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7화
Episode2. 주인공
지하철은 동호대교 위를 반쯤 지났을 무렵 멈춰 섰다.
“맙소사…….”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 광경을 내다보았다. 폐허가 된 서울 시내와 무너진 빌딩들. 거대한 뱀을 연상시키는 괴수들이 한강에 불시착한 전투기의 잔해를 뜯어 먹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나는 녀석들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어룡(魚龍).
흔히 씨-써펜트라고 불리는 괴수. 훗날 ‘멸살법’의 세계에서 7급 괴수종으로 분류될 놈이었다. 어룡들 중 하나가 이쪽을 돌아봤다.
“으, 으아아아! 온다!”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외쳤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어룡을 보면서도 무감했다. 저 녀석들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쿠르르르르.
울음을 토한 어룡은 동호대교 아래쪽을 맴돌더니 기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시나리오’는 모든 사안에 우선한다. 고로 시나리오의 보호를 받는 한, 당장 녀석들과 부딪칠 일은 없다. 적어도 당장은 그랬다.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 점검으로 보상 정산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본래 보상 정산이 시작되어야 할 타이밍임에도,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오류 메시지뿐이었다.
이건 아마 나 때문이겠지.
나는 몸통만 남은 김남운의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본래 ‘멸살법’의 진행대로였다면 김남운은 이 열차 칸의 대부분을 살해하고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갔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막았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쯤 김남운의 죽음에 분노하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등장인물 ‘김남운’의 죽음으로 두 명의 성좌가 당신에게 희미한 적대감을 표합니다.]
성좌(星座).
‘멸살법’의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들이자, 저 먼 성운(星雲)의 꼭대기에 앉아 이 모든 이야기를 관람하는 비극의 배후. 성좌들의 호오(好惡) 표시가 뜨는 것을 보니 지금부터가 본격적이라는 실감이 났다.
우스운 일이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놈들과 나의 입장은 정반대였는데, 이젠 놈들이 나를 구경하고 있으니.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시나리오에 감탄을 표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나를 싫어하는 놈들이 있다면,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는 법.
어느 쪽이든 불편한 상황이긴 매한가지였지만 당장 놈들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이제 광대가 된 것은 내 쪽이었으니까.
나는 바닥에 떨어진 김남운의 맥가이버 칼을 주우며 생각했다.
구경할 테면 얼마든지 구경해보라지. 네놈들이 낼 관람료는 결국 네놈들의 목숨이 될 테니까.
“……독자 씨? 괜찮아요?”
고개를 들자 유상아의 얼굴이 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 하얀 블라우스 곳곳에 남은 핏자국과 올이 나간 스타킹. 내가 알던 유상아는 이제 없었다. 나는 유상아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말했다.
“미안해요. 할머니는 못 구했어요.”
나는 역시나 머리가 사라진 할머니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할머니.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을 것이다.
유상아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독자 씨는 어떻게 그렇게…….”
“예?”
“아, 아니에요. 그보다…… 감사해요.”
“뭐가 말이죠?”
“그, 아까…….”
뒤늦게 한 장면이 떠올랐다.
때마침 내가 케이지를 던진 방향에 서 있던 유상아의 모습.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냥 우연입니다. 그러니 두 번은 없을 겁니다.”
“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상아.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가 살고, 다른 누군가는 죽었다.
살아난 쪽이 누구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와, 대박.]
허공에서 치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가 나타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잠깐 다른 칸 보고 온 사이…….]
도깨비의 표정에 환희와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녀석의 솜털 머리 위로 반짝이는 별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속으로 별들의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스물, 스물하나. 총 스물한 개인가. 녀석이 기뻐할 만도 하다.
[무려 스물한 분이나 제 채널에 접속하시다니…… 이거 일진이 잘 풀리려나? 어이쿠, 후원 감사합니다. 성좌님들. 하하, 여러분들! 밥값 제대로 하셨나 봐요?]
별들의 숫자는 곧 채널에 접속한 성좌들의 수를 의미한다. 스물 하나면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초보 도깨비인 녀석에게는 낯선 숫자일 것이다.
[이거 이거, 생존자 숫자도 상당하네요? 옆 칸 그놈도 또라이였는데…… 오늘은 꽤 재밌는 일들을 벌여 주시는군요.]
히죽거리던 도깨비가 허공에 뭔가를 조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생존자 명단이 떠올랐다.
[불광행 3434열차 3807칸 생존자 : 김독자, 이현성, 유상아, 한명오, 이길영. 총 5명 생존.]
5명.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나는 생존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난 이현성의 생존은 예상했다. 역시나 유상아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그리고 이길영.
내 예상이 맞다면 ‘이길영’은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이 소년의 이름일 것이다. 소년의 손에는 으스러진 메뚜기의 진액이 묻어 있었다. 내가 쥐여주었던 메뚜기였다.
머리가 사라진 자신의 엄마를 말없이 바라보는 소년. 소년의 엄마는 그를 버리고 할머니를 죽이는 일에 동참했다. 그리고 이 소년은 그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소년의 어깨를 슬며시 잡았다. 같잖은 동정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것은…… 그렇다. 위선이다.
“꼬마야.”
천천히 고개를 든 소년의 눈동자에, 생전 처음 맞닥뜨린 죽음의 공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본능. 지금 이 소년은 엄마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소년은, 그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살고 싶니?”
소년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저항하듯 소년의 몸이 떨렸다. 그리고 미미하게, 소년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럼 같이 가자.”
스르르 움직인 이길영이 내 다리 곁에 바짝 붙었다. 유상아가 감동이라도 한 듯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또 오해를 사게 생겼다. 사실 보라고 한 일이긴 했다. 그 대상이 유상아는 아니었지만.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에게 2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저열하다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나 역시 살고 싶은 건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있을 중요한 이벤트를 감안하면, 지금 성좌들의 시선을 끌어두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이, 이제 저흴 풀어 주시는 겁니까? 원하는 조건도 들어드렸지 않습니까?”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와이셔츠가 몇 갈래로 찢어진 한명오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명오 부장. 억세게 운이 좋은 인간이다. 그런데 조금 의아했다. 저 돈 많은 한명오가 왜 퇴근길 지하철에 타고 있었을까.
얼마 전에도 벤츠를 새로 뽑았다며 부서마다 순회 돌던 인간이.
[흐음, 풀어달라뇨? 바깥 광경을 제대로 못 보셨나 보죠? 진짜로 내보내드려요?]
도깨비가 킬킬 웃었다.
[아무튼 감탄했습니다. 사실 이 칸은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용케도 첫 번째 시나리오를 통과하셨네요. 이로써 벌레도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셨군요.]
새삼스레 처지를 깨닫게 되는 말이었다. 아마 저놈 눈에는 우리가 메뚜기처럼 보이겠지.
[자자, 고난을 이겨낸 만큼 보상도 있어야겠죠? 이제 여러분은 첫 번째 시나리오의 보상으로 무려 ‘성좌’님들의 후원을 받을 자격을 갖췄어요. 와아아! 어때요, 기대되죠? 흠, 다들 시큰둥하네요. 이거 정말 대단한 일인데.]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성좌’나 ‘후원’이 뭔지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성좌의 후원.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약관화했다. 드디어 멸살법의 핵심 이벤트 중 하나인 <배후 선택>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흠,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시네. 쉽게 말씀드릴게요. 지금의 당신들은 아주, 형편없을 정도로 약해요. 당장 이어질 시나리오 속에 던져 놨다간, ‘크루크’는커녕, 약해 빠진 ‘땅강아쥐’만 만나도 살해당할 정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이 우주에는 그런 당신들을 가엾게 여겨 후원하고자 하는 위대한 분들이 계시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결국 참지 못한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누가 누구를 후원한다는…….”
[흠, 말귀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 한국 속담에 그런 게 있었죠. 백 번 듣느니 한 번 보는 게 낫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보시죠. 뭐, 운이 없는 사람은 겪을 기회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핫!]
나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부터다. 여기서 좋은 선택지를 골라야만 앞으로의 생존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독자 씨? 갑자기 이상한 선택지 두 개가 떴는데, 대체…….”
“저한테 물어보셔도 모릅니다.”
물론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나저나 선택지가 두 개라. 유상아도 꽤나 운이 좋은 편이다.
“편하게 생각하죠. 적성 검사라도 한다고 생각하고.”
“적성 검사라니…….”
“어차피 이게 무슨 상황인진 아무도 모릅니다. 마음 편히 임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 알겠어요.”
유상아는 내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고 허공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기묘한 점괘라도 만난 듯 심오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다들 자신의 눈앞에 뜬 선택지를 읽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나 역시, 나의 선택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배후(背後) 선택>
―당신의 배후를 선택하세요.
―선택한 배후는 당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것입니다.
1. 심연의 흑염룡
2.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3. 은밀한 모략가
4. 긴고아의 죄수
+
수수께끼 같은 4개의 선택지.
나를 화신(化身)으로 삼고자 하는 성좌가 총 넷이라는 뜻이었다.
‘멸살법’의 주인공이 처음 받았던 선택지가 다섯 개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네 개도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정말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 곁으로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이었다.
성좌들은 절대로 자신의 진명(眞名)을 밝히지 않는다.
그 때문에 모든 계약자는 ‘심연’이니 ‘악마’니 ‘정원’이니 하는 고풍스러운 은유를 열심히 곱씹어 성좌의 정체를 유추해야만 했다. 물론 ‘멸살법’의 유일한 독자인 내게 이 정도 수수께끼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먼저 ‘심연의 흑염룡’.
내 기억에 따르면 이 성좌는 성좌들의 집단인 흑운(黑雲)을 이끄는 강력한 존재였다.
진명은 잊었는데, 굉장히 긴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성좌의 장점은 계약과 함께 강력한 전투력 보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체력과 근력 보정이 절실한 초반에는 ‘심연의 흑염룡’만한 성좌가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초반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이 성좌의 힘은 사용 빈도가 잦아질수록 정신이 오염되고, 나중에는 광기에 젖은 살인마가 되어버린다. 보통 ‘중2병’ 특성을 가진 녀석들을 후원하는 성좌인데…… 이 성좌가 왜 날 고른 건지 모르겠다.
뭔가 기분이 찜찜하니까 일단 이 녀석은 제외다.
두 번째,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이 선택지를 실제로 보게 되니, 어쩐지 감개가 무량하다.
언뜻 사악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성좌는 사실 ‘악마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함정이다. ‘악마 같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결코 악마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여기에 ‘불’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결합한다. 악마가 아니면서, 불을 통해 심판을 행하는 자.
역설적이게도 이 성좌의 주인은 천사였다. 내 기억으로는 ‘대천사 우리엘’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작중에 이 성좌를 배후성으로 고른 인물이 있었다.
꽤 괜찮은 선택지이긴 하지만, 일단은 이것도 보류다. 절대선(絕對善) 계열의 성좌들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만큼 말도 안 되는 제약들이 있는 까닭이다.
세 번째, ‘은밀한 모략가’.
멸살법의 애독자인 나도 이런 선택지는 처음 보았다. 언뜻 지나가면서 거론된 성좌들 중 이 성좌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 ‘멸살법’을 좀 더 꼼꼼히 읽다 보면 뭔지 감이 올 것도 같은데.
확실한 건, 이 성좌의 주인은 그다지 강력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진명을 대체하는 관형사의 빈약함은 둘째 치고서라도, 고유명사의 사용이 전혀 없었다.
은밀한 모략가라니, 성좌를 표상하는 수식언으로는 지나치게 소박했다. 고로 이것도 보류.
마지막, ‘긴고아의 죄수’.
네 번째 선택지를 본 순간 나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성좌에게서 초반부터 푸시가 오다니. 몇 번이나 내 눈을 의심했지만 틀림없었다.
틀림없는 ‘긴고아의 죄수’였다.
언뜻 보기에는 ‘죄수’라는 말이 들어있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이 성좌는, 사실 ‘긴고아’라는 고유명사를 눈여겨 봐야했다.
긴고아(緊箍兒).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
어릴 적 서유기를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챌 수 있는 힌트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긴고아의 속박을 받는 죄수는 오직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죄는 족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화과산의 주인. 화안금정(火眼金睛)의 미후왕.
제천대성(齊天大聖) 손오공.
작중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중에도 이 제천대성의 후원을 받는 존재가 있었다.
여의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수백의 화신체들을 휩쓸고, 단 한 번의 뇌전으로 수천의 마물을 해치우는 경이로운 힘. 그 부분의 묘사에 작가가 힘을 잔뜩 줬었기에, 기억도 선명했다.
어째서 이 강력한 성좌가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천대성의 화신이 된다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수월하게 새로운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앞쪽 열차 칸과 연결된 문을 보았다. 저 문의 너머에서, 나와 같이 선택 화면을 보고 있을 ‘그 녀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만약 내가 ‘제천대성’을 택한다면…… 놈을 이길 수 있을까?
[배후성 선택 완료까지 1분 남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마지막으로 선택지를 훑어보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