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65화 Episode 14. 왕좌의 주인 김유신의 성흔인 ‘대화랑집결’은 역사 속에서 죽어간 화랑의 정예, ‘용화향도’를 부르는 기술. 그아아아아아! 쉽게 말하자면 이것은 이지혜가 사용했던 ‘유령 함대’의 지상 버전이었다. 위력으로만 따지면 충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인급 성좌들이 사용하는 대군 기술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성흔. “가라!” 이미 백골이 진토되어 없어졌을 용화향도들이 백제군을 향해 일제히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어떤 화랑은 눈이 없었고, 어떤 화랑은 팔이나 다리가 없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김유신이 이곳에 있는 한, 그들은 몇 번이고 칼을 들고 일어날 것이다. 영혼이 마모되고, 분노가 삭아 없어지고, 마음조차 닳아버린 이후에도. 나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싸웠던 병사들은. 이제 멸망한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 “비겁한 건 여전하구나, 김유신! 이젠 죽은 부하들 등까지 떠미는 것이냐!” “······.” “덤벼라! 네놈도 장수라면, 일대일 승부를 보자!” 계백의 도발에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김유신이 움직이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용화향도들을 부수는 계백. 그의 거검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허공을 무자비하게 수놓았다. 퍼걱! 퍼거거걱! “김유신―!” 가공할 외침이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자, 감정을 잃은 용화향도의 무리조차 멈칫했다. 저것이 계백이다. 백제의 마지막 명장, 계백. 육체적인 버프 능력만 따지자면, 성좌 계백은 김유신을 압도한다. 실제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은 김유신과 일대일로 싸운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김유신이 대결을 피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만. [등장인물 ‘추왕인’이 ‘결사항전 Lv.2’을 발동합니다!] 역사 속에서 계백의 별동대는 수적으로 열 배나 되는 김유신의 군대를 상대로 항전을 벌였고, 불가능한 전장에서 몇 번이고 승리했다. 비록 마지막 승자는 김유신이었지만, 황산벌의 최종막이 열리기 전까지 계백은 한 차례의 전투도 패배하지 않았다. 광기에 가까운 애국심과 비장한 결의로 똘똘 뭉친 전투광. 지금은 비록 김유신의 가호를 등에 업었지만, 상황만 바뀌었더라면 나는 김유신이 아니라 계백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보다 못한 관창의 화신이 소리쳤다. “장군님!” “움직이지 마라.” 김유신이 나의 입을 통해 말했다. 죽어가는 용화향도의 무리를 보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한없이 고요한 김유신의 심상이 그대로 전해졌다. 계백이 소리쳤다. “성좌가 되고도 네놈의 비겁함은 변하지 않는구나!” 맞다. 김유신은 비겁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패배를 무서워한다. 그렇기에 그는 강하다. 경거망동하지 않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이길 수 있는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해치운다. 그랬기에 네 번이나 패배하면서도, 최후의 황산벌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수백의 용화향도 무리들을 상대로 난전을 벌이는 계백의 모습은 처절했다. 그의 화신은 이제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전신은 피칠갑을 했고, 허벅지와 양팔, 옆구리에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용화향도의 무리를 베어 넘기며,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김······ 유······ 신!” [성흔, ‘원군 요청’을 발동합니다!] 김유신의 뒤쪽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유령 병사들이, 계백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병사들의 복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저들은 아마 신라군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불렀다는 당나라의 원군인지도 모른다. 과연 김유신답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뿐. 외세의 힘을 빌리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지. 푸우욱! 수많은 창이 가슴을 꿰뚫는 소리. 고통을 이기지 못한 계백의 화신이 무릎을 꿇었다. “크헉······!” 그처럼 강했던 계백의 화신도, 이제는 한계였다. 계백이 웃었다. “······원통하구나. 이런 가짜 무대에서조차, 나는 그대에게 닿지 못하는가. 단 한 번만이라도 검을 나누고 싶었거늘.” 눈시울이 붉어진 계백의 화신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관창은 살았고, 역사는 변했다. 하지만 이렇듯 변하지 않는 역사도 있다. 김유신이 물었다. “계백.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 “그 상태로 죽으면, 너는 당분간 화신을 선택할 수 없다. 왜 갑자기 시나리오를 포기한 것이냐?” 계백은 서슬퍼런 눈빛으로,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기다리던 김유신이 칼을 꺼내 들었다. 나는 다급히 내 목소리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제 손으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왜지?] “······제약이 있습니다.” 불살의 왕은 직접 살행을 벌여서는 안 된다. 단 한 명의 동족이라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면, 왕위를 박탈당하니까. 김유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대충 뭔지는 알겠군. 걱정하지 마라. 별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지금 계백을 참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바로 나 김유신이다.] “하지만······.” [······정 찝찝하다면, 알겠다.] 김유신이 손짓하자, 땅에서 일어난 용화향도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김유신에게 목소리를 넘겨 주었다. “계백, 다음 세계에서 만나자.” 계백의 화신이 말없이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했으나, 끝내 입을 열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얼굴은 계백이라기보다는 그저 모든 연기를 끝마친 단역배우처럼 보였다. 그리고 화신의 목이 조용히 허공을 날았다. [「무대화― 황산벌」이 종료됩니다.] [당신은 ‘황산벌 전투’를 추체험(追體驗)했습니다.] [체험 보상으로 1000코인을 획득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백제군은 모두 전멸해 있었다. [살해의 간접성이 참작되어 ‘불살의 왕’의 권한이 유지됩니다.] 다행이다. 불살의 왕은 오직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을 때만 박탈당하니까. 용화향도가 죽인 생명들은 살해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먼지 속에서 이성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상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고, 이길영은 별로 활약을 못 해서 그런지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그리고 민지원은. “방금 그건 대체 무슨······?”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왕이 되시려면 일단 역사 공부부터 좀 하셔야겠습니다.” 김유신을 부르긴 했지만, 나는 딱히 신라의 편도 백제의 편도 아니었다. 단지 계백을 상대하기에 김유신이 적절했기에, 그를 불러냈을 뿐. 어쨌든 예상보다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다. [간평의]의 성능도 충분히 점검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백제군이 가지고 있던 코인과 아이템 일부를 챙길 수 있었다. [54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코인 : 74950 C] 이제 네 번째 시나리오의 마지막 페이즈가 와도, 별로 두렵지 않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북쪽으로 움직이죠.” [가호의 지속시간이 3분 남았습니다.] 아직 김유신의 가호가 남아 있었다. 기왕 [간평의]를 사용한 거, 남은 시간까지 알뜰하게 사용해야 한다. 일곱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인데 뽕은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일어나라 용화향도여!” 부서졌던 용화향도의 무리가 다시 일어서자, 나는 검으로 북쪽을 가리켰다. “진군하라!” 마력 소모가 막대했기 때문에, 이제 용화향도의 운용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흙 속에서 깨어난 용화향도의 무리가 중소 규모의 그룹들을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며 북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고궁 박물관 쪽에 모여 있을 다른 왕들의 세력까지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대로변에서 난투를 벌이던 세력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질렀다. “뭐야, 이 해골 새끼들은! 우와악!” 퍼억! 퍼거걱! 나를 노리고 달려오던 화신들이 용화향도의 공격을 받고 으깨졌다. 어차피 내가 공격하는 게 아니니까, 실수로 죽여도 패널티를 받지도 않는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통쾌한 맛이 나지. 김유신의 진언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그대는 기묘한 데가 있군. 나의 진언을 듣고도 정신이 온전하다니······.] “제가 정신력이 좀 강합니다.” 둘러대듯 말했지만, 사실 나도 좀 놀랐다. 괜히 성좌들이 의사 전달에 ‘간접 메시지’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김유신이 아무리 성좌들 중에선 격이 낮은 위인급 성좌라 해도, 보통의 경우라면 진언을 듣는 것만으로 바지에 똥오줌을 지리거나 기절하기 십상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나도 좀 걱정을 했었는데······. [기억하라, 그대는 나에게 큰 빚을 졌다. 그대를 돕기 위해 나는 필요 이상의 개연성을 떠안아야 했어.] 뭔가 불길한 뉘앙스가 깃든 말투였다. 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 “그건 고맙게 생각합니다. 장군님의 도움은 대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성급한 친구군. 아직 이을 대(代)도 없어 보이는데······.] “······언젠간 생기지 않겠습니까? 자식을 낳게 되면 오늘의 일을 꼭 전승하겠습니다.” [그보다, 그대는 배후성이 없는 것 같군.]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젠장, 이 늙은 여우가 왜 계속 말을 거나 싶었는데.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든다. 그대만 괜찮다면, 나는 이번 세계에서 그대의 배후성이 되어 함께 세계를 주유하고 싶다.] 말은 멋지게 하지만, 이번 세계에서 나를 노예로 써먹겠다는 얘길 길게 풀어서 하고 있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어째서지? 내 힘은 충분히 보았을 텐데? 나의 성흔만 있다면, 그대는 이 시대의 최강이 될 수 있다.] [대화랑집결]이 좋은 성흔이라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김유신이 괜히 사가(史家)들에게 ‘여우’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이 시대 최강? 사기를 쳐도 작작 쳐야지. 설화급도 아닌 위인급 성좌가 그딴 소릴 내뱉다니, 제천대성이 들었다면 김유신의 머리털을 죄다 쥐어 뽑았을 것이다. “지금은 삼국 시대가 아닙니다, 어르신. 나이도 있으신데 이제 들어가서 쉬십시오.” 함께해서 즐거웠고, 이제 다신 보지 맙시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무대왕’을 향해 낄낄거립니다.] [3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김유신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아직 내 가호가 남아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현재 나와 김유신은 [간평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상태.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더니, 심상치 않은 기미가 보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한국의 위인이······? 아니지, 한국의 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빌어먹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상아가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독자 씨?” “유상아 씨. 떨어져요. 빨리!”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이 멋대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더니 유상아 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김유신이 내 몸에 강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행의 제약이 있다고 했었지? 어떤 제약인지 궁금하군. 내가 지금 저 여인을 죽여 확인해 봐도 되겠는가?] “김유신, 이건 당신의 의지입니다. 내 업보로 쌓이지 않아요.” [후후, 모르는 일이지. 칼이 꽂히는 순간 내가 가호를 해제한다면? 그래도 이것이 그대의 살행으로 인정되지 않을까? 그리고 보아하니, 저 여인은 그대에게 꽤 소중한 듯한데?] “······그만두시죠.” [약속하라. 다음번 ‘배후 선택’에 나 김유신을 고르겠다고.] 이 늙은 여우의 의도는 명백했다. 네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시 한번 <배후 선택>의 장이 열린다. 김유신은, 나와 접선한 기회를 틈타 서약을 받아낼 속셈인 것이다. 내가 ‘멸살법’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유신은 그럭저럭 괜찮은 성좌고, ‘대화랑집결’만으로도 시나리오 초중반에는 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배후성을 선택해서 일을 진행할 거였다면, 처음부터 제천대성을 뽑지 이제와 뭐하러 김유신을 택하겠는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나는 비형과의 계약 때문에 배후성을 선택할 수도 없다. 김유신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제법 기개가 있는 젊은이로군. 하지만 그건 잘못된 선택이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겠다.] 칼자루를 쥔 손이 마침내 유상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상아 씨, 빨리······!” 왜일까, 유상아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멋대로 움직이는 내 오른손을 보며, 나는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빌어먹을, 위인이라고 존중해줬더니 이 영감탱이가 진짜······.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성좌든 뭐든, 결코 네놈들에게 내주지는 않는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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