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87화
귀환자.
멸살법에서 그들을 언급한 최초의 문장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되돌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차원으로 가며, 어떤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 결국, 멸망에 적응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가지각색인 셈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 중 두 번째.
살아남기 위해, 다른 차원을 부수고 돌아온 존재들.
“대답해봐. 내 정체가 궁금해?”
귀환자 명일상.
지구 출신의 ‘귀환자’들 중 하나이자, 이계 ‘클로노스’에 용사 클래스로 소환되었던 소년.
“흠······ 보통 이런 상황이면 얼굴 붉히면서 눈을 내리까는 게 보통의 전개 아냐? 누난 얼굴값 좀 하는 편인가 봐?”
역시 [질문의 재앙]은 저 버러지 같은 새끼였다.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유상아 씨, 질문에 대답해선 안 됩니다!
내 말에 유상아의 고개가 내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손아귀에 잡힌 그녀의 턱이, 다시 강제로 명일상 쪽으로 돌려졌다.
“어딜 봐? 날 봐야지. 혹시 저거 남친이야?”
“손 치워.”
유상아가 명일상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움직인 단도가 위협적으로 허공을 그었다. 명일상이 히죽 웃었다.
[두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두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남친 맞네. 누군 100년 동안 개지랄을 떨고 있었는데.”
소년의 차가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하지 않았지만,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너무나 의미가 명료한 눈빛이었다.
“누군 평화로운 세계에서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이거지?”
녀석의 오른팔이 나를 겨냥했다. 녀석의 손에 보랏빛 입자가 응축된 것과, 내가 얼굴을 감싸며 엎드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소흑염포(小黑炎砲)’를 발동합니다!]
흑염포(黑炎砲). 클로노스의 동쪽 대륙을 멸하고, 숲속의 충왕종들을 모조리 태워 죽인 죽음의 불꽃.
대기가 통째로 타오르며 나를 덮쳐왔고, 나는 숨을 꾹 참은 채로 불꽃에 휩싸였다. 피부가 익는 듯한 통증이 번져왔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아프다. 정말로 아프다. 아픈데······.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잠시 후, 나는 불꽃이 꺼진 피부를 바라보았다. 구석구석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약간의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견딜만한 고통이었다.
이게 충왕종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흑염포’라고?
아무리 ‘소흑염포’라지만······ 별로 안 아프잖아?
고개를 들어보니 유상아가 단검을 휘두르며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예상외로, 그녀는 선전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숙련도를 갖춘 공격에 심지어 [질문의 재앙]은 당황한 눈치였다.
“······뭐야. 왜 이렇게 강해? 혹시 누나도 귀환자야? 아니지, 내가 약해진 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본래 두 개의 봉인이 풀린 [질문의 재앙]은 저것보다 훨씬 강해야 했으니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이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명일상
나이 : 17세 (127세)
배후성(背後星) : 양산형 제작자
전용 특성 : SSS급 용사 (영웅), 질문의 재앙 (전설)
전용 스킬 : [SSS급 성장 가속 Lv.10 (현재 Lv.1)], [SSS급 검술 Lv.10 (현재 Lv.1)], [흑염포 Lv.9 (현재 Lv.1)], [SSS급 보법 Lv.10 (현재 Lv.1)]······.
성흔 :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Lv.7 (현재 Lv.2)]
종합 능력치 : [체력 Lv.99 (현재 Lv.55)], [근력 Lv.99 (현재 Lv.55)], [민첩 Lv.99 (현재 Lv.60)], [마력 Lv.99 (현재 Lv.55)]
종합 평가 : 클로노스를 멸망시킨 ‘질문의 재앙’입니다. 현재 시나리오 패널티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봉인이 풀릴 때마다 능력치가 상승하며, 모든 봉인이 풀리면 재앙의 진짜 힘이 깨어납니다. 살아남고 싶다면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죽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
순간 화면을 가득 메우는 SSS의 향연에 주눅이 들었지만, 자세히 읽다 보니 왜 지금 녀석이 약한 것인지 이해가 갔다.
도깨비 녀석들은 공정했다.
지금 저 녀석은, 원작의 재앙보다 더 약한 상태다.
“한수영! 유상아 씨!”
비형 녀석이 힘을 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생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요! 지금 죽여야 됩니다!”
저게 지금의 녀석이 가진 전부라면, 어쩌면 [바람의 길]이 없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곧장 남은 코인을 능력치에 쏟아 부었다.
[체력 Lv.50 -> 체력 Lv.60]
[민첩 Lv.50 -> 민첩 Lv.60]
[마력 Lv.25 -> 마력 Lv.60]
[총 39500코인을 소모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도달하였습니다.]
기이이잉!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활성화하며 달렸다.
“명심하세요! 놈의 질문에 절대로 대답해선 안 됩니다!”
내 ‘신념의 칼날’을 본 명일상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뭐야! 검강이잖아?”
쐐애액!
하필 민첩만 높은 녀석이라, 공격은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고 말았다. 명일상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아저씨 혹시 무림인이야? 어떻게 벌써 검강을 써? 미친 거 아냐?”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성흔을 발동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1’를 발동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깃듭니다.]
충무공의 무작위 소절이 눈앞에서 흘러가더니, 이내 메시지가 들려왔다.
「28일. 맑다. 공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하필 이럴 때 충무공이 안 도와주는군.
「난중일기」라고 해서 항상 적들과 싸우는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저런 내용들이니까.
하늘은 맑고.
충무공은 공무를 본다.
만약 내가 살아가는 오늘도 「멸망일기」 따위의 기록으로 남게 된다면, 일기는 대략 이런 느낌일 것이다.
하늘은 어둡고.
김독자는 맞고 있다.
퍼어억!
명일상이 날린 킥에 나는 바닥을 굴렀다.
심각해졌던 명일상의 안색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 녀석이 내 ‘신념의 칼날’을 유심히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럼 그렇지. 진짜 검강일 리가 없지. 아저씨, 진짜 왜 그래? 나 괜히 쫄았잖아?”
“어린 새끼가 말 존나 많네.”
서늘한 여자의 목소리. 내가 시간을 버는 사이, 수십 개에 달하는 한수영의 아바타가 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죽어!”
움직임을 봉쇄당한 녀석의 전신에 한수영의 연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근력이 높지 않은 그녀의 공격은 명일상의 본체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과도하게 많은 아바타들 때문에 유상아가 데미지를 넣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수영의 작은 손에 두드려 맞던 명일상이 웃었다.
“너도 꽤 예쁘네? 몇 살이야? 중학생?”
“닥쳐, 죽어!”
이어지는 연타에 명일상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다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나처럼 잘 생긴 귀환자가 나타나면 보통 쌍수들고 환영부터 하는 거 아냐? 이제부터 내가 괴수들이랑 다 해치워 줄 건데?”
“뭔 개소리야 미친놈이!”
“어······ 말이 좀 심하다? 잠깐만, 혹시 이 전개 설마······.”
명일상의 표정이 변했다.
“당신들 ‘헌터 협회’구나! 그렇지? 원래 보통 그런 전개잖아? 귀환자가 나타나면 제일 먼저 시비터는 놈들이 그놈들이잖아?”
“뭐라는 거야 이 중2병 새끼가······ 그딴 거 있지도 않거든?”
[세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네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이 해결되었습니다.]
[귀환자 ‘명일상’의 다섯 번째 봉인이 해제됩니다.]
명일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협회 맞네.”
돌겠네 진짜.
녀석의 기세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명일상의 몸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기파에 주변의 아바타들이 동시에 소멸했다. 명일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 먼치킨의 시간이다!”
훌쩍 물러난 한수영이 황당하다는 듯 내 쪽을 일별했다.
“뭐야 저 자식?”
나는 숨을 몰아쉬며 짜증을 냈다.
“아까 대답하지 말란 말 못 들었어? 병신한테 먹이 주지 말라고.”
“난 대답 안 했어! 그냥 욕한 거라고.”
“그냥 말 자체를 하지 마.”
[질문의 재앙]에게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대답이든, 녀석의 능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명일상이 이죽거렸다.
“자, 그럼 누구부터 죽여줄까······?”
그러나 녀석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냉혹한 살기를 뿜어대는 유상아가 녀석의 배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헤르메스의 산책법]
[테세우스의 결의]
[아라크네의 거미줄]
시스템 메시지는 뜨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기술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훗날 열리는 시나리오 「라그나로크」에서, 저 기술들에 대한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저 기술들은, 올림푸스 계열 성좌들의 성흔들이다.
놀란 명일상이 ‘소흑염포’를 연달아 발포하며 유상아를 견제했다.
하지만 유상아는 그 흑염포를 죄다 맞아가며 명일상에게 돌진했다.
“이건 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한 시나리오 이벤트를 겪지 않는 한, 하나의 화신이 여러 성좌의 성흔들을 동시에 소유할 방법은 없다.
나 역시 겨우 두 개의 성흔만을 얻은 상황.
그런데 ‘멸살법’의 독자도 아닌 유상아가, 대체 어떻게 저 많은 성흔들을 가질 수 있었을까?
“살살하자고! 아프잖아?”
유상아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흘렀다.
쉴 새 없이 늘어났다 줄어드는 마력의 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발걸음. 틈새가 보일 때마다 망설임 없이 파고드는 단검. 그녀의 전신에서 생명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틀 사이의 일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변화······.
그 순간, 뭔가를 알 것도 같았다.
하나의 화신에 여러 성좌의 성흔.
분명 ‘멸살법’에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도 그런 경우니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유상아는······.
“독자 씨! 지금!”
유상아의 신호에, 나는 ‘신념의 칼날’을 발동해 그녀의 폭발적인 공격을 지원했다. 거기에 한수영이 끼어들었다. 조금씩 손발이 맞기 시작하자, 명일상의 손발도 어지러워졌다.
뒤로 밀리던 녀석의 움직임이 한순간 더디어졌고, 틈새를 노린 내 ‘신념의 칼날’이 녀석의 어깨와 배를 베었다.
“이런 씨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 명일상이 뒤로 몸을 빼 달아나더니, 입으로 뭔가를 외웠다.
[등장인물 ‘명일상’이 ‘블링크 Lv.1’를 사용하였습니다.]
명일상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마음이 급해진다. 녀석이 도망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대로 칼날을 돌려 녀석의 허리를 내리그었다.
하지만 칼날이 닿은 바로 직후, 녀석의 몸은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흩뿌려진 핏줄기뿐.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안타까운 탄식을 흘립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정된 고구마에 미쳐 날뜁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똑바로 좀 하라며 당신을 손가락질합니다.]
[일부 성좌들의 흥분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제길, 놓쳤어!”
“괜찮아. 타격은 입혔으니까 금방 잡을 수 있어.”
[일부 성좌들이 진정합니다.]
“그리고 유상아 씨. 정말 잘했······ 유상아 씨?”
유상아가 대답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다가갔더니, 그녀는 선 채로 기절해 있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걘 또 왜 그래?”
뒤늦게 깨닫는다. [테세우스의 결의]는 화신의 전력을 쥐어짜 평소 이상의 전투력을 끌어내는 스킬. 그런 스킬을 사용했으니 유상아가 잠시나마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몸을 추슬러 한수영에게 넘겼다.
“또 나한테 줘? 내가 탁아소냐?”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재앙이나 찾아내. 아바타 더 뿌렸어?”
“어디로 갔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안내해.”
거의 다 잡은 녀석을 여기서 놓칠 수는 없지.
달려가면서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기억이 잘 안나서 그러는데······ 저 새끼,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강해지는 거 맞지?”
“맞아. 처음에는 약한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강해져. 귀환자들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대부분 이 세계로 넘어올 때 패널티가 있어. 아까 봉인 풀리는 거 봤지?”
“보긴 했는데······ 봉인이 몇 개나 걸려 있는 거야?”
“아마 수십 개쯤. 그거 다 풀리면 답 없어.”
현재까지 풀린 봉인은 다섯 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도깨비 녀석들의 추가 시나리오가 내려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추가 시나리오가 내려왔다면 너도나도 저 자식을 잡으러 왔을 것이고, 놈의 질문에 대답한 수많은 멍청이들 때문에 재앙의 봉인은 순식간에 풀렸겠지.
······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던 그때.
[흐음. 여러분, 대단하신데요? 아무리 패널티가 걸려 있어도 ‘재앙’인데. 고작 셋이서 저 정도로 압박하다니······.]
나와 한수영이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말이죠, 욕심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닐까요? 자고로, 옛말에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으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시발.”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들려왔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 SSS급 사냥’이 시작됩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부서질 듯 세게 쥐었다.
참는 것도 이제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