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68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외눈 법복의 사내.
하필 제일 처음 만나는 ‘서울 7왕’이 이 녀석일 줄이야.
유상아가 그룹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독자 씨, 저 사람 혹시······.
―네, 맞는 것 같습니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상아.
하긴, 저 외양을 보고서 나랑 같은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겠지.
―그런데 이해가 안 가네요. 설령 성좌가 ‘그 사람’이더라도, 왜 화신이 저런 복장을 하고 있을까요?
―성좌와의 동조율이 높은 축인 것 같습니다. 동조율이 높아지면 성좌의 생전 취향에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저 사람 앞에서 절대 기침하면 안 되겠네요.
말총머리가 법복 사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왕이시여. 오셨나이까.”
“그래.”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말할 필요 있겠느냐? 여기.”
외눈 안대가 자신의 지팡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북두칠성의 장’에서 구할 수 있는 푸른 보석 조각이 박혀 있었다.
[탐랑(貪狼)의 별]
말총머리가 감탄했다.
“오오······!”
제법인데?
벌써 ‘별보석’ 하나를 손에 넣었다니······.
별보석은 ‘북두칠성의 장’의 보상 아이템이다.
종합 능력치 중 하나를 1씩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하나만으로도 괜찮은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저 별보석은 어디까지나 일곱 개를 모았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보석은 바로 ‘사인참사검’의 소환 재료가 되니까.
외눈 안대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데 이들은 누구냐?”
“방금 ‘북두칠성의 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칼재주가 제법 좋아, 우리 쪽으로 받을까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외눈과 나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차상경이오.”
“김독자라고 합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잡는 동시에,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차상경
나이 : 26세
배후성(背後星) : 외눈 미륵
전용 특성 : 사이비 교주 (영웅), 미륵왕(彌勒王) (영웅)
전용 스킬 : [무기 연마 Lv.5], [정신 방벽 Lv.3], [화려한 언변 Lv.3], [능숙한 기만 Lv.3]. [거짓 기도 Lv.1]······.
성흔 : [미륵정토 Lv.2], [관심법 Lv.2], [마구니(魔仇尼) 선언 Lv.3]
종합 능력치 : [체력Lv.28], [근력Lv.26], [민첩Lv.28], [마력Lv.25]
종합 평가 : 모든 것을 통찰하는 그의 ‘외눈’ 앞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앞에서 함부로 기침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정희원이 여기 있었어야 했는데, 아쉽다.
눈앞의 이 인간이 눈을 끔뻑이고 있는 걸 보면, 다시는 내 배후성이 궁예라는 헛소리를 안 할 텐데.
차상경이 말했다.
“짐이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한 번 봐도 되겠소?”
“그러시죠.”
그래, 그거 왜 안 하나 싶었다.
[등장인물 ‘차상경’이 성흔 ‘관심법 Lv.2’을 사용합니다!]
궁예의 성흔인 [관심법]은 ‘멸살법’에 등장하는 탐색 기술 중에서도 꽤 흥미로운 편이었다. 상대방의 특성창을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성정과 대략적인 위험도를 알 수 있는 기술. 쉽게 말해, 착한 사람이라면 녀석의 눈에는 ‘호구 마구니’라고 뜨고, 나쁜 사람이라면 ‘뒤통수 칠 마구니’라고 뜨는 식이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 ‘차상경’은 당신이 ‘건드리면 안 되는 마구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이건?”
“왕이시여, 왜 그러십니까?”
[등장인물 ‘차상경’이 크게 당황합니다.]
얼굴이 창백해진 차상경이 외쳤다.
“마, 마구니!”
“예? 설마······.”
‘마구니’라는 말에, 말총머리를 비롯한 미륵왕의 그룹원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발생하려는 순간, 차상경이 다급히 덧붙였다.
“아,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다.”
“예? 아닙니까?”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다들 물러서라.”
과연. 성좌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는 걸 보면 바보는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건드리면 안 되는 마구니’라······.
아마 ‘외눈 미륵’은 나와 싸우길 원치 않는 모양이다.
“후우······ 깜짝 놀랐지 않습니까.”
의아한 것은 오히려 말총머리의 반응이었다.
순간적이지만, 녀석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은 오히려 ‘아쉬움’에 가까웠다.
“계획은 정확히 한 시간 뒤부터요. 참가가 조금 늦긴 했지만, 내 그대들 활약을 기대하지.”
차상경은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그룹원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궁예와의 첫 대면치고는 싱거운 결말이었다.
말총머리가 말했다.
“휴, 큰일 날 뻔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왕이라더니, 말도 하기 나름이군요.”
“하하, 궁예도 훗날 폭군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성군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요. 역사는 바꿀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총머리를 유심히 보며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했군요. 저는 한수영이라고 합니다. 그룹에서는 차상경님의 보좌를 맡고 있고요.”
궁예의 화신을 보좌하는 남자. 굳이 궁예 옆에 붙어 있을 정도면, 배후성에 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누구지? 설마 왕건인가?
나는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뭐?
“음? 왜 그러십니까?”
뻔뻔하게 대답하는 한수영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가······ 이제 이 녀석이 누군지 알겠군.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마구니가 낀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하하, 마구니 말입니까?”
나를 보는 한수영의 눈빛도 묘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이 순간, 우리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누가 먼저 칼을 뽑는가’인데.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기실의 문이 하나둘씩 개방되기 시작했다.
“왕께서 행차하신다!”
미륵왕 그룹 쪽에 긴장이 감돌았고, 대기실의 몇몇 인원들은 환호를 시작했다.
나는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왕들을 보며 한수영에게 물었다.
“저들도 같은 편입니까?”
“네, 모두 협력을 약속한 왕들입니다. 왼쪽에서부터 ‘소심왕’ 윤기영님과 ‘박투왕’ 김백호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신 분이 ‘토룡왕’ 구태성님이십니다.”
별명을 들으니 새삼 기억이 떠올랐다.
소심왕과 박투왕. 딱 별명처럼 생긴 녀석들이다.
준수한 능력치에 괜찮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서울 7왕에 비하면 한 끗 처지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저기서 주목할 것은 ‘토룡왕’ 구태성 뿐.
구태성이 차상경을 발견하고 이죽거렸다.
“애꾸, 벌써 나와 있었냐? 빠르네.”
“지렁이 마구니 놈이 깝죽대는구나.”
“······지렁이? 지금 내 배후성 욕한 거냐?”
그 말을 들은 유상아가 깜짝 놀라 내게 속삭였다.
“저 사람, 아무래도 배후성이 견훤인 거 같아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후백제의 왕이 토룡(土龍)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토룡?”
“‘지렁이’라는 뜻이에요. 조롱하는 의미에서 다른 왕들이 견훤을 토룡(土龍)의 아들이라고 불렀대요.”
이거 놀랍다. 고작 그런 정보로 저자의 정체를 알아낼 줄이야.
유상아의 말은 맞았다.
토룡왕 구태성.
내 기억으로도 그는 서울 7왕 중 하나이자, 후백제의 왕인 ‘견훤’을 배후성으로 삼은 인물이었다.
“왕들을 배후성으로 삼은 사람들이 꽤 보이네요. 전에 봤던 진성왕도 그렇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왕’을 배후성으로 삼은 화신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울 돔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일본 같은 경우는 지금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전국 3영걸이 화신을 통해 경합 중일 것이고, 영국은 사자왕 리처드나 헨리 8세 등이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겠지.
전 세계의 위인급 성좌들은 화신과의 동조율을 아슬아슬하게 조절해 가며 왕좌를 둘러싼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성좌, ‘해상전신’이 새로운 설화급 성좌의 등장을 기대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손에 땀을 쥔 채 상황을 지켜봅니다.]
다른 위인급 성좌들도 흥미진진한 눈치였다.
그럴 법도 하다.
앞서 말했듯, ‘네 번째 시나리오’는 각 나라의 위인급 성좌들을 위한 이벤트니까.
“모두 모였는가?”
이윽고 전열을 가다듬은 왕들이 중앙에 모여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의 적은, 3번 문으로 들어간 [폭군왕]이다! [폭군왕]은 이미 이 던전에서 두 개의 별보석을 손에 넣었고, 그의 비겁한 습격에 무고한 두 명의 왕이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자에 의해 왕을 잃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기실이 시체 밭이었군.
아마 폭군왕은 이곳에서 다른 두 명의 왕을 죽이고 별보석을 빼앗은 모양.
그렇다는 건, 저 3번 문만 공략하면 일곱 개의 별보석이 모두 모인다는 얘긴데······.
“새로운 서울을 결코 폭도의 무리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사인참사검’을 얻고, 나아가 ‘절대 왕좌’까지 차지하게 되면 이 서울에 남는 것은 끝없는 통탄과 비극뿐이다!”
“그러니 민중의 투사들이여! 지금 당장 일어나라! 이곳의 왕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다. 우리 중 누가 왕이 되든, 그것은 훗날의 일. 적어도 최악의 왕이 옹립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이것은 정당한 삶을 위한 투쟁이 될 것이다! 똑똑히 새겨들어라! 너희들은 새로운 역사에 첫발을 딛은 위대한 투사들이 되리라!”
별 내용도 없는 연설에, 사람들은 뜨겁게 열광했다.
환호하고, 동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감동에 벅차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자신들이 진짜 정의를 위해 일어난 혁명가들이라도 되는 양.
그 정경을, 나는 홀로 바라보았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사람들은 투표를 해서 대통령을 뽑던 이들이었다. 맡은 의무를 다하고 가진 권리를 누리며, 합법적인 경제활동을 통해 사유재산을 가지는 것에 동의했던 사람들. 갑자기 그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고작 한 달 만에, 서울은 왕국으로 되돌아갔다.
“출발한다!”
수백의 인파들이 3번 문으로 입장했다.
차상경의 그룹은 후미에 있었기에, 우리는 그에 맞춰 들어갔다.
잠시 후 시야가 물결치더니, 거대한 비동(秘洞)이 등장했다. 그 넓이와 끝을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굴.
바로 곁을 걷던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이거 어떤지 흥분되는군요. 꼭 무협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인데요.”
“무협 소설이요?”
한수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협 소설 보면 그런 게 나오지 않습니까? 장보도(藏寶圖) 속에 그려진 비동. 그 비동의 석실에는 전설의 보검이 잠들어 있으리니, 오오, 무림의 누구든 그 검을 얻는 자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리라!”
짐짓 제스처까지 곁들이는 한수영의 목소리는 꽤 그럴듯해서,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무협 소설에 나오는 흔한 클리셰군요. ‘장보도 보검’.”
“오, 독자 씨도 무협 좀 읽으셨나 봅니다?”
장르 소설 얘기라면, 나도 빠질 수는 없지.
“꽤 많이 읽었죠. 그런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클리셰에는 흔히 등장하는 전개가 있습니다.”
“흔한 전개? 뭐죠?”
“알고 보니 바로 그 ‘장보도’가 가짜였다! 라는 전개죠.”
한수영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거 재밌군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뻔한 이야기죠. 가짜 장보도 때문에 비동에 모인 고수들이 함정에 빠져서 죽고, 가짜 장보도를 흘린 ‘흑막’은 조용히 뒤에서 비웃는 거죠.”
“호오······ 그러면 지금 이 상황도 그런 클리셰일 수 있겠군요? 누군가 흑막일 수도 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죠. 저는 그런 뻔한 클리셰는 안 좋아하지만 말입니다.”
“음? 그건 무슨 뜻이죠?”
“솔직히 ‘장보도 보검’ 같은 클리셰는 너무 많으니까요.”
“흠······ 너무 많은 이야기는 안 좋은 이야기입니까?”
“적어도 작가로서 고민이 부족한 이야기라고 봐야겠죠.”
그 말에 한수영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럼 독자 씨가 작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장보도 보검’같은 내용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글쎄요. 저는 이름 그대로 ‘독자’라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요.”
“전 결국 독자 씨도 똑같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뻔한 클리셰를 쓰고, 독자들에게 뻔한 만족을 주는 일에 익숙해지실 겁니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누가 뭐랍니까? 꼭 작가처럼 말하시네요. 제 말은 클리셰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표절 소리는 안 듣게 쓰라는 거죠.”
“표······절이요?”
“네, 표절.”
붉으락푸르락하는 한수영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참 재밌다.
“글쎄요, 어차피 다들 비슷한 이야기에 디테일만 조금씩 다른 건데······. 그걸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독자 씨도 작가 입장이 되면 결국 똑같이―”
“아뇨, 저라면 다르게 쓸 겁니다.”
한수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르게 쓴다고요? 어떻게요?”
“예를 들면, 이렇게요.”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그대로 한수영의 목을 베었다.
데구르르 굴러떨어지는 녀석의 목에서는,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덧붙였다.
“어차피 드러날 흑막을 뭐하러 구차하게 숨깁니까?”
그러자 바닥에 잘려나간 한수영의 머리가 말을 시작했다.
“재미있군. 김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