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84화
[재앙 운석]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총 세 가지다.
하나는 시나리오에 맞춰 운석이 부화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고, 둘은 [재앙 운석]의 힘을 미리 끌어다 쓰는 것이다. 그리고 셋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재앙 운석]에 인위적으로 마력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설화의 주변에는 십수 명의 그룹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희미한 마력이 고스란히 [재앙 운석]을 향해 이어지는 것이 보였다.
부화(孵化)의 의식.
이들은 세 번째 방법을 택한 것이다.
벌써부터 힘차게 들썩이는 운석을 보아하니, 이대로 30분만 더 지났으면 재앙은 그대로 부화했을 것이다.
나는 이설화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만두지? 다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
“대체 뭘 생각하는 거냐?”
이상한 일이었다.
원작의 3회차에서, 재앙 이전의 이설화는 [재앙 운석]의 힘을 빌리기는 해도 재앙을 미리 깨울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유중혁도 그걸 알기에 이설화를 미리 찾아왔던 것일 터.
“[재앙 운석]의 부화를 멈춰. 그럼 너희는 살려줄게.”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이설화가 말했다.
“싫다면?”
“넌 여기서 죽겠지.”
독희 이설화의 표정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녀의 손이 움직이자, 재앙을 향해 기도하던 인간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돌아섰다.
[8급 인외종, ‘충인(蟲人) 남민혁’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8급 인외종, ‘충인 정민지’가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8급 인외종, ‘충인 김갑일’이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머리 위로 더듬이가 자라고, 손이 갈퀴처럼 변한 충인들.
이쪽 방랑자들은 웨어 울프가 아닌 충인으로 인외화(人外化)가 진행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이상하네. 인외화는 [재앙 운석]의 권능이 아닐 텐데?”
내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이설화가 외쳤다.
“죽여!”
달려드는 충인들이 제각기 날개와 다리를 뻗으며 허공으로 도약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그대로 칼자루를 뽑았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불꽃’으로 변환됩니다.]
허공을 가르는 빛살에 새하얀 불길이 깃들었다.
벌레 속성을 가진 모든 인외종들은 ‘불’에 약하다.
화르르륵!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 휘감긴 에테르의 불꽃이 충인들의 피부에 옮겨붙었다. 하나는 둘에게, 둘은 다시 셋에게.
“키에에엑!”
순식간에 번져나간 불길은 인외종들의 피부를 불태웠다. 나는 익어가는 인외종들의 다리를 베고, 날개를 베었다.
“키이이잇!”
마력을 아낌없이 분출하며 순식간에 인외종들을 불태웠다. 웨어 울프 때와 마찬가지다. 이들 또한 인외의 길을 걸었기에, 불살의 패널티는 받지 않는다. 나는 불길을 뚫고, 그대로 이설화를 향해 달려갔다.
까아아앙!
처음으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막혔다.
이설화의 손톱과 팔뚝이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재앙 운석]의 힘은 고유 성흔의 레벨업을 촉진시킨다.
재앙의 힘을 빌려, 그녀는 신념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는 [맹독조(猛毒爪)]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막을 수 있다고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크으읏!”
스파크가 튀며 이설화의 몸이 대여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애초에 그렇지 않은 게 이상했다.
지금의 내 종합 능력치는, 유중혁을 제외하고는 화신들 중 거의 최고 수준이니까.
비록 재능은 없어도, 같은 화신들 중에서 나는 결코 약하지 않다.
“포기해. 재앙이 부화하면 너도 좋을 거 없어. 이번 서브 시나리오는 실패 패널티도 없잖아?”
초조한 눈으로 [재앙 운석] 쪽을 살피는 이설화의 눈빛이 탁했다.
주객이 바뀐 듯한 모습.
마치 그녀는 [재앙 운석]을 통해 힘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재앙’ 자체가 목적인 듯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재앙이 부화하면 서울이 멸망할 것이라는 건,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굳이 ‘재앙’을 깨우려는 것일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설화
나이 : 26세
배후성(背後星) : 구암신의(龜巖神醫)
전용 특성 : 유능한 의원 (희귀), 독의 달인 (희귀)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7], [도화살 Lv.4], [맹독 투하 Lv.5], [신독 조제 Lv.4], [해독 Lv.5]······.
성흔 : [맹독조 Lv.4], [천령독 Lv.4], [생사의 갈림길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44(+10)], [근력Lv.42(+10)], [민첩Lv.44(+10)], [마력Lv.35(+10)]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현재 해당 인물은 ‘패러사이트’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 ‘패러사이트’가 해당 인물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패러사이트 앤티누스’의 능력치 일부가 해당 인물에게 전이됩니다.
+
······젠장.
설마 했는데, 역시 이런 상태였군.
[특성 효과로 일부 장면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서 페이지가 넘어가며, 내가 읽었던 몇몇 페이지의 문장들이 망막 위를 흘러갔다.
「이세계 클로노스에는 다섯 개의 지배 종족이 있다. 동쪽의 벨키아, 서쪽의 패러사이트, 남쪽의 이뮨타르, 그리고 북쪽의 미스틸렌. 그리고 중앙의 인바고.」
달려든 맹독조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나는 균형을 잃은 그녀의 등을 그대로 걷어찼다. 이설화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렀다. 나는 그런 이설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클로노스의 재앙」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지.”
‘클로노스의 재앙’이라는 말에 이설화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렸다.
“클로노스가 멸망하던 그 날, 클로노스의 다섯 지배종들은 종족 별로 한 명씩의 영웅을 선출했어. 그렇게 멸망의 치욕을 딛고 살아남아, 클로노스의 명맥을 이어갈 다섯 명의 영웅들이 선택되었지.”
“······.”
“그들은 스타 스트림의 계약을 통해 다른 세계로 보내졌다. 그 세계로 가서 또 다른 종족들과 조우하고, 그곳에서 일어날 재앙을 막는 대가로 자신들의 생명을 약속받았어.”
키이이잇.
이설화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것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곳에서는 ‘길잡이’라고 불리는 놈들이지.”
“······킷. 지구의 인간이, 어찌 그런 것들을 알고 있느냐?”
어떻게 알긴.
책으로 수도 없이 봤으니 알지.
“넌 ‘이설화’가 아니야.”
본래보다 빠른 재앙의 부화.
그런 짓을 할 만한 녀석 중에 ‘인간’은 없다.
“패러사이트의 여왕, ‘앤티누스’. 하라는 ‘길잡이’는 안 하고, 왜 재앙을 깨우고 있는 거냐?”
오직 ‘타락한 길잡이’만이, 그런 일을 꿈꾼다.
[5급 충왕종, ‘패러사이트 앤티누스’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키잇, 키이잇!
패러사이트는 다른 종족을 매개로 살아가는 기생종.
지금 이설화는 ‘길잡이’ 중 하나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나는 죽은 충인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리카온의 운석이 그랬듯, 인간의 인외화(人外化)를 촉진하는 것은 [재앙 운석]의 힘이 아니라 클로노스 길잡이들의 힘이다.
“여기 있는 인간들은 네가 멋대로 감염시킨 것이겠지?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키이잇······!
“재앙을 일찍 깨워서 네가 얻을 게 뭐지? 너희 길잡이들의 목적은 지구인들과 함께 ‘재앙’을 막고, 우리와 화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 아니었나? 기껏 테라포밍된 세계를 대체 왜 파괴하려고 하는 거냐?”
킷킷, 키키킷······!
“이건 네 임무에 위배 되는 행동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장 그 몸에서 빠져나와라. ‘길잡이’로서 올바른 임무를 행해라, 앤티누스!”
가능하면, 나는 이설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유중혁도 그랬을 것이다.
원작에서도 독희가 ‘십악’이 되는 것은 ‘패러사이트’에게 감염된 후의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감염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설화는 십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유중혁 녀석은 잘 하지도 못하는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저 패러사이트의 여왕으로부터, 자신의 옛 연인을 지켜내려고.
[한낮의 밀회]의 알림창이 허공에서 깜빡였다.
―그녀를 죽여라.
유중혁이었다.
―중요한 건 그녀의 목숨이 아니라 세계의 존속이다. 현명하게 처신해라, 김독자.
거리가 멀었기에, 유중혁이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한때나마 정을 주었던 여인보다, 이 세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어쩌면 그게 타고난 영웅의 자질이라는 거겠지.
내가 말했다.
―그러면 너는 불행해질 거다.
―상관없다.
유중혁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확고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이설화가 죽으면, 유중혁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키이이잇.
하나둘 쌓여간 지인들의 죽음은, 언젠가 유중혁의 기억을 갉아먹고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킷! 고작 인간 따위에게······!”
이설화의 입으로 벌레들의 여왕이 말했다.
음색에 진득하게 배어든 인간에 대한 증오.
그녀가 왜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는지,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벌레들의 감정까지 일일이 헤아려 줄 만큼, 지금의 나는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킷. 죽인다.”
이설화의 전신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령독(千靈毒).
이설화의 주특기가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아앗!
맹독조의 손톱을 타고, 시커먼 액체가 나를 향해 뿜어졌다.
파스스스스.
잽싸게 몇 걸음을 물러나자, 천령독에 닿은 바닥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유중혁이었으니 저 독을 맞고도 중독에 그쳤지, 평범한 화신이었다면 맞는 순간 저 바닥처럼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유중혁이 물었다.
―천령독의 대책은 있나?
―있어.
하지만 나는 ‘평범한 화신’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누구의 화신도 아니지만.
푸슈슛!
허공에 산개한 이설화의 독이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독은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비며 내 약점을 찾아냈다.
기어코 몇 방울이 허벅지에 튀었고, 몇 방울은 팔뚝을 스쳤다.
조금 엄한 부위를 스친 독도 있었다.
천령독을 맞은 정장의 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설화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른 판단이었다.
독을 무시하고 달려간 나는 주먹을 힘껏 들어 그녀의 배를 그대로 내갈겼다.
“키이이이엣!”
끔찍한 울음과 함께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천령독에 닿은 내 피부는 약간의 변색을 보였지만, 이내 원래의 색깔로 돌아갔다. 이설화가 눈을 부릅떴다.
“······킷, 천독불침?”
공포에 질린 음성.
천독불침지체는 독을 사용하는 모든 존재에게 공포의 온상이다.
하지만 나는 천독불침도, 만독불침도 아니었다.
“앤티누스, 네가 기생한 화신의 배후성이 누군지는 아냐?”
그 말을 하며,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론 모르겠지. 모르니까, 잘도 그 몸에 들어갔겠지. 그치?”
잠시 후, 내 손에는 책 한 권이 딸려 나왔다.
[한의학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던 한 성좌가 자신의 수식언을 밝힙니다.]
[성좌, ‘구암신의’가 깜짝 놀라 당신을 바라봅니다.]
“키이잇······?”
[동의보감(東醫寶鑑) ― 미완성본]
동방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한의학 기록물 중 하나.
‘왕의 자격’의 5인 던전인 ‘동의보감의 장’에서 나오는 아이템.
“이거 모으느라 고생 좀 했지.”
‘왕의 자격’ 시나리오가 한창 진행될 무렵, 모든 왕들은 [사인참사검]만을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왕들이 [사인참사검]을 탐하는 동안, 나는 다른 아이템들을 열심히 주웠다. 그들이 가치를 몰랐기에 내팽개친 수많은 아이템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이 [동의보감]의 판본들이었다.
<내경편> 4편.
<외형편> 4편.
<잡병편> 11편.
<탕액편> 3편.
<침구편> 1편.
<목차편> 2편.
그렇게 총 25편을 모아야만 완성할 수 있는 성유물.
안타깝게도 나는 5인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8편만을 모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를 보기는 충분했다. 8편만 모아도, [동의보감]은 어지간한 S급 피독주(避毒珠)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아이템, ‘동의보감 ― 미완성본’의 효과가 발동 중입니다.]
[당신의 신체가 일시적으로 자체적인 피독(避毒) 능력을 개화합니다.]
당황한 이설화가 외쳤다.
“어떻게? 하지만 천령독은······!”
“알아. 천령독은 본래 피독주로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지. 하지만 동의보감은 가능해. 왜인 줄 알아?”
[성좌, ‘구암신의’가 허탈한 웃음을 짓습니다.]
별자리 하나가 내게 응답하듯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왜냐하면 그 천령독을 만든 성좌가,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