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70화
역시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강북구까지 떨어트려 놨는데 벌써 검은색 깃발이라니.
대표가 아닌 자가 대표의 깃발을 빼앗으면 히든 시나리오 ‘혁명의 길’이 열린다. 놈은 아마 그걸 알고 있었을 테니, 오는 길에 다른 역의 대표를 죽여서 왕의 자리를 얻었을 것이다.
쿠구구구구.
그나저나 유중혁이 저렇게 빡쳐 있는 걸 보면, 다행히 이지혜와 정희원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모양인데.
나는 몇 걸음을 물러서며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야, 빨리 그 칼 내놔.”
“시, 싫어.”
“여기서 다 죽고 싶어?”
한수영의 눈이 흔들리고, 유중혁의 신형이 움직였다.
나는 외쳤다.
“길영아!”
그것을 신호로, 기다렸다는 듯 이길영의 눈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그오오오오오―!
비동의 위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가 쿵쾅쿵쾅 던전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비동의 한쪽 벽면에서 거대 사마귀의 낫이 날아들었다.
[6급 충왕종, 티타노프테라가 출현했습니다!]
역시 깽판에는 이길영의 능력이 최고다.
꽈르르릉!
거대 충왕종의 괴력에 비동 전체가 흔들렸다.
당황한 유중혁이 뒤를 돌아보는 사이, 나는 한수영의 작은 뒤통수를 갈겼다.
“악, 아앗······!”
신음과 함께 한수영이 ‘사인참사검’을 놓쳤다. 나는 검을 주워든 뒤, 한수영이 목에 두르고 있던 깃발도 덤으로 빼앗았다.
[당신은 ‘홍대입구 그룹’의 깃발을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보라색 깃발’이 ‘검은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보라색 깃발’이 ‘검은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이제부터 ‘검은색 깃발’의 특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첫 번째 ‘왕의 자격’을 완수하였습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6]
나는 곧장 폭군왕 쪽을 향해 달렸다.
폭군왕은 돌무더기 사이에 깔려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폭군왕의 육신은 반죽처럼 뭉개져 있었다. 처참했다. 애초에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놈이지만, 이렇게 어이없게 죽을 줄이야.
뒤쪽에서 한수영이 처량하게 외쳤다.
“이 도둑놈 새끼야!”
나는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을 나뒹구는 폭군왕의 아이템들을 재빨리 쓸어 담았다.
[아이템, ‘삼륜환’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용준(龍樽)’을 획득하였습니다.]
재생의 항아리 ‘용준’.
폭군왕은 7인 던전을 클리어하고 들어왔던 모양이다.
“······김독자!”
유중혁이 무서운 속도로 나를 추격해왔다. 민첩이 30이나 되는데도, 녀석과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다가,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이 있는 왕의 뒤로 숨었다.
“뭐, 뭐야!”
후백제의 왕, 구태성이었다.
“크아아악!”
유중혁의 가차 없는 일격이 녀석의 머리를 갈겼고, 녀석의 깃발은 고스란히 유중혁의 것이 되었다.
[성좌,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견훤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하시길.
그쯤에서 나는 도망가는 것을 멈추고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중혁아, 잠깐 멈춰 봐.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그 쪽지.”
“쪽지?”
“내 여동생.”
두 단어였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다행히, 이지혜는 무사히 일을 처리했다.
쪽지는 적당한 시기에 유중혁에게 간 것이다.
“네 여동생 뭐?”
“내 여동생을 어디에 숨겼지?”
“무슨 소리야?”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 Lv.6’를 사용 중입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의 말이 거짓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런.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네놈은 정말로 죽는다.”
[거짓 간파]가 없어도 저게 진실인 건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이 뒤늦게 비동에 도착한 것은, 전적으로 내 계략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도록 유도했고, 그 때문에 유중혁은 헛된 시간을 북쪽 지역 탐색에 허비했다.
아직 유중혁의 인격이 덜 마모된 3회차였기에 가능했던 작전.
비겁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본래의 ‘3회차’보다도 훨씬 강해진 유중혁이 모든 걸 도외시하고 왕들의 전쟁에 참전한다면, 이 시나리오는 녀석의 페이스로 끝나버렸을 테니까.
그런 식이 되어서는, 결코 내가 원하는 결말로 향할 수 없다.
“······좋아. 근데 일단 칼은 좀 내려놓고 말하자. 막말로 내가 진짜 나쁜 놈이면 어쩌려고 그래?”
“가족을 인질로 삼을 셈인가?”
“또 오버한다. 그런 말까진 안 했잖아?”
애초에 인질 개념이 성립하지도 않는다.
막말로 이 녀석이 사망회귀를 시전해버리면 모두 끝장이니까.
“그럼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왜 그랬을 것 같아?”
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유중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만 죽어라.”
유중혁의 검이 치켜 올려진 순간,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여러분들, 진정하세요. 벌써 싸우고들 계시면 어떡합니까? 어디보자, 자격은 모두 충족하셨군요.]
중급 도깨비. 이제야 나타나셨구만.
그제야 유중혁도 허공에 떠 있는 알림판을 확인했다.
[현재 남은 왕의 수 : 5]
[‘마지막 왕의 자격’이 시작됩니다.]
나와 유중혁을 비롯해, 남은 왕들의 몸이 강제로 공간 이동을 시작했다.
“김독······!”
뒤늦게 뻗어진 유중혁의 검은 내게 닿지 못했다.
드디어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즈까지 온 것이다.
[자격을 갖춘 왕들이 마지막 시험 장소로 이동합니다.]
흐물거리며 사위의 정경이 바뀌었다. 몸이 쏜살같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퉁!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에 머리를 부딪쳤다. 번뜩 정신이 든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당신은 ‘마지막 왕의 자격’의 후보에서 제외됩니다.]
······뭐야?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광화문의 도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부딪친 곳에는 운동장 크기의 결계가 쳐져 있었다. 저 결계의 중심에는,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 보상인 ‘절대 왕좌’가 있을 것이었다.
난 왜 저기 못 들어간 거지?
[하하핫! 저런, 저런! 큰 그림만 보고 있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군요!]
웃음소리에 허공을 올려다보니, 조소를 머금은 중급 도깨비의 얼굴이 보였다. 설마 저 자식이 농간을 부린 건가 싶었는데, 뜻밖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당신은 네 번째 시나리오의 ‘표적 역’을 점거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왕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표적 역’을 점거하세요.]
[당신 그룹의 ‘표적 역’은 ‘창신 역’입니다.]
아······ 왕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그걸 아직 안 했었지.
[이전 페이즈를 제대로 클리어하지 않으면 마지막 페이즈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건데,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결계 안에서는 벌써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지금까지 해온 일이 꼼짝없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창신역으로 달려가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망할.
거기까지 달려갔다 오면, 이미 모든 시나리오는 끝나 있을 텐데?
“독자 씨!”
멀리서 유상아가 쓰러진 이길영을 업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일행이 더 있었다. 응?
“희원 씨?”
정희원이 낯선 여자아이의 손을 꼭 쥔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진짜 우리 오빠 여기 있어염?”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근데, 나 배고픈데.”
정희원은 지금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서울 강북 지역에서 한 여자아이를 구한 뒤, 창신 역에서 대기할 것.
그것이 정희원이 이번 시나리오에서 맡은 임무였다.
“희원 씨, 여긴 왜 왔습니까? 창신 역에서 대기하고 계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아니 이 답답한······. 내가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얘, 오늘 아침부터 굶었단 말이에요. 여동생이라면서 걱정도 안 돼요?”
정희원의 말에 여자아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 우리 오빠 아닌데염.”
“어?”
“우리 오빠보다 못생겼어염.”
망할 꼬마가.
정희원이 당황하며 나와 여자아이를 번갈아 보았다.
“어? 독자 씨 여동생 아니었어요? 난 그래서 구하라고 한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그럼 누구예요, 얘는?”
아마 정희원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저 여자아이를 그 사이코패스의 여동생이라고 생각할까.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듣다가,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 내 완벽한 계획이 여기서 무너지나?
“독자 씨, 어디 가요?”
“창신 역 점거하러 갑니다.”
늦더라도 도전해 보는 수밖에.
장거리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중급 도깨비가 보고 있어서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볼 수도 없고.
그런데, 나를 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거길 왜 가요?”
“예?”
“얘, 그거 꺼내 봐. 아까 언니가 준 거 있지?”
“넴!”
유중혁의 동생, 유미아가 입속에 손을 넣었다. 잠시 후, 그녀의 입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더니, 역시나 비정상적인 크기의 돌덩어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미아의 전용 스킬인 [인벤토리]였다. 나는 돌덩어리를 향해 다가갔다.
“이게 뭡니까?”
“뭐겠어요?”
나는 덩어리의 반질반질한 윗면을 살폈다.
그러자, 무언가를 꽂을 수 있는 작은 홈이 보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멸살법’의 어떤 회차에서도 이런 짓을 한 사람은 없었다.
정희원이 뻔뻔하게 말했다.
“역을 점거하는 데는 ‘깃발 꽂이’만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대체 어떤 무식한 인간이 이런 걸 생각해 낼까.
정희원은, ‘창신 역’의 ‘깃발 꽂이’가 있는 바닥을 통째로 도려내 왔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정희원의 발상에 감탄합니다.]
나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왜요, 뭐 잘못됐어요?”
“······아뇨.”
“그럼 뭘 멍하니 있어요? 어서 꽂고 가봐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깃발을 꺼냈다.
[당신의 그룹은 ‘창신 역’을 점거하였습니다.]
[‘깃발 쟁탈전’의 보상으로 2000코인을 받았습니다!]
된다. 진짜로 된다.
[당신의 그룹은 ‘표적 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마지막 왕의 자격’의 전장으로 이동합니다.]
슈우우욱― 하는 느낌과 함께, 다시 의식이 깜빡였다.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떠올랐고, 왕의 자격 조건이 추가되었다.
+
<왕의 자격>
1. 「왕좌의 주인은 그 누구보다 용맹할지니」
― 절대 왕좌는 결코 ‘약한 왕’을 원하지 않습니다. 왕좌에 도전하기 위해, 당신은 최소 [검은 깃발]을 소유한 왕이어야 합니다.
2. 「왕좌를 꿈꾸는 자는 그 욕망에도 자격이 있으니」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의 숫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도전권을 얻기 위해, 당신은 주변의 다른 왕들을 제거해야만 합니다.
3. 「그러므로 단 하나의 왕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우뚝 선 자로」
― 절대 왕좌에 도전할 수 있는 ‘왕’은 오직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강함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성좌, ‘해상전신’이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위인급 성좌들을 응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낄낄대며 귀를 팝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위인급 성좌들을 향해 코를 후빕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성좌들도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성좌라고 해서 다 같은 급은 아니다.
위인급과 설화급은 어린아이와 어른만큼이나 격차가 크니까.
방송을 시청하는 성좌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어른들이 애들 숨바꼭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듯, 설화급 이상의 성좌들에게 이번 시나리오는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위인급 성좌들에겐 다르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승리한 ‘위인급 성좌’는, ‘절대 왕좌’에 오르며 자신의 새로운 ‘설화’를 쌓을 수 있다. ‘왕의 자격’ 시나리오가 시작되면서 위인왕들이 조급해 보였던 건, 모두 이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마침내 [왕의 전장]이 보였다.
[지금부터 모든 왕은 배후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아이템의 공격력 및 방어력이 제한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스킬 및 성흔, 아이템의 특수 옵션이 봉인됩니다.]
[지금부터 모든 왕의 종합 능력치가 10/10/10/10/10으로 변화합니다.]
[‘마지막 왕의 자격’은 최후의 일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