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85화 「가장 위대한 선인(善人)은 언제든 최악의 학살자로 돌변할 수 있다.」 그것은 ‘멸살법’에서 ‘구암신의’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구암신의 허준(許浚). ‘멸살법’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의 허준이 몰두했던 과제는 사실 의술이 아니라 독술이었다. 훗날 성좌가 된 많은 위인들이 그랬듯, 당시의 허준은 실제 역사의 기록을 뛰어넘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독을 만들 수 있다면, 누구든 살릴 수 있는 환단(丸丹)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선조의 죽음 이후 유배되었던 허준은, 광해 7년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단 하나의 질문에 몰두했다. 왜 어떤 독은 누군가에게 약이 되고, 어떤 독은 독이 되는가? 그리고 말년의 어느 날, 그는 결국 신비주의적인 해답에 도달했다. 「“독의 작용을 결정하는 것은 신(身)이 아닌 영(靈)이다.”」 천 개의 영혼을 분석해 만든 독.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이설화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천령독(千靈毒)이었다. 그리고 [동의보감]은, 사실 그 천령독에 도달하기 위한 허준의 실패록이었다. “키잇, 키이잇!” 천령독을 쏟아내는 이설화를 향해, 나는 가차 없는 일격을 날렸다. 뻐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이설화. 독희 이설화는 독만 무력화할 수 있다면 제압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십악으로서 그녀의 명성을 공고히 한 것은 바로 저 천령독이었으니까. 만약 [동의보감]을 얻지 못했더라면, 나 역시 그녀가 쌓아갈 명성의 제물이 되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운이 나빴다. [성좌, ‘구암신의’가 미안한 듯 당신의 눈치를 살핍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에게 선처를 기대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패러사이트’의 감염은 구암신의의 의도와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즉, 저 이설화가 나를 공격하는 것 또한 이설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건 그렇고 겨우 300코인에 선처를 기대하다니······.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의 선처를 기대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선처를 기대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는 성좌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이설화를 향해 다가갔다. 이설화가 겁에 질려 바닥을 기었다. 멀리서, 이곳을 보는 유중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여기서 이설화가 죽으면, 유중혁은 큰 상처를 받겠지. 나는 쓰러진 이설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정확히는, 그녀의 안에 기생한 앤티누스를 향해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밖으로 나와.” “킷?”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다시 ‘길잡이’의 본분으로 돌아가라고. 사람들한테 스킬도 가르쳐 주고 그러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잖아.” “······.” “열심히 살다 보면, 너도 언젠가 ‘성좌’가 될지 어떻게 알아?”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는 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영웅이었다. 비록 지금은 개연성의 제약을 받고 있어서 본신의 힘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지만, ‘길잡이’를 지속하며 역사를 쌓는다면 훗날 성좌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닌 존재. “너희 인간들을······ 증오한다······.” 문제는, 그 강력한 존재가 인간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불구대천의 원수로. 나는 간헐적인 진동을 반복하는 [재앙 운석]을 흘끗 바라보았다. “네 세계가 멸망한 건 유감스럽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세계까지 멸망시킬 필요는 없잖아? 똑같은 비극을 여기서도 재현시킬 셈이냐?” “······너희는 모두, 죽을 것이다.” 킷킷 웃는 앤티누스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제 별수 없다. 강제로 나가게 하는 수밖에. 사실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이설화의 고통도 클뿐더러, 이설화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앤티누스를 직접 상대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으니까. 나는 하늘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한반도의 성좌들. 지난번에 한 번 빚을 졌으니, 이번에는 내가 양보해야 할 차례겠지.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특수 옵션을 발동합니다.] [‘동의보감 ― 침구편’이 당신에게 신비한 한의학의 정수를 전합니다.] 내가 가진 [동의보감]은 미완성본이기 때문에 강력한 독을 만들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거나 하는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간단한 치료는 할 수 있다. 가령, 사람 몸에 기생한 벌레 새끼를 꺼낸다거나. 원활한 치료를 위해서는 그녀의 몸이 구속되어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설화의 팔을 꺾어 뒤에서 제압했다. 누가 보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한 자세였지만,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그녀에겐 일말의 흑심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내가 미친놈이 아닌 이상 유중혁의 전 여친을 노릴 리가 없다. 그것도 유중혁이 보는 앞에서. [전용 스킬, ‘점혈 Lv.2’을 발동합니다!] 팟. 팟. 팟. 나는 그대로 이설화의 혈도 곳곳을 누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피부 곳곳이 붉게 물들었고, 나는 반응이 생긴 혈도 위에 마력으로 만든 바늘을 하나씩 심었다. 처음 해 보는 건데, 잘 될지 모르겠네 이거. “키이잇! 아파! 아파아아아아!”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는 이설화의 목소리. 나는 계속해서 혈도를 짚어갔다. “키이잇! 키잇! 꺄아아아아······!” 그러자 이설화의 비명도 조금씩 변해갔다. 벌레의 울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겨우 침 몇 방 놨다고 몸 안의 기생충이 빠져나오다니, 역시 한의학이란 신비로운 것이다. 그동안 서구 사대주의를 실천하며 서양의학만을 신봉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신비한 한의학의 정수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을 흐뭇한 듯 내려다봅니다.] 나는 기진맥진해 숨을 헐떡이는 이설화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카만 독이 분비되던 그녀의 전신에서, 노란색 점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점액이 바로 충왕종 ‘패러사이트’의 본체였다. “끅······ 끄윽······.” 이 정도면 성좌들도 만족했겠지. [성좌, ‘구암신의’가 당신의 선행에 고마워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설화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눈동자에 생기는 돌아왔지만, 여전히 초점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패러사이트에 감염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오감이 반쯤 이지러진 그녀는, 지금 내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누구죠?” 저 질문에 대답하면 일어날 이벤트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이설화를 무사히 포섭했던 몇몇 회차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가 아니다. “유중혁이 보내서 왔습니다.” ―김독자.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분노한 유중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이설화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유중혁? 그게 누구죠?” “곧 알게 될 겁니다.” 독희 이설화는 반드시 여기서 유중혁의 일행이 되어야 했다.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또 ‘절대 왕좌’가 부서진 후 이 세계의 흐름은 내가 아는 궤적에서 조금씩 틀어지는 중이었다. 원작의 실수를 계승하는 것도 곤란했지만, 내가 모르는 미래들이 계속해서 출현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그러니 중요한 사건의 포인트들마다 직접 균형을 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어떤 것은 그대로 흘러가고, 또 어떤 것은 다르게 흘러가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어쨌든 유중혁의 이번 ‘회차’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근사치에 조금씩 접근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독희······ 아니, 의선(醫仙) 이설화는 그 근사치의 훌륭한 소수점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 이쪽은 끝났어!” 돌아보니, 피를 뒤집어쓴 한수영과 유상아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놀라웠다. 둘이서 그 많은 인원을 소탕했다고? 아무리 독희가 빠진 상황이라고 해도, ‘독희 그룹’의 메인 전력을 단둘이서 쓸어버리다니······. 본래 짰던 작전이 무의미해질 지경이었다. 저런 앙상블이라면 이지혜의 [유령 함대]와 공필두의 [무장 지대] 콤비에도 견줄만할지도 모른다. “잠깐,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하지만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감염 면역이 없는 그들이 지금 가까이 오면 곤란하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키이이잇······ 인간······! 이설화의 몸에서 빠져나온 점액들이 허공의 한 점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그녀는 기생 중일 때도 무섭지만, 기생 중이 아닐 때는 더 무섭다. 점액질들이 조그마한 날벌레처럼 움직여 형상을 빚어갔다. 오랜 세월 빨아들인 영양분으로 이루어진 신체. 아름다운 곡선을 갖춘 몸통과, 탄탄한 근육을 자랑하는 다리. 잠자리 같은 날개와 전갈의 그것을 닮은 꼬리. 얼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곤충의 갑피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곤충이라기보다는 이족 보행 생물에 가까운 형태였다. 진짜 전투는 지금부터다. “떨어져요! 감염되기 전에!” 쐐애액! 날카로운 꼬리가 내 배를 찔러왔다. [아이템,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당신의 신체가 패러사이트 감염으로부터 면역을 가집니다.] 민첩이 50을 넘는 내가 피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였다. 아슬아슬하게 꼬리의 끝을 잡아챘기에 배가 뚫리는 것은 면했지만,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배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킷. 그녀는 내가 자신의 꼬리를 쥐었다는 것을 이용해 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날아간 육신이 바닥에 푹 고꾸라졌고, 강한 통증이 전신을 잠식했다. 강하다. 기생의 형태를 벗어났는데도 더 강해졌다. 이것이 본신의 힘만으로 5급 충왕종에 비견되는 힘. 앤티누스가 전력으로 힘을 개방하면, 내가 전에 잡았던 열화판 화룡종에 준하는 전투력을 발휘할 것이다. 멸망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한 세계의 영웅이었던 존재. 이 녀석은 [노란색 운석]에서 나왔던 리카온 못지않은 강자인 것이다. 그러나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길잡이’가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도 전에 이런 난동을 피우는 것은 명백한 시나리오 규칙 위반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사람 몇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재앙을 조기 부화시키려 했고,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개연성’을 포기했다는 것을 뜻했다. 치직, 치지지직― 벌써 개연성 폭풍의 징조가 앤티누스의 육신에 강림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내가 공격하지 않아도 그녀의 육체는 붕괴를 가속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시간만 벌어도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키이이잇! 문제는 시간을 버는 동안 얼마나 굴러댈까 하는 것인데······. 품속에 들어있던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가 가늘게 떨린 것은 그때였다. 우우우웅. 아, 그렇군. 이게 있었지. 나는 쿡쿡 쑤셔오는 뼈마디를 맞추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 상대는 내가 아냐.” 쿠구구구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빛 섬광이 소닉붐을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왔다. 화려한 갈기가 허공에서 흩날렸고, 신형은 굉음을 일으키며 내 앞에 착지했다. 삼 미터가 넘는 체고.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형형한 패기를 흩뿌리며 일어섰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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