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66화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우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서 빛이 몰아쳤고, 광휘를 내뿜는 문자열들이 정렬되기 시작했다. ‘멸살법’의 텍스트들이었다.
[헉······?]
뭔가를 눈치챈 김유신이 경악성을 내지른 것과, 김유신의 존재감이 급속도로 엷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역시, 늙은 여우는 눈치가 빠르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던 성좌의 가호가 사라집니다.]
마지막 순간, 경악한 김유신의 진언이 메아리쳤다.
[대체 그대는······?]
그리고 김유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제4의 벽]이면 가능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간평의]로 연결되어 있던 성좌를 이렇게 쉽게 끊어낼 수 있을 줄이야.
지난번 ‘극장 던전’에서 있었던 일이 힌트가 되었다. 그때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려 했던 ‘극장 주인’은, [제4의 벽]을 마주한 순간 소멸했었다.
혹시 같은 방식으로 성좌도 골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아쉽게도 눈치 빠른 김유신이 먼저 달아나버린 모양이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의 존재에 의구심을 품습니다.]
[성좌, ‘흥무대왕’은 앞으로 당신을 유심히 지켜볼 것입니다.]
하여간 노인네가 뒤끝은.
“······이제 괜찮은 건가요?”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뭐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사지가 마력 실로 꽁꽁 묶여 있었다. 마치 번데기 같은 모양새랄까. 얼굴이 발갛게 물든 유상아가 얼버무렸다.
“그게······ 두고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에 있으면 공격당할 것 같아서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그 짧은 틈에 내게 [실 묶기]를 사용했을 줄이야.
놀라서 얼어붙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스킬을 쓰고 있었다니.
“순발력이 대단하시네요.”
“······죄송해요.”
“칭찬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헛짓거릴 시작하면 지금처럼 만들어 주세요.”
“그, 금방 풀어드릴게요!”
유상아는 쩔쩔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언제까지나 그녀가 평범한 ‘회사원’일거라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뒤를 돌아보니, 미희왕 민지원이 나와 유상아를 묘한 눈으로 번갈아 보고 있었다.
“뭐······ 저는 이만 가볼게요. 도우러 왔는데, 결과적으론 도움을 받은 꼴이 됐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일 겁니다.”
“······이제 같은 편 된 거 아니었어요? 보통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친해지는데.”
“그건 드라마고요.”
“교우이신!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우리 화랑의 기치에요.”
그렇게 말하며 멀어지는 민지원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미소로 멀어졌다.
이번 회차의 미희왕은 좋은 왕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 미희왕 본인도 잘 모를 것이다.
“우리도 가죠. 이성국 씨! 그만 나와요.”
내 외침에 이길영을 붙들고 건물 뒤쪽에 숨어 있던 이성국이 어물쩍 나타났다.
이 자식, 호기롭게 계백을 막겠다더니 언제 그런 곳에 숨어 있었는지.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김유신의 ‘대화랑집결’이 휩쓸고 간 곳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난전을 벌이던 군소 왕들은 뒤통수가 깨진 채 대로변 곳곳에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성좌의 위엄이라는 거겠지. 김유신은 비겁하지만 쓸만한 성좌다.
나는 떨어져 있는 공짜 깃발들을 하나씩 주우며 차근차근 공적치를 올려 나갔다.
[당신의 ‘갈색 깃발’이 ‘갈색 깃발’의 누적 공적치를 흡수합니다.]
[당신의 ‘갈색 깃발’이 ‘보라색 깃발’로 진화합니다.]
[‘보라색 깃발’의 특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제일 좋은 건 싸우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웬만한 깃발은 이미 수거된 상황.
보라색부터는 깃발의 공적치가 잘 오르지 않는다.
즉, 지금부터는 어지간한 ‘왕’을 잡아서는 소용없다는 뜻이다.
“정민섭 씨, 거기 있습니까?”
다음 순간, 허공에서 정민섭의 신형이 나타났다.
내가 미리 건네준 [은둔자의 망토]가 그의 몸피를 덮고 있었다.
정민섭은 이번 임무에서 고궁 박물관 정찰을 맡았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들어갔죠?”
“폭군과 참독자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왕이 들어갔습니다.”
아홉이라. 적당한 숫자다.
“깃발 종류는요?”
“보라색이 일곱, 갈색이 둘입니다. 보라색 중에서도 두 명은 특히 색이 진했습니다.”
“폭군과 참독자겠군요.”
“그렇습니다.”
정민섭, 이거 생각보다 쓸만한 인재인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저랑 유상아 씨, 그리고 길영이만 들어갑니다. 다른 두 분은 밖에서 계속 대기하고 계세요. 망토 속에 숨어 계셔도 되고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당장 필요한 건 셋뿐이에요.”
“언제든 불러주시면 들어가겠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내가 아는 대로라면, 서울 고궁 박물관은 현재 [던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시련의 유물>
분류 : 히든
난이도 : F~A+
클리어 조건 : 적정 인원에 알맞은 ‘유물 던전’을 클리어 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5000코인
실패시 : 사망
+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우리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대리석 로비였다. 로비에는 어떤 사람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상아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무서워서 문화생활 같은 건 못하겠어요. 전에는 영화관이더니, 이번에는 박물관까지······.”
“형, 우리도 전설의 검인가 그거 얻으러 온 거예요?”
“아니, 지금은 아니야.”
물론, ‘사인참사검’도 이 던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정보를 뿌린 게 나니까.
[진입할 던전의 종류를 선택하세요.]
* 1인 던전 ― 나각(螺角)의 장
* 3인 던전 ― 침구동인(鍼灸銅人)의 장
* 5인 던전 ―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장
* 7인 던전 ― 용준(龍樽)의 장
그런데 ‘사인참사검’이 나오는 던전은 평범한 방식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해당 던전은 각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보상으로 나오는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모아야만 입장할 수 있는, 히든 시나리오 안에서도 히든으로 취급되는 던전이기 때문이다.
“3인 던전, 침구동인의 장을 택하겠다.”
[3인 던전에 입장합니다.]
이길영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하긴, 대단한 유물을 얻을 줄 알고 기대하고 있었겠지.
“길영아. 유물은 겉으로 보는 게 다가 아니야.”
“······네?”
“겉보기에 화려한 것들이, 실은 실속이 없는 경우가 많아.”
사인참사검도 그런 거품이 낀 아이템 중 하나다.
오히려 이 던전에서 좋은 것들은, 평범하게 들어간 던전에서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이다.
3인 던전인 ‘침구동인의 장’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도 그중의 하나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유상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우리 말고도 들어온 사람들이 있나봐요.”
실제로 던전의 곳곳에서는 간헐적인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와아악! 떨어져!”
인간의 형태에, 무광택의 검정빛이 감도는 괴물.
3인 던전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녀석들은 그런 검정색 동인(銅人)들이었다.
7급 복제종(複製種), 침구동인(鍼灸銅人).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가증식을 하는 이 괴물들은, 현시점에서는 공략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침구동인들은 몸피가 단단한 데다 내장기관이 없고, 신경망이 없어서 고통을 겪지 않는다.
“으아아아! 살려줘!”
몇몇 화신들의 검이 어설프게 동인을 베었지만, 동인들은 약간의 수은을 흘릴 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성큼성큼 다가간 동인들이 사내의 몸을 쭉 잡아당겼다.
뿌지지지직!
체근민이 50에 가까워 보이는 사내의 몸이, 침구동인의 손아귀에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독자 씨, 이 녀석들은 어떻게 상대하죠?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아요.”
유상아와 이길영도 다가오는 침구동인들을 향해 열심히 둔기를 휘두르거나 스킬을 사용하고는 있었지만, 좀처럼 효과는 없었다.
가끔 이길영의 둔기에 맞은 침구동인들이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이길영은 자신이 무슨 원리로 그들을 상처입혔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녀석들의 몸을 잘 봐.”
‘시련의 유물’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괴수들은, [서울 고궁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모티프로 제작된 것들이다.
가령 1인 던전의 나각은 말 그대로 소라껍데기로 만든 악기고, 5인 던전의 동의보감은······ 뭐 이건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요는 3인 던전의 침구동인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동인은 한참이나 노려보던 유상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몸에 뭔가가 새겨져 있는데요?”
“맞습니다.”
사실 유물 침구동인(鍼灸銅人)은 인간의 전신, 즉 앞·뒤·팔·다리·머리에 이르는 354개의 경혈(經穴)을 표시하기 위한 유물이었다.
말하자면 이 유물은 조선 시대의 침구학 교보재인 셈이었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나는 칼날을 발동해 침구동인의 경혈들 중 하나를 찔렀다.
그러자,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던 동인이 이내 파사삭 소리를 내며 가루로 흩어졌다.
무려 7급 복제종치고는 허망한 최후였다.
[첫 번째 침구동인을 사냥했습니다!]
“잘 보시면 경혈마다 색깔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어떤 것은 마혈, 어떤 것은 사혈. 그리고 어떤 것은 아혈······ 각 침구동인은 그 혈도를 찌를 때마다 다른 효과를 볼 수 있게 제작되어 있습니다.”
“아······!”
중요한 것은 미세한 경혈을 찾아 그 흐름을 막거나, 끊는 것.
몇 번인가 시범을 보여주자, 이길영과 유상아도 금방 요령을 터득했다.
이길영은 [다종 교감]을 이용해 작은 곤충들로 혈도에 충격을 주는 방법을 택했고, 유상아는 [실 묶기]를 응용하여 실을 작은 침처럼 꽂아 넣고 있었다. 한 차례씩 부르르 진동하다 자리에 늘어지는 동인들을 보며,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두 사람 다, 정말 훌륭한 성장세다.
[당신의 파티는 최초로 침구동인을 100마리 사냥하였습니다!]
[3인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기본 보상으로 상평통보 4개를 각각 획득하였습니다.]
[특별 보상으로 전용 스킬 ‘점혈(點穴)’을 획득하였습니다.]
목표로 했던 스킬도 얻었다.
점혈(點穴).
특정 혈도를 제압하여 적을 제압하는, 무림계 귀환자들의 고유 기술.
당분간 ‘불살의 왕’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내겐 필수적인 스킬이었다.
유상아가 신기하다는 듯 받은 상평통보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뭔가 살 수 있을까요?”
“코인으로 교환할 수도 있고, 던전의 입장권으로도 쓸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그러면······.”
“물론 저희는 입장권으로 쓸 겁니다. 자, 다들 세 개씩 내세요. 저는 네 개를 낼테니, 합쳐서 열 개를 맞춰보도록 하죠.”
“열 개요? 잠깐만요, 독자 씨 설마······?”
“우리는 ‘사인참사검’을 얻을 수 있는 히든 던전에 진입할 겁니다.”
유상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하지만 사인참사검은 얻지 않을 거라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우린 ‘사인참사검’을 얻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걸 얻으러 간 왕들을 ‘사냥하러’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