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81화
나는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유중혁에게서 슬그머니 물러서며, 허공의 비형을 다그쳤다.
‘네 짓이지?’
설령 유중혁이 정말 근처에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타이밍 좋게 발견될 리 없다. 분명 비형 놈이 근처의 누군가에게 ‘서브 시나리오’를 발동시켜 유중혁을 이쪽으로 데리고 오게 만든 것이다.
[걸핏하면 나부터 의심하냐? 증거 있어?]
물증은 없다.
하지만 심증은 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가슴을 졸입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저게 심증이지.
멍청한 얼굴로 유중혁을 내려다보던 한수영이 내게 속삭였다.
“······찾았네.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역시 구해야겠지? 이 자식, 주인공이잖아.”
당연히 구하긴 구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자식을 구하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한수영은 당장이라도 유중혁이 깨어날까 겁먹은 표정이었다.
“혹시 금제 걸 만한 물건 없어?”
“유중혁한테 웬만한 건 안 걸려.”
“그럼 어디에 가둬 놓는다거나······.”
“그러면 저놈 자살할 거야.”
“하긴, 회귀하면 그만이니까······. 젠장, 근데 이 자식 회귀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한수영도 뒤늦게 그 생각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유중혁이 회귀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일단은 못하게 막아야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최악의 수를 가정하는 것이 옳다.
자칫 잘못하다가 이 세계가 리셋되기라도 하면, 내 존재도 사라져버릴 테니까.
근데 이 자식······, 누구한테 이렇게 맞고 온 거지?
나는 녀석의 상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배를 중심으로 둥글게 퍼져 있는 상처. 내장과 늑골 일대가 모조리 부러졌다. 누군가 엄청나게 강력한 한 방으로 유중혁을 조진 건데······.
순간 나는 멍하니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표정이 왜 그래? 갑자기 애잔한 얼굴이다?”
“······아무것도 아냐.”
갑자기 여러 가지가 납득이 되었다.
하긴, 무려 근력 100의 펀치를 맞았으니······.
그렇다면 무려 이틀 동안이나 이 꼴로 있었다는 건데.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이거, 잘못하면 유중혁과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배를 살피다 천천히 얼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나는, 전신에 돋은 소름에 단번에 십여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시발.”
두 눈을 부릅뜬 유중혁이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뻐끔뻐끔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죽인다, 김독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곁에 있던 한수영이 안 보인다 싶더니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채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야! 화 풀면 안 되냐?”
“······.”
“정정당당한 승부였는데 너무 쪼잔한 거 아니냐? 그때 너도 나 죽이려고 했잖아?”
유중혁의 눈빛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빌어먹을······.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놈이 나를 죽이든 어쨌든, 지금 여기서 유중혁은 살아나야 했다. 유중혁이 없으면 내가 [질문의 재앙]을 막더라도 다른 재앙을 막지 못해 세상이 멸망하는 수가 있으니까.
왜 하필 ‘멸살법’의 주인공이 저런 녀석인 걸까.
이현성이거나, 하다못해 정희원만 되었더라도 이야기를 끌어가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푸념할 때가 아니지.
나는 일단 스킬을 발동하기로 했다. 저놈 생각이야 뻔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란 말이 있으니까.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독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유중혁을 보았다.
······방금 저게 날 불렀나?
「네놈은 내 말이 들릴 거야. 그렇지? 지금까지 네놈이 했던 짓을 돌이켜보면······.」
······뭐?
「제발 들린다고 말해라. 지금 네놈이 움직이지 않으면, 이 세계는······.」
나는 조금 당황한 상태에서 그 꼴을 보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빌어먹을.」
유중혁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상태를 보아하니 지금 유중혁은 나와 싸울 힘이 전혀 없는 듯했다. 게다가······ 착각인지 나를 향한 적의도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 내 말 들리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던 유중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심한 상처라고 해도, 그만한 타격을 받았으면 자동으로 [기사회생]이 발동했을 텐데, 왜 이 자식은 아직도 이 모양인 거지?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인물 : 유중혁
전용 특성 : 회귀자 <3회차> (신화), 프로게이머 (희귀), 패왕 (영웅)
전용 스킬 : [현자의 눈 Lv.8], [백병전 Lv.9], [상급 무기연마 Lv.9], [정신 방벽 Lv.8], [백보신권 Lv.6], [주작신보 Lv.6], [파천강기 Lv.5]······(중략)······.
성흔 : [회귀 Lv.3], [전승 Lv.3]
종합 능력치 : [체력 Lv.60], [근력 Lv.60], [민첩 Lv.60], [마력 Lv.60]
* 현재 해당 인물은 상태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 현재 해당 인물은 ‘천령독(千靈毒)’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
다른 능력치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전히 유중혁은 서울의 화신들 중 최강이었고, 스킬들도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더 성장했다.
문제는 상태이상이었다.
제아무리 유중혁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천독불침(千毒不侵)]이나 [만독불침(萬毒不侵)] 따위의 스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때문에 독은 지금의 유중혁이 가진 몇 안 되는 약점 중의 하나였다.
중독 때문에 이 꼴이 된 거였군.
자세히 보니 녀석의 몸 전체에 새파란 혈관이 도드라져 있었다.
중독이 발생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하진 않은 것 같았다.
다행히, 아직 살 수는 있다.
하지만 묘한 일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유중혁에게 천령독을 주입할 수 있는 존재라면, 내가 알기로 하나뿐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레 이쪽을 보던 여자가 내게 물었다.
“저······ 혹시 그쪽이 ‘김독자’ 씨?”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아까 유중혁을 여기로 데려왔던 사람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저분이 그랬어요. ‘김독자’한테 자기를 데려다 달라고······.”
유중혁이?
조금 전보다 더 녹빛으로 물든 유중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겁에 질려 달아나 있던 한수영이 슬그머니 돌아와 말을 걸었다.
“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한수영이 어깨를 찌르며 채근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비형에게 말을 걸었다.
‘비형, 도깨비 보따리 좀 열어봐.’
[이제 알겠냐? 내가 꾸민 일 아니라니까?]
‘보따리나 열어.’
나는 남은 코인을 확인한 뒤, 유중혁을 치료할 만한 코인 아이템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천령독에 중독된 상태라면, 단순히 [엘라인 숲의 정기]를 먹는 것만으로는 해독이 불가능했다. 나는 잽싸게 텍본을 켜서 재빠르게 몇 가지 재료를 확인한 뒤, 도깨비 보따리에서 아이템 구매를 마쳤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 1개를 구입하였습니다.]
[아이템 ‘늙은 바바라의 가지’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풋내나는 달툰의 뿔’ 2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해독 감자’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에인테른 신전의 정화수’ 2통을 구매하였습니다.]
[아이템 ‘엘라인 숲의 정기’ 1개를 구매하였습니다.]
[총 7370코인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출혈 서비스다.
나는 주변의 생존자들에게 부탁해 작은 양동이 하나를 구한 뒤, 마력 화로에 불을 붙이고 재료들을 쏟아 넣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지금 뭐 만드는 건데?”
“해독약.”
“역시 살리기로 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자식, 일부러 날 찾아온 것 같아.”
“일부러? 왜?”
“나도 모르지.”
“혹시 도와 달라고 온 거 아냐?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피떡이 돼서 널 죽이러 올 거 같지는 않은데.”
“유중혁이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어떻게 알아?”
“난 알아. 이 새낀 그런 놈이니까.”
나는 쪼그려 앉아 화로의 불길을 조정했다.
불길이 새파랗게 타오르며, 양동이 안의 내용물이 끓기 시작했다. 색깔이나 형태만 보면 ‘죽음 계곡의 고블린 내장탕’ 같은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 음식이었다. 겉보기엔 끔찍해도, 이 수프는 탁월한 해독제였다.
한수영이 무릎에 손을 짚은 채로 그 끔찍한 음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멸살법’에서 유중혁이 그렇게 나쁜 놈이었나?”
“······뭐?”
“가만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유중혁 잘 보면 사람도 꽤 많이 구했고, 착한 일도 하잖아? 물론 사이코패스 같은 짓도 하긴 하지만, 결국에는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놈 아냐?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우는 놈이란 말이지. 인정하긴 싫지만 날 죽인 것도 내가 악인이라 그런 거고.”
생각해 보면, 한수영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더 멀리 도망간 네가 유중혁을 변호하니까 아주 설득력이 넘치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난 어디까지나 사람이란 게 하나의 면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뜻밖의 이야기여서, 나는 잠시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이 쿨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리 내 작품을 ‘표절’이라고 우겨도, 사실 내 작품이 ‘멸살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그 말만 안 했어도 거의 설득될 뻔했는데, 진짜 아깝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뜻밖의 화두에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유중혁은 어떤 인간인가.
나는 정말 ‘유중혁’이라는 존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멸살법’을 다 읽은 유일한 독자였으니까.
그런데 수프 속에서 끓는 재료들을 보는 동안, 어쩐지 내가 갖고 있던 대답의 일부가 수프 속에 희석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유중혁’이, ‘유중혁’의 전부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수프가 다 끓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당신의 선행을 지지하는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3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후원을 받아도 손해인 경우는 드문데. 제길.
나는 수프를 가지고 쓰러진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한수영이 근처의 가게에서 스푼을 구해 왔고, 나는 그 스푼으로 수프를 떠서 유중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는 내 꼴을 보던 한수영이 이죽거렸다.
“조강지처 납셨네.”
“네가 할래?”
“싫어.”
사실 한다고 해도 안 줬을 거다.
왜냐하면, 이걸 한 숟갈 떠먹일 때마다 들려오는 시스템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한 번 먹일 때마다 코인을 퍼주다니,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닐 수 없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손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엄청난 꿀 이벤트였던것이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열 스푼이 넘어가자,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4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 자식, 진짜 선행에 감동해서 주는 거 맞아?
그렇게 한 그릇을 다 먹인 뒤 얼마나 기다렸을까.
유중혁이 엷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직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조금씩 녀석의 독이 치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현재 사용 대상의 동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한낮의 밀회]는 선택한 대상과 정해진 기한 동안 일대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코인에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전음] 스킬을 배웠겠지만, 아직 그만한 여유는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택한 것이었다.
[대상이 당신과의 통신에 동의하였습니다.]
[‘한낮의 밀회’를 시작합니다.]
유중혁을 떠올리며 메시지를 보내자, 내 눈앞에 작은 메신저 창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야, 내 말 들리냐?
잘 연결됐군.
굳이 이 아이템을 구매한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천령독의 효과로 유중혁의 혀가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었고, 둘은 한수영에게 쓸데없는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셋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데, 유중혁에게 내가 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확신을 더해주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중혁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독자, 지금 당장 동쪽으로 움직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