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67화 던전에 입장하되, 사인참사검을 얻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유상아도, 이길영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곧장 이해했다. “깃발을 빼앗겠단 말씀이시군요.” “그럼 이제부턴 다 죽여도 되겠네요.” 물론, 서로 다른 의미로. 유상아가 놀란 눈빛으로 이길영을 내려다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길영이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유상아를 올려다보았다는 것이다. “형, 마무리는 저한테 맡기세요.” 심지어 이 녀석······ 내가 사람의 목숨을 직접 끊지 않는다는 것까지 이미 눈치채고 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일람’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여전히, 이길영의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유상아의 염려 어린 눈길과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이길영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이길영을 향해 말했다. “좋을 대로 해.” 유상아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길영은 아직 중학생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던 윤리는 이제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야. 조심해야 해.” “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자신만만한 이길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등에 꽂고 다니던 깃발을 품속에 숨겼다. 지금까지 깃발은 허접한 왕들을 유인할 좋은 미끼였지만, 지금부터는 포식자를 불러들이는 혈향이 될 것이었다. 왕을 잡으러 가는 전장에, 내가 왕이라는 걸 들켜서 좋을 것은 없다.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다들 잘 하고 계시는군요!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히든 시나리오’를 수행하고 계시다니, 이건 ‘히든’의 의미가 없겠는데요?] 뻔뻔하기도 하시지. 가끔 보면 저렇게 의뭉스럽기도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 [벌써 ‘첫 번째 자격’의 요건을 달성한 분도 계시고. 역시, 이래야 재미있는 법이죠.] 벌써 [검은색 깃발]을 달성한 왕이 나타난 모양. 아마 7왕 중의 하나겠지. [잠시 후 ‘두 번째 자격’의 요건도 공개될 테니, 다들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르죠. 도깨비의 ‘잠시 후’는 생각보다 기니까요.” 나는 모은 상평통보를 로비의 출입구에 패인 구멍에 하나씩 맞춰 넣었다. [10개의 상평통보를 사용하여 숨겨진 장(場)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장, ‘북두칠성의 장’에 진입하시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깃발은 [보라색 깃발]. 같은 보라색 등급의 깃발을 가진 왕들은 모두 ‘북두칠성의 장’에 몰려 있을 것이다. 즉, 내 사냥감들이 지금 모두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다. [‘북두칠성의 장’에 진입하였습니다.] 시야가 물결치며 로비의 정경이 바뀌었다. 새하얀 대리석 로비가 탁 트인 넓은 대기실로 바뀌었다. 대기실 끄트머리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었다. “읏······.” 유상아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유상아의 발 앞에는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세력전을 벌인 그룹원들의 시체. 이길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평탄히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체들. 족히 수백 구는 될 시신들이 곳곳에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벌써 한바탕 혈풍이 몰아친 모양이다. 기분이 조금씩 이상해진다. 만약 내가 표절 작가 녀석의 텍본을 퍼뜨리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국 나 때문에 죽은 것일까? “저기, 사람들이 있어요.” 대기실 중앙에는 사람들의 시체를 연료로 거대한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두런두런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패잔병들인지, 아니면 휴전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싸우고 있지 않았다. 나는 무리들을 보며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심해요.” 슬그머니 일어서는 무리들. 다가오는 사람들의 눈빛에 탐욕이 엿보이고 있었다. “신입이로군. 너희들의 왕은 누구냐?” 누군가 말로 시선을 끄는 사이, 은밀하게 우리 일행의 뒤를 점거하는 녀석들. 점점 좁혀오는 포위망. “너냐? 아니면 그 옆의 여자? 이 꼬마일 리는 없고······.” [상당수의 성좌들이 시답잖은 훼방을 귀찮아합니다.] [몇몇 성좌들은 당신이 본격적인 행동에 착수하기를 원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이봐, 왜 대답을······ 으악!” [부러지지 않는 신념]에서 뻗어 나온 백광이 허공을 물들였다. 거침없는 궤적이 사내의 팔다리를 잘랐다. 당황한 옆의 사내가 외쳤다. “젠장! 그냥 죽여!”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드는 녀석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뭐, 뭐가 이렇게 빨······!” 민첩의 앞자리가 3인 녀석은 현시점에서 거의 없다. 초반이라 보법 스킬의 레벨도 높지 않을 테니, 당장 서울 7왕을 제외하면 내 움직임을 따라올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스가각! 반원의 형태로 휘둘러진 신념의 칼날이, 틈을 노리던 대여섯 명의 발을 동시에 잘라냈다. 스각! 이어진 공격이 병장기를 든 손을 잘랐고. 푸슛! 암기를 쥔 손목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잘려나간 팔다리가 비현실적으로 허공을 날았다. 나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놈들의 뒤로 다가가 조용히 수혈을 짚었다. [전용 스킬, ‘점혈 Lv.1’이 발동합니다.] 팔다리를 끊고 수혈을 짚다니, 잔인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내들이 품속에 숨기고 있던 검푸른 비수. 이 비수의 끝에는 5인 던전인 [동의보감의 장]에서 구할 수 있는 맹독이 발려 있었다. 조금만 대응이 늦었더라도, 당하는 쪽은 우리였을 것이다. 순식간에 무리들이 모두 쓰러지자, 나는 이길영을 불렀다. “부탁한다.” 이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푹! 푹! 이길영의 손에 사람들이 숨통이 하나둘씩 끊어진다. 하찮은 벌레를 눌러 죽이듯 무기질적인 손놀림. 나도 조금 놀랄 정도였다. 보다 못한 유상아가 나섰다. “내가 할게, 길영아······.” “······제가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내가 할게.” 유상아 답지 않게 완고한 어투였다. 이길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유상아는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칼을 쥐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어쩌면 유상아는 나를 경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상아의 마음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푹! 푹! 유상아는 이길영보다도 훨씬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남은 사람들의 목숨을 모두 끊었다. 일을 끝낸 유상아의 손끝에 가는 떨림이 일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겠죠?” “네, 그럴 겁니다.” “길영이 일은 앞으로 제가 대신 할게요.” “할 수 있겠어요?” “······문제없어요. 계란 깨는 거랑 똑같았어요.” 유상아 답지 않은 비유. 애써 담담한 척하는 듯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데······.” 투덜거리는 이길영의 머리에 유상아가 손을 얹었다. 앞으로도 이런 우여곡절은 많을 것이다. 몇 번인가 무너지거나,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다. 곧 만나게 될 서울 7왕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능력치가 준수하고, 가진 스킬들도 독특하다. 저쪽에서 적의를 내비치지 않아도, 선수를 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올 것이다. 우리는 묵묵히 무리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수거했다. [23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아이템 ‘동의보감 ― 잡병편 (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역시나, 5인 던전을 클리어한 녀석들이었다. 5인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동의보감’은 총 여덟 권으로, 제각기 다른 쓸모를 가진 물건들이었다. 아마 5인 던전을 통해 올라온 녀석들이 제법 될 테니, 다른 편을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방금 죽인 무리 중에 ‘왕’은 없었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커다란 모닥불 너머에서 이쪽을 보고 있던 사내들 중 하나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다른 무리들이 쓸려나갔는데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템을 마저 수거하며, 무심한 투로 경고했다. “뭡니까?” 사내는 한 걸음을 슬쩍 물러서더니,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어어, 진정하세요. 싸우려는 거 아니니까.” 나는 사내의 외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등 뒤에 멘 커다란 창. 옷에 감춰져 있어서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탄탄한 이두와 흉근······ 그리고 길게 뒤로 묶어낸 말총 머리. “대단한 솜씨더군요. 딱히 패시브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충정로 그룹을 순식간에 쓸어 버리다니······ 그 자식들, 그래도 왕을 잃은 녀석들 중에서는 한가락 하는 놈들이었는데 말이죠.” 역시나, 그래서 그렇게 막 나가는 거였군. “근데 좀 늦으셨군요. 벌써 주요 ‘왕’들은 모두 던전 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지금쯤 치고 박고 싸우고 있을 거예요. 뭐, 승자는 거의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여길 이 꼴로 만들고 지나간 마지막 왕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했거든요.” “그게 누굽니까?” “‘폭군왕’이라고 아십니까?” 사내가 계속해서 말했다. “현재 서울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입니다. 이미 알 만한 녀석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돌고 있죠. ‘절대 왕좌’의 주인은 분명 폭군왕이 될 거라고.” 하긴, 직접 폭군왕을 봤다면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폭군왕의 무력은 분명 서울 7왕 중에서도 수위권이니까. 하지만 ‘절대 왕좌’의 주인이라니, 우스운 일이었다. 폭군왕은 강하지만, 결코 7왕 중 최강은 아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폭군왕은 강하지만, 절대 ‘왕좌의 주인’은 될 수 없을 거라고.” “······왜 그렇게 생각하죠?” “직접 봤으니까요. 그는 본신의 무력은 강하지만, 사람을 다룰 줄 모릅니다. 모름지기 왕이라면 백성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죠.” 백성의 마음? “제가 모시는 왕은 그걸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많은 화신들이 그를 따르죠. 저는 저의 왕이 ‘절대 왕좌’의 주인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나는 사내의 시선이 흘끗 향하는 쪽을 보았다. ‘북두칠성의 장’은 총 일곱 개의 입구로 이루어져 있다. 아마 이 사내의 왕도, 그 통로 중 하나를 택해 움직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지가 뭡니까? 그쪽한테 붙으라고요?” “하하,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그렇게 순순히 따르실 리 없잖아요? 저는 그냥 제안을 하려는 겁니다. 괜찮다면,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이 사내가 대기실에 상주하고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말하자면, 이 녀석은 ‘삐끼’다. “왜 그래야 하죠?” “‘폭군왕’은 강합니다. 저는 저의 왕을 믿지만, 솔직히 본신의 무력만으로 폭군왕에게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하거든요.” 충성심에 반해, 굉장히 현실적인 녀석이다. 하지만 이런 녀석이 ‘진짜’ 충신이겠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망나니한테 전설의 보검까지 쥐어 주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물며 녀석이 서울시의 모든 왕들을 통제하는 ‘절대 왕좌’에 오른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3회차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분명 ‘멸살법’에서도 이런 ‘반 폭군 동맹’이 만들어진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역시, 미래가 바뀌었기 때문이겠지. “일리는 있군요.”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우리 그룹은 곧 ‘폭군왕’을 칠 거거든요. 이미 다른 몇몇 왕들과도 이야기가 끝난 상태고. 어느 그룹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지금 참가해서 그쪽한테 손해볼 건 없을 겁니다.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상황이니까.” 확실히 그 말대로다. 문제는 그 숟가락 한술의 대가가 생각보다 클 거라는 것인데······.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사내가 말했다. “정 찝찝하다면, 우리 왕을 만나보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슬슬 대기실로 돌아오실 때가 되었는데······. 엇, 마침 저기 오시네.” 실제로 일곱 개의 문 중 하나가 열리며, ‘북두칠성의 장’의 내부로 진입했던 무리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왕이시여······.” 사내와 함께 문 입구를 서성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무리의 중심에서, 한 사내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깨끗하게 머리를 밀고, 한쪽 눈에는 안대를 한 남자. 그리고 손에 쥐어진 갈색의 법봉(法棒)······. 잠깐만. 저 녀석,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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