이동 스킬, [가속하는 날개].
일초에 수백 수천 번을 날갯짓한 그녀의 신형이,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리카온의 사방을 덮었다. 피할 새도 없이, 낫처럼 변한 앤티누스의 두 팔이 리카온의 배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당랑파철(螳螂破轍) Lv.8’를 발동하였습니다.]
가속화된 그녀의 낫이 대기의 벽을 난도질하자, 끔찍한 파열음이 터졌다. 너무나 빠른 일격이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리카온조차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리카온은 피했다.
결정적인 순간, 또다시 앤티누스의 공격은 느려지고 리카온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찰나의 차이로 스쳐가는 공격들. 앤티누스가 겹눈을 부라렸다.
유상아가 놀라서 물었다.
“저게 대체 무슨 기술이죠? [순간 가속]인가요?”
“아뇨, 저건 [바람의 길]입니다.”
이뮨타르 종족의 비기, [바람의 길].
얼핏 보면 두 사람의 속도가 변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저것은 리카온의 능력이었다. 주변의 모든 대기가 리카온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킷, 빌어먹을 바람이······!”
앤티누스도 눈치챈 듯했다. 그녀가 움직이는 모든 길에 바람이 있었다. 앤티누스는 바람에 걸렸고, 리카온은 바람을 이용했다.
앤티누스의 [당랑파철]을 피해내고, [가속하는 날개]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스킬. 바람이 만든 길은 경우에 따라 보법이 되기도 했고, 경신법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 회피기나 공격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저 스킬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래서였다.
[바람의 길]만 익힌다면, 당분간 나는 필요한 스킬들을 저 스킬 하나로 대체할 수 있었다. 리카온이 포효했다.
“벌레의 여왕! 바람 앞에 무릎을 꿇어라!”
바람의 늑대가 움직였다. 바람의 결을 타고 날아든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의 날개를 찢었고, 질풍처럼 쏘아진 킥이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바람의 가속이 더해진 그의 연타는, 단단한 앤티누스의 갑피를 부숴갔다.
“갸아아아악······!”
날개의 반쪽이 사라진 앤티누스가 추락했다.
아마 내가 준 깨달음이 없었더라면, 리카온은 지금 앤티누스를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남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도움이 된 셈이다.
치직, 치지지직―!
앤티누스의 육신에 개연성 폭풍의 징조가 한층 더 강해졌다.
“키이잇! 이대로 끝나지는 않는다.”
앤티누스가 반쪽짜리 날개를 펼쳐 낙하를 시도했다.
―김독자! 녀석을 죽여라! 빨리!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전에 나는 이미 앤티누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치지지지직!
자칫 개연성 폭풍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세계, 내 종족, 내 아이들!”
그녀는 정확히 [재앙 운석]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 세계를 멸망시킨 대가를, 나는 반드시 받아낼 것이다!”
그녀가 가진 모든 마력이 [재앙 운석]을 향해 쏘아졌다.
대경한 리카온이 마력을 받아내기 위해 달렸고, 나는 불꽃 속성이 감긴 ‘신념의 칼날’을 휘둘러 떨어지는 앤티누스의 목을 날렸다.
비웃음이 걸린 곤충의 주둥이.
막았나?
고개를 돌렸을 때, 리카온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르릉······ 호주, 죄송합······.”
그리고 소리가 사라졌다.
[재앙 운석]에서 빛이 폭발했고, 엄청난 폭발이 나를 덮쳤다. 터져 나온 운석의 파편 중 하나가 머리를 세게 때렸다. 뇌진탕이 온 것처럼 세상이 흔들렸다. 폭발에 휩싸인 리카온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길잡이’들은 본디 재앙의 힘을 견딜 수 없다.
한 번 패배한 역사를 고쳐 쓸 수 없는 것처럼.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당신은 시나리오 클리어에 실패했습니다.]
[‘질문의 재앙’이 당신의 세계에 강림합니다.]
일순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고, 폭음과 함께 내 몸이 부서진 건물 더미 속에 파묻혔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중혁의 목소리만 왕왕 울리고 있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라! 어서!
―······정신 차리고 있어.
―움직여라! 지금이라면 아직 재앙을 막을 수도 있다!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했다.
[바람의 길]도 없는 상황에서 [질문의 재앙]이 부화해버렸다.
저걸 막겠다고 자살 특공을 감행하느니, 차라리 다른 루트를 고려해 보는 게 더 바람직한 판단이었다.
그런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네놈, 그렇게 약해 빠진 놈이었나?
―뭐?
―내게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었냐는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 자식이 지금······.
―내게 세계를 포기하지 말라고 훈계했던 놈이, 고작 그 정도 재앙에 굴복한 것이냐?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유중혁 저 자식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수치심에 자살해도 모자랄 일이다.
―당연히 아니지 인마. 잠깐 생각 좀 한 거야.
빌어먹게도 유중혁의 말이 맞다.
완독자인 내가 벌써 ‘불가능’을 논하다니, 아직 한참은 시기상조다.
나는 파괴된 구조물 더미를 헤치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쿠구구구구.
8미터에 달하는 [재앙 운석]이 두 쪽이 나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그 안에서 부화했을 것이다.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재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야, 이거 대체······.”
근처에 있던 한수영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유상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십여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한 소년이 있었다.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싶은 외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소년은 중얼거렸다.
“여기는······ 설마?”
연신 주변을 둘러본 소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얼거림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이른 부화로 ‘질문의 재앙’의 힘이 약화됩니다.]
[조기 부화 패널티로 당신들은 약 3분간 ‘질문의 재앙’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패널티를 저놈이 아니라 우리가 먹었다고?
도깨비 새끼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성큼성큼 걸어간 소년은 주변에 너부러져 있던 한 여자를 향해 다가갔다.
독희의 그룹원이었던 여자.
꾀죄죄한 여자를 향해, 소년이 해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여자다! 이봐요, 괜찮아요?”
“어, 으으······ 누구······.”
“저기, 내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안 된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안 된다.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기 어디에요? 그리고 지금이 서기 몇 년이죠?”
“가, 갑자기 그건 왜······.”
“지금 나한테 되묻는 거예요?”
소년의 기이한 말투에 여자는 홀린 듯 말하기 시작했다.
“여, 여긴 서울이고······ 지금, 올해는······.”
여자의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첫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첫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하, 하하······. 하하하!”
“왜, 왜 그러시는······?”
당황한 여자를 향해, 소년이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모르죠?”
“네, 네?”
“100년 안 살아 봤죠? 인간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그런 곳에서······. 혹시 여기 말고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건 알아요?”
“다른······ 차원이요?”
“역겨운 벌레 새끼들이랑, 웨어 울프들이랑, 조인족 새끼들······. 내가 문제 하나 낼 테니까 맞춰볼래요?”
당황한 여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소년이 물었다.
“벌레, 늑대, 새. 셋 중에 어떤 종족이 제일 잘 하게요?”
“뭐······ 뭘 잘해요?”
여자가 묻자, 소년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웃어젖혔다.
소름끼치는 웃음이었다.
“그럼······ 셋 중에 무슨 고기가 제일 맛있게요?”
[질문의 재앙]이 쏟아내는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앤티누스가 지구를 멸망시키고 싶었던 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세계를 멸망시킨 것이, 바로 이 지구의 ‘인간’이었으니까.
여자는 끝내 소년의 문제에 답을 내지 못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퍼거걱,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이 날아갔다. 킬킬 웃음을 터뜨린 소년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이제부턴 당연히 그런 전개겠지? 그 뭐냐, S급 화신? 그런 새끼들 좀 조져주고. 갑질하는 연합도 조져주고. 아니 잠깐만, 그 전에······.”
[조기 부화 패널티가 종료됩니다.]
[당신의 움직임을 통제하던 힘이 사라집니다.]
제기랄. 늦었다.
내가 소리치려는 순간, 슥― 하고 사라진 소년이 어느새 저만치 떨어진 위치로 옮겨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새로운 여자가 있는 장소였다.
“하하! 누나 예쁘다! 응?”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유상아 씨, 피해요!
단도를 꺼내든 유상아가 녀석을 경계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 질문에, 소년이 씩 웃었다.
“궁금해?”
가볍게 뻗어진 소년의 손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유상아의 턱을 잡아챘다.
“알려줄까?”
클로노스를 멸망시킨 다섯 개의 재앙 중 하나, [질문의 재앙].
그는 이세계로 전이되었다 돌아온 지구 출신의 ‘귀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