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69화
나는 녀석의 잘려나간 머리를 집어 들며 물었다.
“역시 이것도 ‘아바타’였군. 한수영은 네 본명 맞냐?”
“그래.”
예상대로, 한수영은 ‘첫 번째 사도’였다.
망할 표절 작가 자식, 어디 숨어 있나 했더니.
“저, 저 자식 뭐야!”
곳곳에서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경악성을 질렀다.
배신이라는 둥, 내분이 일어났다는 둥 당황한 목소리들. 나는 유상아와 이길영을 지키며, 비동의 한쪽으로 물러났다.
물론 한 손에는 한수영의 말하는 머리를 쥔 채로.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계시록의 ‘텍본’을 뿌린 건 네놈이었어. 그렇지?”
“맞아, 정확히는 네 ‘표절 소설’의 텍본을 뿌렸지.”
“······계시록은 표절이 아니다.”
“표절이지. 원작 설정을 그대로 가져다 썼잖아?”
“내 작품을 그딴 졸작에 비교하지 마.”
“내 말을 알아듣는 걸 보면 그래도 원작을 읽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네?”
한수영이 으드득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모두 이놈을 죽여! 뭣들 하는 거야!”
“머, 머리가 말을 한다!”
한수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난 소란에도 사람들은 당황할 뿐, 뚜렷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곧, 우리에게 신경 쓸 틈도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네가 말한 클리셰가 시작될 거야.”
기다렸다는 듯, 비동의 앞쪽에서 터져 나오는 빛.
빛의 고리 같은 것이 주변을 스쳐 가더니, 몇몇 사람들의 몸에 긴 혈선(血線)이 생겼다.
“뭐······.”
푸슈슈슛!
핏줄기를 내뿜으며 통째로 갈라지는 육편들. 대열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피벼락을 그대로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젠장, 놈이다!”
검은 비동의 안쪽에서 일렁이는 사이한 마력. 비동 전체를 압박하는 존재감이 앞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가마를 들어라.”
중성적인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가마의 첨단이 보였다. 가마 속에서 일렁이는 누군가의 그림자.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유상아 씨, 길영아! 뒤로 물러서!”
가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려라.”
가마가 전차라도 되는 양 사람들을 치받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휘장 속에서 나온 삼색 빛의 고리들이 무자비하게 전장을 휩쓸어 댔다. 수십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 나갔다.
불신 어린 눈빛으로 피거품을 문 사람들과, 팔다리가 사라진 채 꿈틀거리는 신체들. 전열의 앞쪽은 순식간에 휑해졌다.
“으아······.”
공포에 질린 그룹원들이 물러섰다.
몰아친 정적에, 모두가 쥐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폭군왕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정말이지 보잘 것 없구나. 선대의 왕들이란······.”
그의 손에는 응축된 마력의 고리를 날릴 수 있는 아이템인 [삼륜환(三輪環)]이 쥐어져 있었다. [삼륜환]은 서울 북부에서 구할 수 있는 히든 아이템이지만, 본래의 폭군왕이 가지고 있던 물건은 아니었다.
<선지자들>의 일부를 데리고 있다더니, 정말인 모양이군.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정용후
나이 : 33세
배후성(背後星) :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전용 특성 : 서커스 단원 (희귀), 폭군왕 (영웅)
전용 스킬 : [잡기 연마 Lv.5], [헌천보(憲天步) Lv.3], [무기 연마 Lv.5]
성흔 : [가마전차 Lv.5], [처용무(處容舞) Lv.5], [폭정(暴政) Lv.4]
종합 능력치 : [체력Lv.30], [근력Lv.28], [민첩Lv.28], [마력Lv.34(+2)]
종합 평가 : 한반도 최악의 폭군이 한을 품은 소시민을 만났습니다. 평소 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은 소시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 스타터팩을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성장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 현재 신규 시나리오 기념 패키지를 적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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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특성창을 보니 이해가 간다.
패키지를 벌써 세 개나 뜯었으니 저렇게 강할 수밖에.
위험할 정도로 개연성 외줄타기를 좋아하는 성좌다.
고오오오······!
거기다 전신에서 일렁이는 저 아우라. 폭군왕의 배후성은 동조율을 한계치까지 높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비형을 비롯한 몇몇 도깨비들 허공에서 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개연성’에 위배된다 싶으면 「개연성 적합 판정」을 요구할 셈이겠지.
“나는 분명 폭군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폭군이었던 나는 없다.”
폭군왕,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 말한다.
“역사는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이 땅의 새로운 역사가 될 테니까.”
한반도 탑 클래스의 폭군인 그는, 역사에 ‘왕’으로 기록되지 못했다.
“나는 연산군 이융(李㦕)이다!”
동조율이 한계치에 달한 폭군왕에게서 엄청난 마력이 터져 나왔다.
달려가던 그룹원들의 배가 모조리 터졌다. 무려 30이 넘는 마력이 휘감긴 [삼륜환]. 저건 내가 맞아도 위험하겠는데.
“물러서지 마라!”
“모두 싸워라!”
하지만 반 폭군 동맹도 만만치 않았다.
다른 왕들은 그렇다 쳐도, [토룡왕]과 [미륵왕]은 어쨌든 [폭군왕]과 같은 서울 7왕이다.
여러 왕들이 합심하자, 불리하던 전황도 조금씩 비등해져 갔다. 왕들은 모두 자신의 배후성과 동조율을 거의 한계치까지 높이고 있었다.
화신들뿐만 아니라, 위인급 성좌들도 모두 필사적이었다.
나는 손에 쥔 한수영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안 싸울 거냐?”
내 말에 한수영이 흐흐, 웃었다.
“웃어? 아직 여유가 있나 보네.”
“네놈······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연산군과 다른 왕들이 싸우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지치면 네가 사인참사검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
제법 근사치에 가까운 추리군.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다! 텍본을 뿌린 수는 제법이었지만, 나는 네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오늘을 준비해 왔으니까.”
“무슨 헛소리야?”
“결국에는 ‘클리셰’가 이긴다는 얘기다.”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다들 잘 싸우고 계시는군요. 우리 위인급 성좌님들, 아주 필사적이신데요? 암, 그래야죠. 화신들도, 성좌님들도 힘내야죠. 다들 설화급으로 올라가고 싶으시잖아요?]
이죽거리는 도깨비의 목소리에, 일순 전장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부터, ‘두 번째 자격’ 시험이 시작됩니다!]
+
<왕의 자격>
1. 「왕좌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용맹할지니」
― 절대 왕좌는 결코 ‘약한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 도전하기 위해, 당신은 최소 [검은 깃발]을 소유한 왕이어야 합니다.
2. 「왕좌를 꿈꾸는 자는 그 욕망에도 자격이 있으니」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도전권을 얻기 위해, 당신은 주변의 다른 왕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
중급 도깨비가 스산한 미소로 웃었다.
[참고로 절대 왕좌의 마지막 자격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은 오직 5명뿐입니다. 지금 남은 숫자는····· 어디 보자.]
[현재 남은 왕의 수 : 14]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여, 열넷이나 된다고?”
“바깥에 아직 왕이 남았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재 ‘히든 던전’ 내부에 있는 왕은 총 12명입니다.]
나도 조금 놀랐다. 이 던전에 그렇게 많은 ‘왕’이 있을 줄이야.
하긴, 이 ‘비동’에만 왕이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누구냐? 숨어 있는 왕이 누구야!”
폭군왕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비웃었다.
“하하하! 서로 뒤통수를 쳐대는 꼴들이 아주 우습구나!”
“지금은 내분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폭군왕한테 집중해!”
왕들의 조정으로 간신히 술렁임이 회복되려는 그때.
“여기다! 이놈이 왕이다!”
손에 쥐고 있던 한수영의 머리가 멋대로 외쳐댔다.
“내가 봤다! 이놈이 ‘깃발’을 가지고 있다!”
“뭐?”
······이것 참.
나는 재빨리 한수영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죽어야 할 ‘나머지 왕’ 중 하나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저놈만 죽이면······.”
그런데 느낌이 싸했다.
표절 작가 녀석의 계략이라기엔, 수가 너무 얕다고나 할까.
잠깐만, 설마?
······재밌군. 그런 생각이었나?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사이, 왕들의 뒤쪽에서 은밀하게 움직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들이 아끼던 충신들이었다.
푹! 푸욱!
“커헉······!”
얇은 소도가 등을 찌르고, 방심한 왕의 목을 갈랐다.
[남은 왕의 숫자가 감소합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12]
체력이 떨어져 있던 [소심왕]과 [박투왕]이 절명했고, [미륵왕]과 [토룡왕]도 기습에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했다. 심지어 저 [폭군왕] 조차 뒤에서 달려든 세 명의 시비에게 옆구리와 허벅지를 찔렸다.
“이 비천한 년들이······!”
그리고 나는, 그들을 동시에 찌른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배신한 인간들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으나, 떨어진 그들의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떨어진 왕들의 별보석들이, 손이 빠른 누군가에 의해 사라졌다.
“보석! 내 보석!”
숨어 있던 [아바타]들의 손을 타고 움직인 ‘별보석’들은, 이윽고 한 사람의 손에 모두 쥐어졌다.
“내가 말했잖아. 결국은 클리셰가 이긴다고.”
허공을 밟고 날아오른 한 미소녀가, 비동의 벽감에 서서 히죽 웃었다.
설마 저게 ‘표절 작가’ 녀석의 본체였나?
······여자일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손에서 모인 일곱 개의 별 보석이 빛을 내뿜었다.
[‘가짜 왕’ 한수영이 일곱 개의 별보석을 모두 획득하였습니다!]
[일곱 개의 별보석을 제물로, 새로운 아이템을 소환합니다.]
[‘가짜 왕’ 한수영이 ‘사인참사검’을 소환하였습니다!]
결국, 표절 작가 놈이 ‘사인참사검’이 주인이 되었다.
거기다 [가짜 왕]이라.
놀랍게도 잘 어울리는 특성이구만.
“독자 씨. 어떡하죠?”
“아직은 괜찮습니다.”
내 무덤덤한 말에 유상아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태연해도 괜찮을까요? 저거 엄청나게 좋은 아이템이라면서요.”
맞다. 실제로 S+급의 아이템이니까 좋긴 좋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연산군의 [삼륜환]도 무려 S급 아이템이다.
성능 차이는 좀 나지만, 그렇게 꿀리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하하하핫! 죽어! 죽으라고!”
사인참사검에서 뿜어져 나온 눈부신 마력이 전장을 휩쓸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죽지 않았다. 통쾌하게 터져 나갈 줄 알았던 사람들은, 위태로웠지만 그녀의 마력을 꾸역꾸역 받아냈다.
[아바타]를 다량으로 사용한 탓에 그녀의 마력이 많이 떨어져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직 세 명의 왕이 건재한 까닭이었다.
당황한 한수영이 외쳤다.
“뭐, 뭐야 이거? 왜, 왜 이렇게 약해······?”
“죽여라! 저년을 죽이고 검을 빼앗아!”
“으, 으아아앗! 물러서! 물러서라고!”
왠지 저렇게 될 것 같았다.
어느새 밀려난 한수영이 나와 내 일행이 있는 곳까지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내가 이죽거렸다.
“클리셰 잘 깨네. 평소에도 그렇게 좀 쓰지.”
“닥쳐!”
“도와줄까?”
“필요 없다!”
호기롭게 외친 한수영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점점 밀려나는 게 보인다. 바보 같은 여자한테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 무기가 유명한 건 그 무기가 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기의 본래 주인이 강해서였다고.
“그만 모두 죽여주마!”
자신감을 되찾은 폭군왕이 공격을 개시했고, 다른 왕들도 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전투는 적도 아군도 없는 난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설마 아직도 헤매고 있는 건가?
여기서 북구 지역까지 거리가 좀 있긴 해도, 그 녀석이면 충분히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현재 남은 왕의 수 : 11]
그리고, 허공에 떠오른 알림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10]
아, 역시.
[현재 남은 왕의 수 : 9]
오셨구만.
“뭐, 뭐야!”
“갑자기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공포에 질린 왕들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누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줄어드는 ‘왕’의 숫자.
[현재 남은 왕의 수 : 8]
마침내 숫자가 한 자리로 줄어들자, 왕들의 공포는 한계치에 달했다.
“누군가가 있다! 누군가가 왕만 죽이고 있어!”
반면, 오히려 즐거워하는 녀석도 있었다.
폭군왕이었다.
“하하하! 알게 뭐냐! 너희도 죽어라!”
폭군왕의 [삼륜환]이 다시 불을 뿜으려는 순간, 비동의 천장이 무너지며 폭군왕이 그대로 깔렸다.
콰아아아앙!
가공할 마력의 폭풍이 몰아쳤고, 그 아래에 깔린 폭군왕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모든 생명체를 입자 단위로 분해시켜 버리는 엄청난 양의 마력 폭풍이 폭군왕의 전신을 그대로 으깼다.
“으으······ 아아······ 으아아아악!”
그리고.
[현재 남은 왕의 수 : 7]
냉혹한 숫자만이, 사람들의 눈앞에 남았다.
비정상적인 정경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뭐, 뭐야. 뭐냐고!”
그 무서운 [폭군왕]을 단 한 방에, 벌레처럼 터뜨려 죽인 사내.
매캐한 폭연 속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왕도, 살아남은 왕도.
모두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리를 떨던 한수영이 공포에 질려 물러섰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문득 그녀의 아바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서울의 왕들 중 최강이 ‘폭군왕’이라고 했었지.
아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서울 7왕은, <선지자들>로 인해 왕이 되지 못했던 한동훈을 포함해서 총 5명이었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미희왕 민지원.
미륵왕 차상경.
토룡왕 구태성.
그리고 폭군왕 정용후.
여기서 아직 등장하지 않은 ‘중립의 왕’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자리는 하나가 빈다.
그렇다면 남은 한 자리는 누구의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사실, 나는 그 어떤 왕보다도 이 녀석을 먼저 만났으니까.
분노한 놈의 목소리가 비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
“김독자······.”
나는 미소하며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녀석의 등 뒤에서 흩날리는 [검은색 깃발].
“넌 뒤졌어······.”
서울 7왕 중 최강은, 당연히 패왕(霸王) 유중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