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77화 Episode 16. 다섯 번째 시나리오 뚝뚝 떨어지는 송민우의 피가 바닥을 적셨다. 핏물로 흥건해진 주먹의 감각이 둔해졌다. 송민우는 가끔 꾸역꾸역 피거품을 흘릴 뿐, 눈을 뜨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부서진 녀석의 육체는 이제 수복을 포기한 듯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무서운 놈······ 웨어 울프를 손으로 때려잡냐?” 이미 근처의 웨어 울프들은 도망가거나 한수영에 의해 목이 달아난 직후였다. 나는 송민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직 죽진 않았어.” 이제 녀석을 봐도 [제4의 벽]은 흔들리지 않았다. 트라우마가 해결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의 기억에 내성이 생긴 것이겠지.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의 모습에 격려를 보냅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당신에게 자신의 성흔을 하사하고자 합니다.] 성흔을 준다고? 진짜? 이번 현상금 시나리오는 성좌 단일 의뢰도 아니었기에, 성흔을 보상으로 주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물론, 나야 고마운 일이지만. [성흔, ‘자기합리화(自己合理化)’를 습득하였습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자신의 성흔을 계승한 당신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당신은 이제 어떠한 트라우마에도 굴하지 않는 방어 기제를 갖추게 될 것입니다.] 고마운······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잠시 멍하니 있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배를 잡고 웃습니다.] 자기합리화? 이게 뭐라고 한자병기까지 되어 있는 건데? 지금 누구 놀리냐? 한수영이 물었다. “야, 그거 안 죽여?” “어?” “그거 말이야.” 뒤늦게 내 손아귀 안에서 덜렁거리는 송민우를 바라보았다. 죽여야 하나? 어차피 인외종이니 불살의 부담은 없다. [‘낭인 송민우’의 후원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죽이고 나면, 비형 채널의 성좌들도 좋아할 테지.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복수를 염원합니다.] 나는 잠시 송인우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녀석의 멱살을 놓았다. “그만 가자.” “뭐? 진짜?” “그래.”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위선에 실망합니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의문을 표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판단을 지켜봅니다.] “진짜로 안 죽인다고? 저 새끼 코인도 꽤 가지고 있을 텐데?” “그래.” “그럼 내가 죽여도 돼?” “그러든가. 하지만 후회할 텐데?” “후회?”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한 후 그녀를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갔다. 정확히 웨어 울프의 무리들이 달려왔던 방향으로. 아마 이 방향의 끝에, 녀석들의 본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예상이 맞다면 그곳에 이 녀석들을 웨어 울프로 변이하게끔 도와준 [운석]도 있겠지. 재앙 시나리오를 대비하기 위해 [운석]은 반드시 모아야 했다.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던 한수영이 내 눈치를 흘끗 보더니, 미심쩍은 기척을 냈다.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많아진다 싶더니, 소리들은 일제히 우리 뒤쪽으로 멀어졌다. 정확히 송민우가 있는 방향이었다. 아바타······. 그래. 한수영 너라면 그럴 줄 알았지. 나는 그녀의 욕망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가 내 위선을 눈감아주었던 보답으로. 그리고 잠시 후. “씨발! 이거 뭐야!” 한수영이 경련을 일으키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슨 메시지가 뜨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메시지가 떴을 것이다. [6급 인외종 ‘낭인 송민우’를 사살하여 마왕 ‘안드라스’가 살해자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마왕 ‘안드라스’는 권속 살해에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기억할 것입니다.] [마왕 ‘안드라스’는 자신의 권속들에게 최종 타격을 가한 화신체를 수배할 것입니다.] [최종 타격자 : 한수영] 망연한 얼굴로 나를 보는 한수영을 향해, 나는 역시나 씩 웃어주었다.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송민우는 72 마왕 중 하나인 ‘안드라스’의 권속이었다. * 72 마왕. 스타 스트림의 강자들 중에는 ‘성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저 하늘의 구독좌가 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육신을 가진 채 행성을 떠도는 강자들도 있다. 그런 초강자들 중 하나가 바로 ‘마왕’이었다. “넌 진짜 나쁜 새끼야.” 마왕들은 성좌들이 화신을 만들 듯 자신들의 ‘권속’을 구하는데, 주로 인외종이나 악마종의 길을 택한 타락한 화신들이 그 대상이 된다. 72마왕의 카스트 중 하위에 위치한 마왕 ‘안드라스’. 그의 상징 중 하나는 바로 ‘늑대’다. 송민우 녀석이 뛰어난 [육체 재생]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안드라스의 가호 때문이었다. 한수영이 더듬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걱정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너처럼 마왕의 저주를 받은 녀석이 있었는데, 곧바로 죽지는 않더라고.”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해?” 그러고 보니 한명오는 마왕 ‘아스모데우스’의 저주를 받았었는데······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아직 살아는 있으려나? “좋게 생각해. ‘안드라스’는 그다지 고위급 마왕도 아니잖아. 마왕과 적이 되면 절대선 계통의 호감을 얻을 수 있으니까 후원금도 많아질 거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천사 녀석들한텐 관심 없거든? 게다가 내가 고를 배후성은 천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왜, 너도 마왕이라도 고르게? 무심코 그렇게 물으려다, 뭔가 기묘한 느낌에 도로 입을 다물었다. ······방금 이 녀석이 뭐라고 말했지? “네가 ‘고를’ 배후성은 천사들과 사이가 안 좋다고?”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수영이 자신의 입을 짚었다. “젠장, 이놈의 입이······.” “너 설마 아직도 배후성이 없는 거냐?”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역시 배후성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사실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어영부영 살아남은 사람들 중 태반은 배후성이 없을 것이다. 정확히는 ‘고를 선택지가 없었다’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러나 한수영 같은 강자가 아직 배후성이 없다는 것은 뜻밖의 정보였다. “못 고른 게 아니라 안 고른 거야. 처음부터 선택지 고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한 번밖에 못 고르는 건데.” “뭐, 그건 그렇지.” <배후 선택>은 뒤로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는 게 좋다. 좋은 성좌는 얼마든지 있고, 시나리오 활약 여부에 따라 말 그대로 ‘똥차 가고 벤츠 오는’ 사태가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니까. <배후 선택> 이벤트는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난 직후에 한 번, 이후엔 ‘재앙 시나리오’들이 발생하기 직전에 규칙적으로 시행된다. 다섯 번째 시나리오는 ‘재앙 시나리오’니까, 아마 한수영은 곧 있을 2회차의 <배후 선택>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근데 누구 고르려고? 생각해 둔 성좌라도 있어?” 내 말에 한수영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알면 깜짝 놀랄걸? 이미 나한테 관심도 보였거든.” “누군데 그래?” 혹시 ‘제천대성’이라도 뜬 건가? “‘심연의 흑염룡’이라고 들어봤냐?” ······무슨 흑염룡?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반응을 살핍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 그래. 잘 생각했네. 좋은 배후성이지.” 원작의 일부 회차에서 ‘망상악귀 김남운’의 배후성을 자처했던 이가 바로 저 ‘심연의 흑염룡’이었다. 망상악귀면 강철검제와 함께 최강을 다투는 조연 중 하나였으니, 실제로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복잡한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 새낀 이제 나한테 관심 없다더니 희한한 놈이네 진짜. 내 무심한 말투에 한수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뭔가 찝찝한 얼굴이다, 너? 넌 배후성이 누구길래 그렇게 틱틱대냐?” “아냐, 아무것도. 그냥 부러워서 질투한 거야.” “진짜로?” “진짜로.” [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을 발동 중입니다.] [인물 한수영은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뒤질래, 진짜?” 무려 ‘심연의 흑염룡’이라니. 그녀가 꼭 배후성을 얻기를 바랄 뿐이다. 한수영과 쿵짝도 아주 잘 맞을 테니까. [하렘을 좋아하는 한 성좌가 당신과 ‘한수영’의 케미를 응원합니다.] [5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나랑 똑같은 메시지를 들었는지 한수영이 얼굴을 구겼다. “이건 또 뭔······.” 안타깝지만 저 하렘 성좌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한수영과 내가 함께하는 것은 앞으로의 10일에 한정된다. 잠깐 협력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위협적인 적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도착한 것 같은데.” 잠시 후, 우리는 웨어 울프들의 본진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다다랐다. 방배역 인근. 좁다랗게 붙어선 빌딩 숲 사이로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는지, 멀리서 웨어 울프의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한수영이 말했다. “조금 늦은 것 같네. 선객이 있나 봐?” 웨어 울프들이 모두 어디론가 이동했는지, 보초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자, 윤 대리가 설치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농장이 나타났다. ‘코인 농장’은 멸망한 세계의 전유물. 나는 이제 지겹도록 이런 광경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미 코인 수확이 끝났는지, 철창 속에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앞서 나가던 한수영이 갑자기 코를 틀어쥐었다. “우웩, 저건 또 뭐야?” 철창들을 지나 웨어 울프들의 거주 구역으로 향하자, 더욱 끔찍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잘려나간 인간의 허벅지가 고무줄에 매달려 있었다. 마치 정육점에 걸린 돼지고기처럼, 용도가 너무나 분명한 부위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적 충격을 상쇄합니다.] 이런 장면은 텍스트로나 읽었지, 나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보통의 인간이 인외종으로 진화할 방법은 정해져 있다. 식인(食人). 즉, 자신의 동족을 포식하는 것. 한수영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씨발 새끼들······.” 대부분의 인외종은 우발적으로 진화한다. 보통 ‘식량 찾기’ 서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지 못한 이들이 이런 길을 걷게 되는데, 한 번 인외의 길을 걷고 나면 누구도 멈출 수가 없다. 종이 바뀐 이들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 더 이상 자책감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너도 이런 걸 보면 화가 나긴 하는 모양이네.” “당연하지. 화 안 날 사람이 어딨어?” “다른 선지자들이 그러던데. 넌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생각뿐이라고.” “누가 그래?” 한수영이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표절 시비 걸렸을 때만큼이나 어이없는 소리네.” “······.” “세계 지배? 하면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일단은 멸망을 막는 게 첫 번째 목표라고. <사도>들을 괜히 모은 줄 알아?” “그 <사도>들, 죄다 쓰레기던데.” “걔들은 원래부터 쓰레기였어! 그게 내 잘못이냐?” 탕! 탕! 탕! 탕! 우리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앞쪽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 살점들이 과육처럼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타앙! 아무리 생각해도, 이 소리는 총성(銃聲)이다. 군대는 이미 전멸했을 텐데? 우리는 건물들을 돌아 총성 쪽을 향해 달려갔다. 설령 군대가 남았다고 해도 총으로 웨어 울프를 상대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하지만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말이 안 되는 얘기를 말이 되게 바꾸어 놓았다. 산처럼 쌓인 웨어 울프들의 시체가, 눈앞에 있었다. 총탄에 맞은 시체들의 피부는 모두 새카맣게 변색 되어 있었다. 나와 한수영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속성탄.” “총탄에 신성력을······?” 멀리 이쪽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죄다 현대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다들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한수영이 긴장하며 내 옷깃을 붙잡았다. “야, 전에 ‘서대문 형무소’ 쪽에 너 같은 년 하나 있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어.” “저거, 그 년 세력이야.” 한수영이 가리킨 곳에 가면을 쓴 여자가 있었다. 얼굴을 비롯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서, 어깨 아래로 늘어진 긴 머리가 아니었다면 성별조차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쟤가 리더야. 성장세나 하는 짓을 보면 하차자가 분명한데, 나한테 아무런 정보가 안 떠.” 그런가. 저들이 한수영이 얘기했던 ‘서대문 형무소’의······. 근데 왜 저만한 세력이 왕좌 쟁탈전 때는 보이지 않았지? 한수영이 늘어진 웨어 울프의 산을 보며 입을 열었다. “쟤들도 방랑자야. 꽤 강력한 방랑자들인데······ 지금 막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방랑자들이 됐네.” 반대쪽에서 총을 든 여자가 이쪽을 향해 곧장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수영이 말한 리더는 아니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빼 들었고, 한수영은 [아바타]를 준비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여자의 총구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흠칫 허리를 숙이는데, 그녀의 총구가 웨어 울프의 시체 산을 향했다. 두두두두두! 내갈긴 총탄에 맞은 시체들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시체 아래에 숨어 있던 뭔가가 드러났다. “저건?” 가로세로 약 2미터 크기의 빛나는 돌. ‘재앙’ 을 막기 위해 우리가 찾던 운석들 중 하나. [노란색 운석]이 그곳에 있었다. 역시 저 ‘운석’이 웨어 울프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었던 모양이다. 우리와 함께 운석을 바라보던 여자가, 천천히 내 쪽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김독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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