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78화 자세히 보니 여자는 꽤 연배가 있어 보였다. 40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간간이 진 주름을 보니 적어도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얼굴. 나를 알고 있다고? 어떻게?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평정을 유지한 채 여자를 떠보기로 했다.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내 이름은 유중혁이다. 김독자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놈의 이름이지.” “······유중혁?” “그래. 그러니까 그쪽 하차자한테 전해.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으면, 일단 전하고 와.” 흘끗 옆을 보니 한수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치를 보냈다. 한수영이라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알 것이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김독자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불필요한 거짓말은 그만두지.”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한수영이 내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는, 내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왔다. “왕께서 말씀하시길, 이 운석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하셨다.” 뜻밖의 연속이었다. 나를 아는 걸로도 모자라, 이젠 운석을 우리에게 그냥 주겠다니······. “당신들은 누구지?” “우리는 ‘방랑자들의 왕’을 모시는 사람들이다.” “저쪽에 가면 쓴 여자가 당신들의 왕인가?”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가면을 쓴 장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고 있으니,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왕이라······. 당신들은 깃발이 없는 것 같은데?” “왕께서는 그런 시답잖은 물건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시답잖은 물건?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왕께서 네게 전하라 하셨다. ‘북쪽의 재앙은 우리가 맡겠다. 하지만 다른 네 개의 재앙은, 너에게 맡기겠다’라고.” 내가 뭔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여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기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돌아섰다. 한수영이 고함을 질렀다. “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똑바로 설명해주고 가야 할 거 아냐?” 고함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멀어져 갔다. 한수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뭐야 대체······, 너 혹시 저 여자랑도 아는 사이야?” “그럴 리가 있겠냐?” 나는 곧바로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등장인물 일람’을 업데이트하면 해당 인물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그새 또 업데이트 주기가 돌아온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일부 인물이 일람 사전에 추가됩니다.] 그리고 창이 떠올랐다. + <인물 정보> 이름 : 조영란 나이 : 37세 배후성(背後星) : 조선제일술사(朝鮮第一術士) 전용 특성 : 탈옥한 모범수 (일반), 정의 집행관 (희귀) 전용 스킬 : [감옥 탈출 Lv.3], [인내심 Lv.6], [집행의 시간 Lv.3], [사격 Lv.4]······. 성흔 : [둔갑술 Lv.2] 종합 능력치 : [체력 Lv.30], [근력 Lv.34], [민첩 Lv.36], [마력 Lv.28]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이것 봐라, 조선제일술사?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당신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설마, 벌써 ‘전우치(田禹治)’를 배후성으로 둔 여자가 있을 줄이야. 게다가 ‘심판자’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지만, 상당히 좋은 특성인 ‘집행관’ 계통의 클래스까지 보유하고 있다. 부하가 이 정도라면, 저 ‘왕’이란 자는 대체 어느 정도지? 나는 곧바로 장신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가면 속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찌릿한 통증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제4의 벽]이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계속 여자를 보고 있었다면 송민우를 만났을 때보다 더 커다란 진동이 찾아왔을 것이다. [자기합리화]가 있긴 해도 아직 성능을 확신할 수 없는 만큼 함부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한수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제4의 벽]이 반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는 이야기. 즉, 저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송민우보다 더 커다란 트라우마를 내게 심어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렇군······ 역시, 당신은 살아남았구나. 하지만 서울 안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토록 큰 세력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죄수복을 입은 이유도. 그 사람이라면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이윽고 방랑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열을 맞추어 자신들이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군. 세세하게 배어나는 절도에서, 지금껏 어떤 그룹에서도 볼 수 없었던 충성심이 느껴졌다. 대열의 선두에서 리더가 그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폭군왕 같은 왕관도, 미희왕 같은 용포도 없는 여자. 나는 그들이 쓸고 지나간 폐허를 보았다. 망가진 코인 농장들과, 그들이 살려낸 생존자들. 손수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담요와 생필품들이 생존자들의 곁에 놓여 있었다. 생존자들은 떠나는 방랑자들의 무리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잊고 있었다. 꼭 깃발이 있어야만, 혹은 왕좌에 앉아야만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왕이 없는 이 세계에도, 여전히 왕은 있었다. * 잠시 후,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노란색 운석]을 손보고 있었다. 노란색 운석. 달리 월장석(月長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운석은, 실제로 다른 차원을 맴돌던 별의 위성이었다. 과연, 책에서 봤던 그대로다. 손을 댈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마력이나, 불투명한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 그리고 운석 전체에 도드라진 흰 줄무늬까지. 분명 이 노란색 운석은, 재앙에 대항할 힘 중 하나를 품고 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월장석’이 당신에게 한 차원 높은 진화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나는 운석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운석이 다시 힘을 거두어갔다. 월장석은 기본적으로 밤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인외종들 또한 이 힘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 밤의 힘을 받은 식인종들은 보다 상위 인외종인 웨어 울프로 진화할 수 있었겠지. [‘월장석’이 당신에게서 알 수 없는 친근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운석의 진짜 용도는 단순히 인외종을 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웨어 울프 따위는 몇백 마리가 있어도 앞으로 다가올 재앙은 막을 수 없다. 물론 천 마리쯤 있다면 도움은 되겠지만, 그랬다간 들끓는 인외종들과 마왕의 권속들로 인해 또 다른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모처럼 봉사 활동하는 느낌이네······. 야, 뭔가 알아냈어?” 내가 운석을 살피는 사이, 한수영은 근처에 쓰러져 있던 생존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녀석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좀 의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코인을 노린 꼼수였다. [절대선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한수영’의 선행에 감동합니다.] 마왕이랑 척까지 진 마당이니, 후원금은 평소보다 뻥튀기되었을 것이다. 과연 인간의 양면성이란 심오한 것이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 중 심연의 흑염룡 뺨치는 녀석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배후 선택>이 다가오는 만큼 한수영도 슬슬 간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바타가 유용하긴 하네.” 수십 명의 아바타들이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외종들의 시체가 활활 타올랐고, 끔찍한 철창들과 인간 정육점들도 철거되었다. 저렇게 코피까지 줄줄 쏟아가며 코인을 벌고 싶을까 싶지만······. 쓰윽, 하고 피를 훔치던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언제 얘기해 줄 건데?” “뭘?” “아까 그거 말이야.” 나는 그녀의 물음이 운석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그거 신경 쓰고 있었어?” “그럼 신경이 안 쓰이겠냐?” 자기가 모르는 종류의 ‘하차자’가 둘이나 있다. 그런데, 그 두 하차자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있는 것 같다. 명색이 ‘마지막 하차자’인 한수영 입장에서는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 “아는 사람이야, 아마도.” “······아깐 모른다며?” “말 걸었던 여자 말고. 네가 말한 그룹의 리더 말야.” “방랑자들의 왕?”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사람은 하차자가 아냐.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은 원작을 읽은 적도 없을 거야.” “뭐? 그럼 어떻게 원작 내용을 아는 건데?” “내가 직접 이야기해줬어.” 한수영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재미없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해줬다고? 아니 왜?” “그 사람을 만나면 할 이야기가 필요했거든.” 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나한텐 그 얘기밖에 할 게 없었으니까.” 살짝 어두워진 분위기 때문일까, 나를 추궁하려던 한수영이 잠깐 멈칫했다. 아마 묻고 싶은 게 많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누구인지, 그리고 나와 그녀는 무슨 관계인지. 잠시 말이 없던 한수영은, 다시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랑 무슨 관계인진 모르겠지만, 그냥 둬도 괜찮은 거야? 우리 말고도 미래를 아는 녀석이 많아지면······.” 염려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고, 미래 정보를 이용해 함부로 난장을 피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월장석을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야. 지금부터 이걸 깨울 거니까.” “뭐? 이걸?” 한수영이 제정신이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지금 ‘재앙’을 깨우겠단 얘기야?” “뭘 그렇게 놀라? 너도 저질렀던 일이잖아?” 한수영은 <선지자들의 밤>에서 선지자들을 부추겨 화룡종, ‘레서 이그니르’를 깨운 적이 있었다. “야! 그 정돈 소재앙이지, 이건······.” “이건 재앙이 아니야.” “······그럼 뭔데?” “표절을 게을리 한 모양이네. 기억 안 나냐?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지 진짜 몰라?” 잠시 나를 노려보던 한수영은 스마트폰을 켜서 자신의 소설 텍본을 읽기 시작했다. “아······. 이거, 설마······.” “이제 찾았냐? 잘 베낀 모양이네.” “시끄러. 근데 아직 메인 시나리오 열리지도 않았는데 이런 짓 해도 괜찮아? 또 개연성 폭격 맞으면 어쩌게?” “이런 걸로는 안 맞아.” “중급 도깨비한테 미움도 산 마당에······.” “그러니까 그놈 없을 때 처리하잔 거지.” 지금쯤, 녀석은 한창 관리국에서 문책당하느라 바쁠 테니까. “지금부터 여기다 마력을 주입할 거야. 내 계산이면 부화까지 열 시간 정도면 충분해. 내가 네 시간, 그리고 네가 여섯 시간.” “왜 나만 여섯 시간인데?” “네 마력 레벨이 더 높을 거 아냐?” 그 순간 돌아다니던 아바타들의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눈치하고는. “솔직히 말해봐. 너 마력 레벨이 몇이야?” “꼭 말해야 돼?” “시나리오 클리어에 필요한 정보야.” [‘임시 서약서’의 조항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한수영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55레벨.”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아바타를 수십 개나 운용할 수 있는 걸로 봐서 40레벨은 넘는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55레벨이라니······ 거의 시나리오 제한 기준에 육박하는 수치다. 체력과 근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걸 보면, 지금껏 가진 코인을 죄다 마력에 몰빵한 모양이었다. “바꿔야겠네. 내가 2시간. 네가 8시간.” “야! 불공평하잖아! 그리고 나 지금 마력도 다 떨어졌다고.” 나는 비형에게 요청해 [도깨비 보따리]를 연 후, [중급 마력 회복의 물약]을 몇 개 구입했다. “그럼 이거 마시면서 해.” “뭐야 이건?” “코인템.” “······네 배후성 엄청 통 큰가 보다? 이런 거 나한테 막 줘도 돼?” “통은 내가 큰 거고.” 한수영이 나를 흘겨 보았다. “이상한 거 넣은 거 아니지?” “그럼 나 먼저 시작한다.” 나는 월장석에 손을 대고 곧장 마력 주입을 시작했다. 열 시간 뒤, 이 운석 안에서 깨어날 녀석을 떠올리면서.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야, 빨리 일어나! 이 녀석 움직이기 시작했어!” 운석에 손을 대고 있던 한수영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다. 쩌적, 쩌저적― 운석에 가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화룡종의 붉은 운석이 부서질 때와 비슷한 현상이었다. 그때처럼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말 한마디 까딱 잘못하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고오오오오! 월장석에서 일직선으로 솟아난 눈부신 빛이 밤의 어둠 일부를 밝혔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강력한 존재가 웅크림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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