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80화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뭔데? 전수 끝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내가 뭐 잘못 하고 있어?” “정확히는······.”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모든 게 잘못되셨습니다.” 너무 진심이 깃든 말이라, 나는 핵펀치를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에 떠 있는 그레이트 홀이 유난히 더 커 보였다. 마치 나를 조롱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런 나를 보며, 리카온이 확인사살을 준비했다. “호주께서는······ [바람의 길]의 자질이 조금도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모든 스킬의 자질이 거의 없으신 듯합니다.” 이거 잘못하면 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겠다. * 그런 식으로 몇 시간이 더 지나, 하루가 몽땅 흘러버렸다. 이제 다섯 번째 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8일.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람의 길]을 익혔다. 물론, 차도는 없었다. “크르릉. 호주, 그만 포기하시는 편이······.” “······왜 난 안 되는 거지?” 옆에서 낄낄대며 구경하던 한수영이 말했다. “왜긴? 재능이 없으니까 안 되지.” “그럴 리가 없어.” “왜 없냐? 주인공도 아닌 게. 너 요즘 좀 잘 나간다고 유중혁이라도 된 줄 착각하는 거 아냐?” 어쩐지 정곡을 찔린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머리로는 다 이해하고 있어.” “아, 예. 생각으로야 누구나 다 서울대 갈 수 있습죠.” “정말이야.” 정말로, 나는 [바람의 길]과 관련된 깨달음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답답한 마음에 한 시간 전 생존자들로부터 보조 배터리를 구해 텍본을 다시 읽기도 했다. “왼손에는 질풍을, 오른손에는 폭풍을. 직선과 곡선이 부딪치는 장소에서 바람의 길은 열릴 것이다.” “허, 어떻게······. 정말로 이해하고 계셨군요!” 곁에서 듣던 리카온이 감탄했다. 실제로 내가 방금 중얼거린 것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유중혁의 깨달음 중 하나였다. ‘멸살법’에서 유중혁은 이딴 중2병 같은 깨달음을 ‘작은따옴표’에 한자병기(漢字倂記)까지 해가며 통찰한 뒤, 단 5분 만에 [바람의 길]을 습득한다. 근데 그 간단한 걸, 나는 지금 이틀째 못하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건데?” “예? 방금 잘 말씀하셔 놓고서······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습니다.” “아니, 이건 비유잖아.” “비유가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하면 됩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번만큼은 ‘멸살법’ 작가의 설명충 버프로도 해결이 안 됐다. 왜냐하면 설명이랍시고 적어 놓은 것들이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제4의 벽]도 이 순간만큼은 무용지물이었다. [제4의 벽]은 판단력이나 침착함을 키워 주지만 없는 재능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약간 열이 받아서 리카온에게 말했다. “너 그럼 이거 한번 해 봐.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니 태극을 이루고, 다시 하나의 바람과 다른 하나의 바람이 만나 음양을 이룬다.’” 태극이니 음양이니 하는 건 분명 지구의 개념일텐데도, 리카온은 철썩 같이 알아 들었다. “대체 그런 심오한 구결은 어떻게 통찰하신 겁니까?” “딴소리 말고, 직접 몸으로 펼쳐 보라고.” “그러니까, 이런 식입니다.” 리카온이 손을 쓰자 각 방위에서 불어온 바람들이 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바람이 소용돌이를 이루었고, 다시 더해진 바람에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어렸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걸 듣고 저런 기술을 펼친다고? 아니, 왜 나는 못하는 건데? 괜히 오기가 생겼다. “그럼 이건 어때? ‘네 개의 바람이 만나 방위를 형성하고, 그에 다시 네 개의 바람이 더해져 팔괘의 묘를 이루니, 그로써 바람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도 할 수 있겠어?” 그 문장은 유중혁이 9회차 회귀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리카온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하겠지? 내가 딱 그 기분이야.” “호구······ 아니, 호주. 정말로 감사합니다.” ······뭐? [5급 인외종,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리카온은 갑자기 가부좌를 틀더니 수련을 시작했다. [당신은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의 진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뮨타르의 왕자 리카온’이 당신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낍니다.] [멸망한 세계 ‘클로노스’ 출신의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2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았다. 방금 내가 한 말을 듣고, 저 망할 늑대가 오히려 깨달음을 얻어버린 것이다. 한수영은 웃다 못해 이제 배를 잡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좌절감이 몰려온다. 어쩌면 나는 ‘멸살법’에 대해서만 잘 알았지, 정작 ‘나’ 자신에 관해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한심함에 감탄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허술함에 실망합니다.] 허공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이제라도 좋은 배후성을 하나 붙잡아 계약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비형과의 계약 때문에 불가능한 얘기였지만. [그러게 왕좌는 왜 부쉈어? 멍청하게.] 깜짝 놀라 위를 보니, 허공에 투명한 비형의 형체가 떠 있었다. 나는 도깨비 통신으로 말을 걸었다. ‘이제 말해도 괜찮은 거냐? 그 중급 도깨비는?’ [그놈은 당분간 안 와. 징계 제대로 먹었거든. 다섯 번째 메인 열릴 때까지 못 올 거야. 아, 그리고 채널 레벨업도 또 했어. 잘하면 나 다음 달쯤에 중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덕분이야.] ‘잘됐네.’ [뭐야, 별로 안 기뻐 보이네? 내가 잘 되면 너도 좋은 거라고 인마.] ‘중급 되면 쓸데없이 바빠질 거 아냐.’ 내 말에 비형이 피식 웃었다. [자식, 걱정마. 다른 화신은 몰라도 내가 널 안 챙기겠냐? 물론 요즘 관리국에서 중급 도깨비들을 엄청 볶긴 하지만······ 어떤 새끼가 개연성을 엄청나게 비틀어 놔서 시끄러웠거든.] 누군지 말 안 해도 알겠다. [아, 물론 네 얘긴 아니고.] 보나마나 유중혁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유중혁의 성장속도는 개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녀석은 누가 봐도 치트에 가까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성장한 녀석이 하나 있는데, 관리국에서도 어떻게 건드릴 수가 없는 놈이라······. 아마 뒷배가 만만치 않은 녀석인 것 같아.] 아마 앞으로도 유중혁의 ‘개연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개연성’은 ‘개연성’을 감당할 수 있는 성좌가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중혁의 성좌는 그게 가능한 존재다. [그건 그렇고, ‘성장 패키지’ 안 살래? 지금 사면 싸게 팔아줄게. 너 그 스킬 못 배워서 지금 고생하고 있는 거잖아? 이 패키지 사면······.] ‘안 사. 성장 패키지는 어차피 이미 배운 스킬에만 적용되는 거잖아? 간만에 나타나서 등부터 처먹으려고 하냐?’ ‘성장 패키지’는 함부로 사용하면 패널티가 있다. 저 강력한 유중혁도 ‘성장 패키지’를 안 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쳇, 알고 있었냐······?] 비형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슬슬 뭘 살 때가 되긴 했지.’ [보유 코인 : 62,372 C] 화룡종의 부위들을 판 덕택인지, 종합 능력치를 그만큼 찍고도 아직 코인이 상당히 남았다. 4만 코인만 더 있었으면 [천룡보(天龍步)]라도 샀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비형이 화색을 띠며 덤벼들었다. [오, 그래? 사고 싶은 거 있어?] ‘너희 조만간 새 코인템 나오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첩자 심었냐?] ‘곧 새 시나리오 열리니까 당연히 팔겠지. 그때 되면 말해. 사줄 테니까.’ [호, 네가 웬일······.] 나는 그대로 도깨비 통신을 꺼버렸다. 어차피 얻을 것도 없는 마당에 얘기해봐야 열불만 터지니까. 돌아보니 리카온은 여전히 깨달음을 얻는 중이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한수영이 턱을 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야, 이제 어쩔 건데?” “······나도 몰라. 생각 중이야.” “그거, 차라리 내가 배우게 해줘.” “뭐?” “아니면 저기 다른 생존자들한테 배우라 시키든가.” 그 말에 나는 우리 주변에 터를 잡은 사람들 쪽을 바라보았다. 코인 농장이 붕괴한 지 이틀째. 구출된 생존자들은 힘을 모아 다른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윤 대리 쪽 코인 농장 피해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어쩌면 한수영의 위선 가득한 선행이 그들을 변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역시, 이렇게 되고 보면 위선도 선인가 싶다. 한수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의 길인지 뭔지 아무튼 그걸 배우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냐? 그럼 누구든 상관없잖아?” “······맞아, 누구든 배우기만 하면 돼.” “그럼 왜 꼭 네가 배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데? 너 혼자 성좌들 주목받으려고 그러는 거지?”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소리도 아니었다. “호부를 가진 사람만 [바람의 길]을 배울 수 있어.” “그럼 그 호부 나한테 줘봐.” “이건 양도가 안 돼.”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여자는 진짜······. “유중혁보다 더 의심 많은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마침 말 잘 꺼냈네. 그 스킬, 원래 전개대로라면 유중혁이 배워야 하는 거지?” “맞아.” “그럼 왜 네가 사서 고생을 해? 유중혁한테 다 맡기면 되는데.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유중혁이나 찾으러 가자. 걔 잘 키워서 덕 보면 되잖아. 그 녀석이라면 호부 없어도 어떻게든 해내겠지.” “유중혁은 다른 사람 말 안 들어.” “내가 유혹해 볼게.” 나는 한수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은 어린아이 체형 싫어해.” “······지금 나 무시하냐?” “게다가 유중혁을 찾아도 문제야.”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호부’가 없으면 [바람의 길]은 습득할 수 없다. 그렇다는 것은 내게서 ‘호부’를 빼앗을 거란 얘긴데, 귀속 아이템인 호부는 내가 죽어야만 소유권이 해제된다. 즉, 유중혁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비단 호부 때문이 아니더라도······. “너도 알겠지만, 마지막에 좀 안 좋은 상태로 헤어졌어. 만나면 분명 나 죽이려고 할 거야.” 내 근력 100짜리 펀치에 피떡이 되어 날아가던 유중혁. 그 와중에도 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그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긴, 그 새끼 내 목 자를 때도 엄청 과감하더라.” 충무로역의 기억이 떠오른 듯, 한수영도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게다가 찾고 싶어도, 지금 어디 있는지······.” 멀리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부상자입니다, 도와주세요! 상세가 심각해요!” 누군가가 근처의 부상자 하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를 기대합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이 다친 부상자를 치료해주길 기대합니다.] 모처럼 우리엘을 비롯한 성좌들의 메시지까지 떴다. 웬일이지? 나는 한수영을 데리고 일단 그쪽으로 가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문제의 부상자를 확인한 나는 허공에 떠 있던 비형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비형이 시치미를 떼며 킬킬 웃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인마.] 온몸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유중혁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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