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74화 철제 우리에 내던져진 한수영이 맥없이 뻗었다. 비동에서 내게 깃발을 빼앗긴 후, 아마 마력이 다해 기절한 모양이었다. 이 근처로 이송된 걸 보면, 한수영도 근방에 연이 있었던 거겠지. 작가였으니까 매니지먼트나 출판사가 근처에 있었을 수도 있겠다. “꽤 반반하잖아? 야, 벌써 건드린 거 아니지?” “아무렴. 성좌들 죄다 여기 몰려 있는 거 아는데.” [음란과 외설을 좋아하는 성좌가 흥분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음탕한 눈을 반짝입니다.] 벌써부터 가위바위보를 하는 놈들도 있었다. 나는 철창 속의 한수영을 노려보았다. 찢어진 청바지와 셔츠. 아무리 봐도,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살려두면 걸림돌이 될 여자였다. 이 세계에서, 나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역사를 아는 여자니까. 이야기의 분기가 3회차나 4회차와는 완전히 바뀌어버려서, 그녀가 아는 지식은 상당 부분 쓸모 없어졌겠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는 스스로의 역겨움에 소스라쳤다. ······왜 이딴 고민을 하고 있지? 누구는 앞으로 위험하니까 죽여야 하고. 누구는 앞으로 도움이 되니까 살려야 하나? 나는 유중혁이 아니다. “독자 씨도 할래?” 내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윤 대리가 웃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너라고 어쩔 수 있겠냐’하는 표정. “하나만 약속해주면 독자 씨가 먼저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무슨 약속이요?” “그룹이 있는 상태지? 독자 씨네 그룹을 소개해 줘. 우리도 슬슬 세력 확장을 시작할까 해서 말이야. 보니까 독자 씨 아이템도 제법 갖춘 것 같고······ 거기 꽤 큰 그룹인가 봐?” 나는 윤 대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원하신다면 소개해드릴게요. 그런데 저거, 이쯤에서 그만뒀으면 합니다.” “응? 하하, 독자 씨. 지금 무슨 소리야?” “저 여자 풀어주라고요.”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윤 대리의 눈썹이 꿈틀댔다. “흠······ 독자 씨. 잘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 여기까지 살아남았으면 벌써 뻔한 거잖아?” “······.” “내가 독자 씨 얼마나 오래 봐 왔는데. 난 독자 씨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줄 알고 있었다고.” 히죽 웃는 윤 대리의 입꼬리에 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늘 혼자서 웹 소설 보고 있었지? 항상 음침한 패션으로 출퇴근하고. 가끔 이야기하는 사람도 나나, 같이 입사한 동료 몇 명이 전부였잖아. 그나마도 유상아 씨처럼 착한 사람이나 그랬지.”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독자 씨도 속으로는 지금 이 상황 즐기고 있잖아. 안 그래?” 즐기고 있다? 그 말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윤 대리는 내 어깨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독자 씨랑 똑같아. 우리 같은 QA팀이었잖아. 매번 같은 잔소리 듣고, 모욕감 속에서 살았잖아. 다른 부서에서 우리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지? 마루타 팀이라고. 겨우 게임 테스트나 하는, 스펙도 없는 싸구려 인력이라고.” “······.” “독자 씨. 지금 저기 갇혀 있는 놈들, 정말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잘 봐. 우리 무시하던 그 새끼들이야.” 순간 시야가 넓어지며, 사람들의 비명이 크게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그랬다. 철창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의 상당수는, 내가 알던 미노 소프트 사람들이었다. 내가 잘 모르던 사람들. 마찬가지로 나를 잘 모르던, 혹은 몰라도 상관없었던 사람들. “이제 다 끝났다고. 재무팀이든, 기획팀이든, 뭐였던 간에.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유리한 건 우리 QA팀이야. 하하. 독자 씨도 버그 테스팅 오래 했으니 잘 알잖아? 이 세계는 게임이야. 버그투성이인 게임. 너무 허점이 많아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거든.”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무수한 성좌들의 메시지. 보다 자극적인, 보다 음탕한, 보다 퇴폐적인 이야기를 원하는 그들의 메시지가, 윤 대리의 얼굴 위에 조용히 겹쳐졌다. 어떤 열등감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무서워할 거 없어.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게임이니까! 저걸로 우리 그룹이 하루에 몇 코인이나 벌어들이는지 알아?” “모릅니다.” “하루에 무려 5천 코인이야. 5천 코인······ 상상이나 가? 아무 시나리오도 안 깨도 5천 코인이 들어온다고. 사람 몇 싸우게 만들고, 교배시킬 뿐인데 무려 5천 코인. 기획팀에서 캐시 아이템 찍어내던 거랑 똑같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너부러진 한수영을 향해, 하나둘씩 다가가는 남자들이 보인다. 나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한때나마 나와 옥상의 한숨을 공유해주었던 동료에 대한 예의였다. 나는 내 어깨에 놓인 윤 대리의 손을 치우며 입을 열었다. “코인을 벌고 싶으신 거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뭐?” 윤 대리가 반색했다. “혹시 독자 씨도 ‘버그’를 찾아낸 거야? 뭔데?” “원리는 ‘코인 농장’이랑 같습니다.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성좌들을 이용하는 거죠.” “오호, 이것보다 더 자극적인 게 있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네, 있습니다. 알려 드릴까요?” “노하우 공유하면 나야 좋지!” “성좌들이 진짜 좋아하는 건······.”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이런 겁니다.” 카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수깡처럼 잘려나간 철창들. 나는 철창을 둘러싼 방랑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도망갈 다리를 자르고,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반항할 채비조차 하지 못한 사내들의 무릎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으아아아악! 뭐야 이 새끼!” “내 발! 내 발!” 거칠게 솟아 오르는 핏줄기 속에서, 나는 계속 검을 휘둘렀다. “이런 것도.” 인사팀의 직원을 희롱하던 손을 잘라냈고, 한수영의 셔츠를 벗기던 놈의 팔을 베어냈다. “그리고, 이런 것도 좋아하죠.” 푸슛, 하고 튀어 오른 피가 뺨에 묻었다. 나는 조용히 피를 닦아낸 후 팔을, 다리를, 계속해서 잘랐다. 윤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슨 짓이야!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맙다는 얘깁니다.” 나는 윤 대리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좌들이, ‘진짜로 좋아할 만한 상황’을 만들어 주셔서.” 스가각! 서걱! 단 두 번의 칼질로, 한수영의 철창 안에 들어온 사내들 중 멀쩡히 서 있는 녀석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기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가차 없는 응징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일부 성좌들의 만행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상당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판단에 크게 만족합니다.] [8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윤 대리가 하얗게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뭐하러 농장 같은 걸 만듭니까? 코인 벌기가 이렇게 쉬운데.” “······이, 이 새끼 조져!” 방랑자들의 숫자는 많았다. 순식간에 대열을 갖춘 이십여 명의 방랑자들이 어느새 병장기를 갖춰든 채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왔다. ‘불살’의 원칙을 어기지 않고 해치우기 애매한 숫자였지만,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여차하면 몸을 빼면 되니까.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서며, 한수영의 가벼운 몸을 안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왜 나를 구해?” “깨어 있었냐? 그럼 네 발로 좀 일어서라.” 한수영이 힘없는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날 구하면 네 채널 성좌들이 죄다 달아나 버릴걸? 성좌들 암 걸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모르냐?” “좋아하는 녀석들도 있어.” [하렘을 기다려왔던 한 성좌가 조심스레 양손을 모읍니다.] [‘적의 적은 아군’을 주장하는 한 성좌가 기뻐합니다.] 한수영의 인상이 구겨졌다. “지금 이거 클리셰야. 알지? 미소녀가 범해지려는 순간, 주인공이 구해주는 클리셰. 클리셰 싫어한다면서, 말이랑 행동이 다르네?” “일단 네 말에 틀린 게 두 가지 있는데.” 나는 달려드는 방랑자의 다리를 가볍게 베어 넘기며 말했다. “하나,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 그리고 둘은······.” [당신은 동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가 1 상승합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14/100] 카르마 포인트는 시스템이 해당 인물을 ‘구했다’고 판단했을 때 상승한다. 즉, 내가 내버려뒀다면 한수영은 그대로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넌 미소녀가 아니야.” “······이거 내려놔!”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바닥에 내던졌다. 한수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진짜 내려놓냐?” “너도 싸워.” “뭐?” “같이 싸우라고. 넌 클리셰 좋아하잖아?” “내가 아무리 클리셰를 좋아해도, 적이었던 상대가 같은 편 돼서 싸우는 거는 진짜, 너무 진부하거든?” 투덜거리는 것치고, 우리는 꽤 합이 잘 맞았다. 내가 다가오는 방랑자들의 다리를 베면, 뒤따라 붙은 한수영이 놈의 숨통을 끊었다. 그렇게 차분히, 하나씩 목숨을 끊고 나자 어느새 남은 녀석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방랑자들이 코인 농장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개이득이네.” 방랑자들을 죽이고 얻은 코인을 보며, 한수영은 비틀거리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총 184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공헌도가 있으니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도 꽤 짭짤한 코인이 들어갔을 것이다. 아깝지만, 한수영이 없었더라면 나도 코인을 얻지 못했을 테니 그냥 수고비라 생각하기로 했다. 앞쪽을 보니,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윤 대리가 보였다. “하하······ 사이코패스 새끼. 역시 이런 놈일 줄 알았어. 그 소문 돌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뭐래 병신이. 단역 새끼가 말이 많네.” 순식간에 다가간 한수영이 곧장 윤 대리의 목을 찔렀다. 윤 대리의 목에서 꿀렁거리는 핏줄기가 솟더니, 이내 눈동자의 빛이 죽었다. 현실의 ‘김독자’를 기억하던 또 한 사람이, 그렇게 사라졌다. 나를 보던 한수영이 툴툴거렸다. “······그 표정 뭔데? 이 새끼 죽으니 아쉬워?” “아니.” “그럼 뭐하러 상처받을 말을 계속 들어주고 있어?” 한수영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말이라, 조금 놀랐다. “아까도 이 자식 헛소리하는 거 죄다 들어주고 있더만? 그딴 걸 왜 듣고 있냐? 성좌들은 그딴 고구마 안 좋아해, 인마.” 멍하니 이야기를 듣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 얘기였나? “너야말로 뭘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헛소리들은 적당히 들어준 뒤 죽여야 코인을 더 많이 줘. 고구마 없는 사이다는 없는 법이거든.” “아니거든? 독자들은······ 아니, 성좌들은 바로 죽이는 거 더 좋아하거든? 작가도 아닌 게 뭘 안다고 큰 소리야?” “더 잘 알지. 난 독자니까.” “이······!” 나는 으르렁대는 한수영을 뒤로 하고, 떨어진 아이템들을 하나씩 뒤적거렸다. 대부분은 쓰레기였지만, 입을만한 수트도 하나 나왔다. [늙은 신사의 단벌 수트] B등급 아이템인데다 방어력 향상도 미미했지만, 그래도 안 입는 것보단 나았다. [사명대사의 거적]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도 없고······ 그러고 보니 슬슬 아이템 파밍도 겸해야 하는데. 멀찍이 달아나는 방랑자들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저 방향이 놈들의 소굴인 듯했다. 어차피 방랑자들과 부딪칠 거, 차라리 잘 됐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초구에서는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사용할 ‘운석’ 몇 개를 입수할 수 있다. 기왕 이곳에 떨어진 거, 그거나 구하면 되겠지. 일단은 보조 배터리부터 좀 구해야······. [당신은 동족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가 11 상승합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25/100]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모두, 철창 속에 갇혀 있던 이들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말을 걸기 전에, 손사래를 쳤다. “이제부턴 못 도와드려요. 알아서들 살아가세요.” 희미한 절망이 그들의 동공을 스쳐 갔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냉정한 처사 같지만 결국 자기 목숨은 자기가 구해야 한다. “아이템 다 안 주웠으니까 적당히들 챙기시고, 여유가 되면 충무로 쪽으로 가봐요.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허겁지겁 떨어진 아이템들을 줍기 시작했다. 오직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람들의 눈동자는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순간 도깨비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놨는지 이해했다. “그거 내 거야! 내려놔!” “제, 제가 먼저 집었어요!” 방금 전까지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어느새 서로를 보며 병장기를 쥐고 있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서로를 겨눴고,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이 왕이 없는 세계다. 누구도, 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세계. 도깨비 녀석은 이 광경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왕이 없는 세계가 얼마나 야생에 가까운지, 본래 우리가 지켜왔던 법과 윤리, 인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부실하고 형편없던 것인지. 병기를 휘두르려던 사람들을 멈춘 것은, 뜻밖의 목소리였다. “너네, 다 뒈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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