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82화 Episode 17. SSS급 재능 나는 유중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동쪽으로 움직이라고? 살려 놨더니 이젠 명령까지 하네. 살짝 짜증이 난 내가 뭐라고 채 답하기도 전에, 유중혁의 말이 이어졌다. ―‘질문의 재앙’이 깨어나고 있다. ······뭐라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내가 답답했는지,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누군가가, 재앙들을 깨우고 있단 말이다. * 잠시 후, 나와 한수영은 아직도 깨달음에 빠진 리카온을 내버려 두고 강동구 방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저 늑대는 그냥 두고 와도 돼?” “이뮨타르 종족은 호부의 주인을 느낄 수 있어. 그러니 깨어나면 알아서 찾아올 거야. 그보다······.” 나는 곁에서 달리는 한수영을 흘겨보며 말했다. “네가 얘 업으면 안 되냐? 네 아바타 쓰면 되잖아.” “싫어.” 질색한 한수영이 내게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너 아까는 유중혁이 나쁜 놈 아닐지도 모른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너 같으면 네 목 자른 자식을 업을 수 있겠냐?” 따지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유중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어왔다. ―두고 가도 된다. 도움은 필요 없다.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마. 진짜 버리고 가는 수가 있으니까. 녀석을 업은 상태라서, 유중혁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언제쯤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겠냐? ―앞으로 이틀. ―회복되면 나 죽일 거지? 반쯤 농담조로 물어본 건데, 이 새끼가 사람 불안하게 대답이 없다. 나는 일부러 움직이던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나오면 난 너 못 도와줘. 날 죽이려는 놈을 어떻게 믿고 도와주냐? [존재 맹세]를 하면 도와줄게. 이번 회차가 끝날 때까지, 날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건 할 수 없다. 치사한 자식. ―그럼 최소한 다섯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까지 날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해. 그 정도도 못하면 난 진짜 못 도와줘.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맹세한다. 의외로, 유중혁은 순순히 동의했다. 존재 맹세. 스스로에게 거는 제약. 차가운 불길 같은 것이 유중혁의 몸에서 일어나더니, 녀석의 심장 쪽으로 파고들었다. 만약 맹세를 어긴다면, 저 푸른 불꽃은 녀석의 심장을 태울 것이다. 조금 안심하고 있는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하지만? ―한 대는 때리겠다. ―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 와중에 날 한 대 치겠다고? ―설마 이틀 전 일 때문에 그러냐? 유중혁은 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유중혁이 호락호락 넘어가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 ―······한 대만이다. 대신 살살 쳐. 알겠지? 그래, 차라리 한 대를 맞고 유중혁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라면, 적어도 유중혁에게 한 방에 죽진 않을 테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청담대교를 건너 광진구로 진입했다. 주변의 생태가 조금씩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악취가 나던 거리 사이로 생전 처음 보는 풀들이 돋아나 있었고, 시체 썩는 냄새를 대신해 괴수종의 대소변 냄새가 들끓기 시작했다. 땅에서 솟아난 거대한 식물의 줄기가 주변의 고층 빌딩들을 휘감은 것이 보였다. [7급 식물종, ‘야나스프레타’가 당신들을 경계합니다.] 무기를 꺼내는 한수영을 향해 내가 말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보통 저런 녀석들이 갑자기 촉수 공격해오지 않냐?” “만화에서나 그렇지. 쟤들 온순해. 거기 뿌리 밟지 않게 조심하고.” 빌딩의 꼭대기에서 해바라기를 닮은 식물의 머리가 우리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겉보기에는 무섭게 생겼지만, 사실 착한 괴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을 낙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식물종은 본래 [그레이트 홀]이 완전히 열린 직후에야 넘어오는 놈들이었다. “클로노스의 테라포밍이 시작된 모양이네.” 테라포밍(Terraforming).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곧 세계와 세계의 대결이다. 덮쳐오는 이세계와 맞서 싸우는 인류. 서울이 클로노스의 침식을 받고 있듯, 중국은 ‘제 3무림계’의 침식을, 일본은 ‘백요계(百妖界)’의 침식을 받고 있을 것이다. 아바타로 주변을 정찰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온통 괴물 군락지뿐이야. 젠장.” “재앙이 깨어나고 있다면 테라포밍도 빨라졌겠지.” “대체 어떤 녀석이 재앙을 깨우는 거야?” “너 같은 녀석이겠지. 너도 화룡종 깨웠었잖아.” 한수영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 정돈 할 만했잖아?” “그때는 중급 도깨비가 화룡종에게 패널티를 걸었으니까. 그리고 할 만하지 않았어. 네가 안 잡았다고 막말하지 마라.” “이번에도 패널티가 있지 않을까? 약화된 재앙을 잡으면 오히려 우린 이득인 거 아냐?” “‘질문의 재앙’은 패널티가 무의미해. 도깨비가 패널티를 걸어줄 지도 의문이고.” 우리는 괴수의 군락지를 피해 빠르게 움직였다. 거리 곳곳에서 땅강아쥐와 그롤의 무리들이 시체들을 뜯어먹고 있었다. 파괴된 괴수종들의 흔적을 보아, 아마 유중혁은 이 길을 뚫고 내 쪽으로 온 듯했다. 저런 몸 상태로 이만한 거리를 주파했다니, 유중혁이 대단하긴 하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 ―왜 나를 찾아온 거냐? 솔직히 그런 꼴이 됐으면 바로 자살할 줄 알았는데. ―자살? 우스운 소리군. 이 자식이 8회차의 자기 미래를 봤다면 그딴 소리는 못 할 텐데. 하지만 이어진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이 모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정말 간만에, 처음으로 ‘멸살법’을 봤던 그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한수영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줄곧 알고 있다고 믿었던 ‘유중혁’은 쉽게 포기하고 쉽게 사람을 죽이는, 수많은 비극들을 반복하며 정신이 닳아버린 유중혁이었다. 하지만 3회차의 유중혁은, 아직 그렇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3회차의 유중혁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유중혁이 말했다. ―당장 생각나는 게 네놈뿐이었다. ‘절대 왕좌’를 부술 정도는 되는 녀석이니, 조금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 ―왕좌 부순 건 뭐라 안 하는 거냐?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좀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네놈은 ‘이계의 신격’을 배제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지른 거겠지. ―······알고 있었냐? 유중혁과 이렇게 터놓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놀랐다. 쿨한 건 둘째 치고, 이 자식 이렇게 머리가 좋은 놈이었나?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솔직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지만. 네놈이 왕좌를 부수는 바람에, 길잡이들이 모두 흩어졌고 운석들을 수집하는 데도 차질이 생겼어. 광진구와 강동구의 테라포밍이 빨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방랑자 녀석들이 운석의 힘을 쓰고 있어. ―뭔 소리야? 단순히 운석을 쓴다고 테라포밍이 빨라지지는 않아. ―십악(十惡) 중 하나가 ‘재앙 운석’을 손에 넣었다. 십악.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사실을 듣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설마 독희(毒嬉) 이설화냐? ―······알고 있었군. ―천령독을 쓸 수 있는 건 그 여자뿐이니까.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면 너는 왜 중독된 거지? 상대가 독희인 걸 알았다면 너도 정면에서 걜 상대하진 않았을 텐데? ―그녀를 설득해보려 했다. ―설득? 네가? 그 순간 뒤늦게 떠오르는 장면. 유중혁이 말했다. ―동료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동료······ 그랬군. 이제야 생각난다. 독희 이설화는, 2회차에서 유중혁의 동료였었지. 십악이라고 해서 늘 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장성주 공필두가 이번 회차에서 변했듯, 이설화는 1회차를 비롯한 몇몇 회차에서만 십악으로 변모했다. 그 외의 모든 회차에서, 독희 이설화는 유중혁이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료였다. ―너답지 않은 짓을 했네. ―인정한다. 한심했지. ―······.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이설화가 아니었다. 알고 있다. 그래도 잠깐이지만 믿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있던 그 여자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그래서 이번 회차에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무심결에 묻어난 그 고독함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2회차의 인생에서, 이설화는 잠깐이지만 유중혁의 연인이었다. ―이해해.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치 회귀라도 해본 것처럼 말하는군. ―회귀를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함부로 이해한다는 말을 써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보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받지 못할 녀석이니까, 나 하나쯤은 그렇게 말해 줘도 될 것 같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깊이 동요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희미한 위로를 받습니다.] ―이상하군. 분명 네놈은 회귀자가 아닌데······. 정말로 이 감정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것도 예언자의 능력인가? 내가 대답하지 않자,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네놈을 좋게 보진 않는다. 넌 내 여동생을 납치한 파렴치한 놈이다. ―납치 안 했거든? 그냥 보호하고 있었던 거야. 너도 분명 [거짓 간파]로 파악했을 텐데 왜 자꾸······. “김독자.” 한수영의 긴장한 목소리와 함께,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천호대교에서 강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보였다. 허공에서 환한 빛을 내뿜는 [그레이트 홀]에서, 강동구를 향해 드문드문 뭔가가 넘어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벌써. 본격적인 강동구로 진입하자, 바닥을 덮은 낯선 풀들의 밀도가 높아졌다. 칙칙한 나무들이 대열을 이루어 건물 사이사이에 자라나 있었고, 다시 그 나무 위를 뛰어다니는 소형 괴수종들이 있었다. 강동구는 이미 절반쯤 이계(異界)가 되어 있었다. 한수영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너무 늦은 거 아냐? 벌써 ‘재앙’이 깨어났으면 어떡해?” “아직 아닐 거야. 그랬으면 시나리오가 내려왔겠지.” 얼마간 걸음을 더하자, 바닥에 흩뿌려진 몇 개의 표식들이 보였다. 그래피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영역 표시였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 여기부터는, 확실한 독희의 영역이다. 그녀는 다른 방랑자들처럼 강동구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터전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예상보다 일의 진척이 빨랐다. 한수영이 말했다. “이 정도로 방비를 잘 해놓은 집단이라면 공략하기가 쉽지 않겠는데······. 뭔가 생각해둔 거 있어?” 없다. 애초에 전면전을 벌이러 가는 게 아니니까. “필요한 것은 운석뿐이야. 그것만 훔쳐 오면 돼.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네가 운석을 맡아.”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방랑자들의 왕’ 같은 조력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유중혁이 끼어들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설령 재앙이 시작되더라도, ‘질문의 재앙’은 초기 진압이 가능한 재앙이니까. 초기 진압이라. 과연, 유중혁이니까 가능한 오만이다. ―초기 진압? 그건 누가 하는데? 반병신인 네가 하게? ―당연히 네놈이 해야지. 어차피 그럴 생각 아니었나?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네놈은 이미 길잡이를 깨워서 [바람의 길]을 전수받았을 테니까. 살짝 분노한 말투를 보니, 자기가 배울 [바람의 길]을 빼앗아서 성질이 난 모양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거 못 배웠어. ―······왜지? 시간이 부족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다행이겠다. ―아니, 재능이 없어서. 유중혁의 침묵에서 깊은 경멸이 느껴졌다. ―네놈, 그럴 거였다면 처음부터······. “사람이야.” 한수영의 말과 동시에,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었다. 십악의 영역에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은 십악의 수족일 터였다. 나는 업고 있던 유중혁을 한수영의 아바타에게 맡겼다. “······잠깐만 업는 거니까 빨리 도로 데려가. 알겠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보통 단일 그룹이 이동할 때는 이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곧이어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앞쪽에서 울려 퍼졌다. “다들 천호대교 쪽으로 달리세요!” 그들은 독희의 그룹이 아니었다. ‘방랑자들의 왕’처럼 세력가는 아닌 것 같았지만, 누군가가 독희의 그룹에 맞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강동구에서 탈출시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던 비무장 생존자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비, 비켜요! 어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살이 날아왔다. 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말을 건 남자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화살을 맞은 남자의 등이 급속도로 변색되더니 이내 시커멓게 변했다. 독이었다. “저 새끼들 잡아!” 독희의 그룹. 남녀를 막론하고 수십에 이르는 그룹원들이 허공으로 일제히 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촤아아악! 건물의 뒷면으로 피하려는 순간, 허공에 거미줄 같은 실의 장벽이 펼쳐졌다. 수십 겹에 달하는 그물이 한꺼번에 쏘아진 것처럼, 화살들은 실타래에 엉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한수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대체 뭔 기술이지?” 실은 뒤쪽에서 달려오던 독희의 그룹에게도 쏘아졌다. 마치 강선 같은 실. 그 실의 날카로움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의 다리가 허공을 날았다. “끄아아악!” 실들은 모두 한 여자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몸매가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검정색 전투복을 입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여자. 여자의 손끝에서 뻗어진 두 개의 나이프가 마력의 실을 타고 화려하게 움직였다. 여자는 실의 길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달려오는 독희의 그룹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 손속. 정돈된 것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한 움직임. 종합 능력치도, 가진 스킬도 결코 평범한 배후성을 가져서는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심지어, [등장인물 일람]도 먹히지 않는 여자.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야, 저 여자······.”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상아 씨?” 이틀 만에 만난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유상아의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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