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62화 [성좌, ‘매금지존’이 당신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벌써 부하를 얻은 듯 자신만만한 눈빛의 민지원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싫은데요.” 순간 민지원의 눈빛이 흔들렸다. 화랑 몇 명이 입을 벌렸고, 배우인 민지원조차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돌아온 것은 멍청한 목소리. “······네?” 그녀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청각을 의심하는 쪽을 택한 듯했다.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쪽 부하 안 한다고요.” 2천 코인을 주고 자기 부하가 되라니, 이건 뭐 웃음만 나온다. 나는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갑시다. 갈 길이 급하니까.” 우리가 망설임 없이 돌아서자, 민지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코인이 부족하면 더 줄 수도 있어요. 제 배후성과 잘 얘기하면―” “필요 없습니다.” “기다리라니까요!” 다급했는지, 그녀는 직접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민첩 수치에 비해 제법 빠른 몸놀림이었다. “설마 2000코인의 가치를 모르는 건 아니겠죠?” 모를리가 있겠냐? 사이다 몇 번 터뜨려 주면 들어오는 게 2000코인이지. 민지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런 잘난 척할 여유는 없을 텐데요?” “······잘난 척?” “곧 후삼국 간의 전쟁이 시작될 거예요. 그쪽이 어떤 성좌를 배후성으로 삼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근의 중소 그룹들은 모두 정리될 거라고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내가 2000코인을 받고 그쪽을 받아줘도 모자랄 상황인데, 혹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가요? 나, 신라의 왕이에요. 곧 삼국을 통일할 왕이라고요!” 본인 연기에 너무 심취해서 맛이 가버린 모양이다. 하긴, 민지원은 원래 이런 설정이었지. 본래 뛰어난 배우인 그녀는 ‘진성왕’과의 깊은 동조 때문에 한동안 자기가 정말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래서 메소드 연기가 무섭다니까. “뭔가 시대를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지금은 후삼국 시대가 아닙니다.” “시대를 착각하는 건 그쪽이겠죠. 대한민국은 이제 끝났어요. 설마 아직도 구출을 기다리는 건 아니겠죠?” 분명, 방금 전까지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잘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요. 그리고 그 시대의 시작은 바로 나, 민지원으로부터 시작될 거예요.” 착각이었다. 헛소리도 맥락을 잘 이으면 그럴듯해 보이는구만. 이 여자를 어떻게 떼어 놓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유상아가 끼어들었다. “저, 여왕님?” “······뭐죠?” “제가 알기로 후삼국 중에 신라는 제일 약소국인데······ 역사대로라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어떻게 삼국 통일을 하시려고······.” 기습 공격을 당한 민지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쪽이 뭘 안다고 잘난 척이에요!” “저······ 한국사 1급이요.” “하, 한국사 1급······.” 당황한 민지원이 말을 더듬었다. “한국사 1급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만 갑시다 유상아 씨. 역사도 잘 모르시는 분 같은데.” 내 말에 민지원의 얼굴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기다려요! 내 제안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삼천 코인이면 어때요?”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삼천 오백! 삼천 오백까지 줄게요!” 단위가 오백으로 줄어들었다. 우리 여왕님의 자본 규모를 알겠구만. 역시 위인급 성좌는 유명세에 따라 재력이 천차만별이라니까. 나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삼천 육백, 아니 칠백······!” 걸어가던 내 발걸음이 멈췄다. 돌아보자, 민지원이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참 나쁜 놈이다. 그냥 가버릴 수도 있는데, 저걸 굳이 박살 내주고 싶은 걸 보면. 나는 그녀를 향해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히려 제가 제안하고 싶군요.” “무슨 소리죠?” “1만, 어떻습니까?” “······1만?” “아, 너무 낮게 잡았나요? 그래도 명색이 왕이니······ 그럼 2만으로 하죠.” 민지원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팔짱을 낀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요? 2만 코인? 설마 그쪽에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뇨, 제가 그쪽을 2만 코인에 사겠다는 뜻입니다.” “네?” “정확히는, 그쪽이 가진 모든 병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멍하니 입술을 벌리던 그녀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 그만한 코인이 당신한테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당신한테 없다고 해서, 남도 없을 거란 발상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궁금하군요.” 나는 검지와 엄지를 힘껏 튕겨 부딪쳤다. 그러자 검지의 끝에서, 광휘와 함께 내가 가진 코인의 일부가 형상화되었다. [20,000 코인] 간신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민지원이 마침내 무너졌다. “마, 말도 안 돼!”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불신이 경악으로, 다시 경악이 탐욕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2만 코인이면 종합 능력치를 엄청나게 올릴 수 있는 금액이니까. 후삼국 세력의 판도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금액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탐욕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자존심을 부수지는 못했다. “지금 나를 돈으로 사겠다는 말인가요?” “왜요, 안 됩니까? 제안을 먼저 꺼낸 건 그쪽인데요.” 내 말에 기함하며 앞으로 나선 것은 화랑들의 대장이었다. “감히!” 호리호리한 체구에, 선이 고운 미남. 근육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 저 남자······.” 유상아의 말과 동시에, 나도 깨달았다. 그랬지 참, 신라에는 이 성좌가 있었지. 신라라고 해서 후삼국전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지는 않다. 시대를 가리지 않고 본다면 유능한 장수는 꽤 있으니까. 가령, 김유신이라든가······ 문제는 이번 회차의 신라에는 김유신이 없다는 것이지만. “관창(官昌)은 좋은 성좌죠. 하지만 경솔하군요. 만약 제 성좌가 계백이라면 어쩌려고 그러시죠? 설마 황산벌을 재현하고 싶으신 건 아니실 테고.” 당황한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네놈······ 설마 백제의 끄나풀이냐?” [성좌, ‘임전무퇴의 화랑’이 당신의 발언에 노여워합니다.] 역시 이 녀석 배후성이 관창이었군. 임전무퇴의 화랑, 관창. 가진 성흔은 별거 아니지만 몰락한 왕국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끝내주는 성좌다. “백제는 아니고, 평범한 한국 사람입니다만.” “이놈!” “그쪽 애국심은 존중하지만, 조금 신중하게 구는 편이 좋을 겁니다. 저는 고작 2만 코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형상화 된 코인의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설픈 재력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압도적인 재력은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코인’의 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더욱.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민지원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빨리도 물어 보시는군. 물론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다. “민지원 씨, 세상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배우였던 당신이라면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이군요.”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돌아섰다. 일행들이 뒤늦게 나를 따라왔고, 처량한 민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 기다려요!”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나를 쫓아오지 못했다. 신라군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무렵, 유상아가 살짝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독자 씨,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그러세요.” “방금 그분, 유명한 분인가요?” 뜻밖의 질문이어서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예? 음······ 아마 그럴걸요?” “역시 그렇구나. 독자 씨도 성국 씨도 저분을 알아보시길래······ 저도 사극 나름 열심히 챙겨 봤는데 왜 전혀 기억이 안 날까요?” 왜 또 시무룩한가 했더니, 겨우 그런 이유였나? 이길영이 끼어들었다. “저도 몰라요 누나.” “앗, 하하. 그러니? 다행이다.”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민지원’이 소설 속에만 나오는 등장인물이라면 유상아나 이길영이 그녀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얘기니까. 문제는 이성국이었다. “이성국 씨.” “앗, 옙.” 여전히 뒤쪽을 흘끔대던 이성국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민지원의 미모가 어지간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까 민지원 씨 팬이라고 하시던데······?” “예? 하하. 그렇습니다. 모르셨나요? 유명한 배우신데······ 어?” 순간 이성국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어······ 민지원······ 씨? 어라? 제가 왜 민지원 씨를 알고 있죠? 아니, 원래부터 알고 있었나······?” 나는 곧장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 <인물 정보> 이름 : 이성국 나이 : 25세 배후성(背後星) : 늙은 시계추의 관리자 전용 특성 : 최면술사 (희귀) 전용 스킬 : [최면 Lv.3], [허세 Lv.4], [무기 연마 Lv.3], [특성 간파 Lv.2]······. 성흔 : [편안한 숙면 Lv.1] 종합 능력치 : [체력Lv.13], [근력Lv.13], [민첩Lv.17], [마력Lv.18] 종합 평가 : 현재 종합 평가가 진행 중입니다. + 이성국의 인물 정보를 보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이성국의 특성, ‘아홉 번째 하차자’가 사라졌다. “······이성국 씨?” “으어······ 옙?”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괜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 ‘멸살법’의 세계에서 특성이 소멸하는 경우는 오직 그 특성의 자격이 사라졌을 때뿐이다. 모든 ‘하차자’는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성국이 알고 있는 미래는 프롤로그에 가까운 초반뿐. 현재 시나리오의 전개는 그가 알고 있었던 정보를 넘어섰다. 그러자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모든 ‘하차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를 따라잡는 순간 단순한 [등장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비약 같지만 가능성 있는 가설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성국과 정민섭의 인물 정보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납득이 된다. 만약 그런 거라면······. 혹시, 언젠가 나도······? [등장인물 ‘민지원’이 당신에게 미약한 호감을 보입니다.] ······어이없는 메시지에, 쌓아 올린 상념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작아진 민지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제스쳐로 봐서는 화가 난 것 같은데. 그럼 이 메시지는··· 아니, 잠깐만. 왜 그 에피소드를 잊고 있었지? 갑자기 생각난다. 11회차였나, 유중혁이 저 여자를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뺨을 때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회차 내내 민지원은······. 젠장,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설마······ 아니겠지? 난 적어도 뺨은 안 때렸잖아. *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우리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지상을 주파해 광화문 근처의 빌딩 숲에 몸을 숨겼다. 인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텍본을 사간 왕들이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은 자명했다. ―다들 눈치 보다가 움직이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도 그때 맞춰 움직이죠. 나는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며 조금씩 이동했다. 어차피 다른 왕들의 목표야 빤한 것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입구에 도달하는 순간,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쓰레기다. 하지만, 그 중 단 하나만큼은 진짜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광화문 최강의 SSSSS급 아이템이, 바로 이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내가 쓴 글이지만, 보고 있으려니 손발이 오글거린다. 사인참사검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당연히 SSSSS급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그딴 급수는 없다. 그래도 사인참사검은 훌륭한 성능을 자랑하는 검이었고, 실제로 3회차의 유중혁도 초반에는 그 검을 애용했다. ―형, 그런 아이템이면 우리가 먼저 얻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없어도 돼. 사인참사검은 좋은 검이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다. 하지만 표절 작가나 다른 왕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사인참사검 정도면 초반에는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검. 녀석들은 반드시 사인참사검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계획은 간단했다. 놈들이 애먼 검을 노릴 동안, 다른 유물들을 차지한다. 문제는 녀석들이 언제 움직이느냐인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는 시나리오가 정체되면 반드시 움직이는 녀석이 있으니까. [후후, 이것 참. 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잘도 모여 계시군요.] 역시나.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중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착한 아이들에겐 상을 줘야겠죠?] 쿠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광화문의 중심에서 뭔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고색창연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단 하나의 왕좌(王座). 광화문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어떤 가이드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그 순간 모든 왕들은 깨달았을 것이다. 오직 단 한 명의 왕만이, 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 4 ― ‘왕의 자격’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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