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83화 스가가가각! 유상아의 단도가 움직일 때마다 적들의 신체가 산채로 갈려 나갔다. 대단하다. ······정말 내가 아는 유상아가 맞나? 일대 다수에서 저만한 위력을 보일 수 있는 대군 스킬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시점에서는 무장성주 공필두의 [무장 지대]나, 한수영의 [아바타] 정도. 그런데 유상아는 그런 대군 스킬도 없이 저런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강해진 거지? 혹시 저게 재능이란 건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유중혁이 말을 걸었다. ―네놈이 곁에 없으니 더 빨리 성장하는군. 네놈은 주변 동료를 키우는 데는 별 소질이 없는 것 같다. 이현성 때도 그랬지. ―······내가 초반에 열심히 퍼줘서 저만큼 큰 거야 인마. 사실 별로 준 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젠장, 왜 하필 내가 곁에 없는 동안 더 강해진 거지? 이래서야 내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잖아. “야.” 한수영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유상아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적들은 다수였고, 유상아는 혼자였으니까. “유상아 씨, 이쪽으로!” 내 목소리에, 유상아의 신형이 멈칫했다. 그녀도 이런 곳에서 나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한수영, 부탁한다.” 한수영이 기다렸다는 듯 아바타를 발동했다. 달려나간 수십 기의 아바타가 독희 그룹의 시야를 교란하는 사이, 나는 무사히 유상아와 접선했다. “독자 씨? 대체 여긴 어떻게······.” “일단 이동한 뒤에 이야기하죠.” 멀리서 후속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다행히 생존자들은 천호대교를 통해 강동구를 무사히 빠져나간 듯했다. 문제는 우리 쪽인데. ―뒤쪽의 고층 건물로 가라. 고지대로 올라가서 시야를 확보하는 게 먼저다. 역시, 이럴 때는 유중혁의 판단이 주효하다. 내가 아무리 ‘멸살법’을 다 읽었다고 해도, 전장 상황의 모든 판단을 유중혁처럼 해낼 수는 없다. 그런데 이어진 유중혁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그 여자,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다. 조심하라고? 누구를? 유중혁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금방 근처의 고층 빌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소란 때문에 자극된 탓인지, 갑자기 괴수종들이 범람하는 바람에 독희 그룹은 우리의 꼬리를 놓친 듯했다. 주변을 뒤지던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을 포기하고 강동구 안쪽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유상아를 돌아보았다. “유상아 씨,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독자 씨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고작 며칠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어쩐지 대화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10년 만에 동창생을 만난 느낌이랄까. 나는 그녀의 타이트한 전투복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 음······.” 하지만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한수영을 한 번 보고, 다시 한수영의 아바타에 업혀 있는 유중혁을 확인한 유상아가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독자 씨도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일단, 짧은 사정 청취의 시간이었다. * ‘절대 왕좌’가 부서진 후, 유상아는 강동구에 떨어졌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녀와 함께 떨어진 이가 있었다. “공필두가 같이 있었다고요?” “네. 아저씨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저씨라고 부르는 걸 보니, 그새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공필두는 어디로 갔죠?” “이틀 전 강동구 그룹이랑 싸울 때 떨어졌어요. 저를 구하시려다 그만······.” 오늘은 의외의 연속이다. 그 ‘십악’ 공필두가 누군가를 구하다가 위험에 빠지는 걸 자초하다니. 고개를 숙인 유상아가 힘들게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아저씨가 한강 쪽으로 그 사람들을 유인했는데······.” 입술을 질끈 깨문 유상아의 표정에 일순 독기가 감돌았다. 문득, 유상아가 독희 그룹을 망설임 없이 해치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아마 공필두는 괜찮을 겁니다. 걱정마세요.” 나는 [디펜스 마스터]와 계약한 상태기 때문에 공필두가 죽으면 바로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계약 조항에 따라 패널티를 입게 되니까. 그런데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건, 공필두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이야기였다. 독희와 마찬가지로 공필두 또한 십악의 일원이다. 그렇게 쉽게 죽을 위인은 아니지. “그 옷이랑 단도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아, 이건요······.” 유상아는 공필두와 헤어진 뒤, 인근 지역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녹색 운석]을 발견했다. [녹색 운석]은 희귀한 아이템들이 담겨 있는 운석. 나는 그녀가 가진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확실히 천호동 인근에 이런 아이템들을 담은 운석이 있었다는 게 기억났다. [고대 암살자의 단도] [부유 고양이 가죽 수트] 둘 다 훌륭한 S급 아이템들이었다. [고대 암살자의 단도]는 멀리 있는 적을 맞출수록 데미지가 증가하는 옵션이 붙어 있었고, [부유 고양이 가죽 수트]는 체공 시간이 길어질수록 움직임을 더욱 기민하게 만드는 옵션이 붙어 있었다. “좋은 아이템들이군요.” “네, 이것 덕분에 잘 싸울 수 있었어요.” 유상아가 미소하자, 그때까지 대화를 듣기만 하던 한수영이 시비를 걸어왔다. “흐음, 너 정말 그게 전부야?” “네?” “‘우연히’ 그걸 얻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 근데 겨우 아이템만 가지고 그런 전투 능력을 보인다는 건 말이 안 돼. 너 배후성이 대체 누구야? 어떻게 [민활한 움직임]이나 [단검술 강화] 레벨을 그렇게 빨리 올렸지? ‘성장 패키지’를 써도 그 정도로 빠른 성장은 불가능한데?” “······그쪽 분은 누구시죠?” “나? 첫 번째 사도.” 유상아는 말없이 단도를 뽑아 들었다. “잠깐만요, 유상아 씨. 이 사람은 적이 아닙니다.” 유상아가 불신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새 친해지신 거예요?” “친해진 게 아니라······.” “충무로의 그룹원들이 저 사람에게 죽었어요. 설마 잊으신 거 아니죠?” 유상아는 내가 없는 동안 충무로의 부대표였다. 그러니 충무로 그룹원들에 대한 애정은, 나보다 그녀가 훨씬 깊을 것이다. 한수영이 말했다. “충무로? 아아, 그렇구나. 네가 그때 걔구나?” 껄렁한 말투에, 유상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수영이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야, 김독자. 내가 나쁜 년인 건 맞는데, 그래도 잘 판단해라. 내가 보기엔 그 여자 뒤가 좀 구린 것 같거든.” “당신······.” “마침 충무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때 봤을 때만 해도 저 여자 저렇게 강하지 않았어. 네가 봐도 이상하지 않냐? 설령 설화급 성좌가 배후성으로 있어도, 단기간에 저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는 없어. SSS급 성장 가속 스킬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근데 그런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성좌가 한국에 대체 몇이나 되겠냐?” 심정적으로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는 한수영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조금 전에 했던 말도 걸렸다. 게다가 유상아는 지금까지도 내게 배후성을 숨기고 있다. 유상아의 당황한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나는 유상아의 배후성이 ‘버려진 미로의 연인’일 거라 생각했었다. ‘마력실’을 통해 ‘길찾기’가 가능한 성좌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에서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건네 준 인물, 즉 그리스 신화의 ‘아리아드네’뿐이니까. 그런데 한수영의 말마따나, ‘아리아드네’의 인지도로는, 유상아를 저 정도로 키워내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금 전 전투에서 유상아가 허공을 도약할 때 보였던 움직임은, 무림계 스킬인 [허공답보]가 아니라면 [헤르메스의 산책법]에 가까워 보였다. 아리아드네의 화신이 헤르메스의 성흔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입을 열려던 찰나, 말을 빼앗은 것은 뜻밖의 존재였다. [하하, 여러분! 그간 잘 지내셨죠?] 빌어먹을······ 타이밍하고는. 나는 곧바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지는 하늘 위로, 도깨비의 신형이 두둥실 떠 있었다. [이번 시나리오 참가자분들은 성질이 아주 급하시네요.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재앙을 깨우시는 분들이 계신 걸 보면 말이죠. 어지간히 다음 시나리오가 궁금하신가 봐요?] 말을 하는 것은 비형이 아니었지만 비형의 모습도 보였다. 아마 담당자가 없어서 하급 도깨비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듯했다. [잠깐 담당 도깨비가 자리를 비워서 이 기간 동안은 쉬엄쉬엄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하. 이제 다들 눈칫밥 좀 드셨잖아요? 이런 이벤트,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거 아시죠?] 좋지 않다. 정말로, 좋지 않은 전개다. [그렇게들 원하시는데, 시나리오를 안 주면 제가 또 도깨비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나리오가 내려온다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사실만을 이야기한다. [서브 시나리오 ― ‘재앙 막기’가 도착하였습니다.] 재앙의 부화가 이제 코앞에 임박했다는 것. + <서브 시나리오 ― 재앙 막기> 분류 : 서브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강동구에 터를 잡은 미지의 세력이 ‘재앙’ 중 하나를 부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해치우고 도래할 ‘재앙’을 막아내세요. 제한시간 : 2시간 보상 : 22000코인 실패시 : ‘질문의 재앙’ 조기 출현. + 우리가 ‘재앙 막기’ 시나리오를 받았으니, 분명 독희 그룹은 ‘재앙 지키기’ 시나리오를 받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도깨비들은, 이 돌발 상황까지도 모두 시나리오의 일부로 포섭하려 하는 것이다. 나는 곧장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저것부터 처리하죠.” 처음으로,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 독희의 그룹이 주둔지를 튼 곳은 강동구 안에서도 천호동 쪽. 정확히는 교회와 성당들이 줄지어 밀집한 지역이었다. 만약 녀석들의 목적이 재앙을 조기 부활시키는 거라면, 종교 밀집 지역을 주둔지로 택한 것은 탁월했다.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기도는 ‘재앙 운석’을 부화시키기에 알맞은 환경을 조성할 테니까. 주변 정찰을 마친 한수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테라포밍 수준이 제일 낮은 길은 거점을 중심으로 북북동. 천중로 16길 쪽이야. 이쪽 길목으로 파고들 수만 있으면, 최단 시간 안에 주둔지의 중심까지 도달할 수 있어. 대신 방비가 만만치 않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없으니,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한다. “괜찮아. 가능한 건물을 통해 이동하면 되니까. 정면은 한수영이랑 유상아 씨가 맡아 주세요. 둘이 싸우지 마시고요.” “······알겠어요.” 당장 도움을 줄 수 없는 유중혁은 한수영의 아바타를 이용해서 고층 건물의 옥상에 남기기로 했다. 딴에는 ‘전황을 지켜보는 역할’이었다. 유중혁은 딱히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충고할 뿐이었다. ―가능하면 부화 전에 녀석들을 해치워라. [바람의 길]이 없다면 ‘질문의 재앙’의 초반 진압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물론,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다. “가죠.” 신호와 동시에, 우리는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먼저 선두로 나선 것은 [아바타]를 사용한 한수영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늘어난 아바타들이, 거리 곳곳을 뛰어다니며 독희 그룹의 주목을 끌었다. “뭐야! 죽여!” 당황한 그룹원들이 아바타들을 쫓아가는 순간, 허공에서 얇고 투명한 실이 날아들었다. 스가가각! “끄아아악!” 아바타를 뒤쫓던 사내들이 강선에 걸려 다리가 잘려나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내들이 넘어지는 궤적엔, 또 다른 강선이 있었다. 푸콰악! 사내들의 목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넘어지는 각도까지 계산해서 고안한 섬뜩할 정도의 이중 트랩이었다. 한수영이 혀를 찼다. “이야, 잔인하네.” “당신이 할 말은 아닐 텐데요.” 살기가 풀풀 날리는 대화와는 별개로, 두 사람의 연계는 상당히 봐줄 만했다. 아니, 봐 줄 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쓸 만했다. 덕분에 나는 손쉽게 독희 그룹들의 감시망을 피해 주둔지의 중심부로 파고들 수 있었다. 재앙 운석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높이만 무려 8미터가 넘는 거대한 운석. 고오오오오······. 불길한 아우라를 줄기줄기 뿜어대며, “내가 재앙입네” 하는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확실히, 화룡종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놈이 들어있다는 게 느껴진다. 저걸 못 막으면, 서울은 반드시 끝장날 것이다. 그리고 운석의 곁에 선 한 여자의 모습.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백발. 설산에 핀 붉은 꽃처럼 도드라진 입술을 보고 있자니, 과연 유중혁의 취향을 알 법도 했다. 한기가 풀풀 날리는 눈빛이 나를 노려보는 순간, 가공할 기세가 그녀의 전신에서 발출되었다. 패기만으로도 피부가 찌릿찌릿해지는 느낌. 공필두 때와는 또 다른 압도감이었다. 그렇군. 역시 [재앙 운석]의 힘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된다 이건가? “······누구냐?” 그녀가 바로 십악, 독희 이설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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