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58화 [어떻게 되긴? 완전 뒤집어졌지 뭐. 너 대체 무슨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거야? 왜 상급 관리국에 의뢰해도 정보 열람이 안 되는 건데?] 나도 궁금하다. 내 특성창 좀 보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나한테 패널티 먹이래?’ [그딴 건 또 어디서 들어서······ 야, 내가 널 얼마나 열심히 변호했는지 알아? 관리자님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저 김독자란 놈, 절대 사기치거나 이상한 놈 아니에요! 그냥 엄청 열심히 하는 놈일 뿐이라고요!] 그것참 설득력 있게도 이야기하셨군. [다행히 내 간곡한 호소가 먹혔는지, 여러 가지 참작이 됐어. 지금까지 쌓아온 시나리오 전체를 분석했는데, 네가 가진 스킬 숫자가 몇 개 안 되는데다 숙련치도 낮다는 결론이 나왔거든. 자료 화면으로 봐도 시나리오 생태를 파괴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고.] 역시, 예상대로다. 내가 괜히 숙련계 패시브 스킬들을 안 익히고 있었던 게 아니다. 좋은 스킬을 많이 배울수록, 관리국의 주목을 끌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 말고도 다른 지역에도 시끄러운 녀석들이 몇몇 있어서······ 지금 관리국 정신없어.] ‘그러니까, 잘 해결됐다는 거지?’ [사실 태클 거는 놈들이 몇몇 있었는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대 도깨비’가 그냥 넘기라고 했대.] 뜻밖의 말에 놀랐다. ‘대 도깨비’까지 나설만한 일이었다고? [후······ 자세한 건 중급 도깨비한테 들어. 나 사실 여기 있으면 안 돼. 갑자기 보는 눈이 많아졌거든. 그리고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이 지역 관할 중인 중급 도깨비 녀석, 너한테 단단히 앙심을 품었어.] ‘앙심?’ [모르냐? 「개연성 적합 판정」은 너희로 치면 세무 조사 같은 거라고. 하여간······ 당분간 고생 좀 할 거다.] 비형이 사라지고 난 뒤, 허공에 커다란 스파크가 튀더니 예의 정장을 입고 있던 중급 도깨비가 등장했다. 잠시 우리 일행을 둘러 본 녀석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조금 마찰이 있어서 보상 지급이 늦었습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히든 시나리오 클리어 보상으로 3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5급 화룡종 최초 살해 보상으로 1500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최초로 소재앙을 해치워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護符)’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당신은 모든 이뮨타르 종족의 호의를 얻을 것입니다.] 다행히 보상은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 게다가 이뮨타르 종족의 호부. 지금 이걸 얻었으니, 앞으로 다가올 ‘다섯 번째 시나리오’도 시작이 나쁘지 않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다른 일행들도 클리어 보상을 받았는지 들뜬 얼굴들이었다. 그건 그렇고······ 자식이 쪼잔하네. 무려 소재앙급을 잡았는데, 겨우 이것 밖에 안 주냐? 그때, 중급 도깨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너무 열심히 활약해 주신 덕에, 시나리오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가 비꼬는 게, 불길한 말투였다. [관리국에서 논의한 결과, 해당 지역 화신들의 평균 기량이 시나리오 난이도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때문에, 제 임의 판단으로 해당 지역의 난이도를 임의조정하게 되었음을 공지드립니다.] ······뭐? 임의 조정? [네 번째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대폭 감소합니다.] 나를 보는 중급 도깨비의 입 꼬리가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니, 저 자식이? [네 번째 시나리오 종료까지 48시간 남았습니다.] [앞으로 48시간 안에 표적 역을 점거하지 않은 그룹 및 그룹원들은 모두 사망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희희낙락 아이템을 줍던 정민섭이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아마, 다들 메시지를 들은 모양이다. “지금 창신역을 가지고 있는 놈이 누구랬지?” “포, 폭군왕입니다.” 하필 서울 7왕인 폭군왕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충무로로 돌아갑시다.” 그나저나 유중혁 이 자식은 잘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슬슬 네 번째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러 가 봐야지. * 안국역부터 충무로까진 생각보다 거리가 있어서, 가는 내내 우리 일행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앞서 걸었고, 나와 이성국, 정민섭이 뒤쪽에서 걸었다. 화룡종의 시체는 전부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사체 중 절반 정도를 거래소에 올려놓았다. 나머지 절반도 역시 거래소에 올려놓았는데, 일부러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매겨 놓았다. 팔려고 올려놓은 것은 아니고, 거래소를 창고 대용으로 쓰기 위한 꼼수였다. 비형이 투덜거렸지만, 뭐 거기까진 내가 알 바 아니니까. 정민섭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표님.” 어째 저 ‘대표님’하는 소리를 아까부터 계속 듣다 보니 진짜 대기업 회장이라 된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다. “성함이 ‘김독자’셨던 겁니까?” “네.” “그것 참······ 성함이······.” “특이하죠?” “······예. 솔직히 저희보다 더 선지자 같으시네요.” 어쩐지 주눅 든 목소리였다. “후······ 그때 악플 달고 하차만 안 했어도······.” 얼씨구, 뒤늦은 후회까지. 그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계속 물어보려고 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정민섭 씨, 하차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예.” “당신들, 그러니까 <선지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모일 수 있었던 거죠?” 줄곧 이상하게 생각했던 지점이었다. 아직 초기 시나리오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벌써부터 단톡방을 만들어 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본 게 확실하다면, 놈들은 강서지역의 역들을 상당수 점거한 것도 모자라 히든 시나리오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상당한 수준의 무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성장세였다. “저희를 불러 모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불러 모아요?” “예. 첫 번째 시나리오가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에, 갑자기 제가 있던 역으로 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흥미롭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 시점에는 역들 사이에 결계가 쳐져 있었을 텐데. “그는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했고, 위대한 계시록을 읽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를 <선지자들>을 모집하고 있다고요. 이상한 점은, 그런 일이 다른 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도저히 한 사람이 행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튼, 그 <사도>를 통해 전부 모였다 이거군요. 그 자가 당신들을 단톡방으로 끌어들였고.” “예, 저희는 그 사도를 ‘첫 번째 사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녀석이 선지자들의 왕이죠? 자길 ‘하차자’라고 부르면 싫어한다는?” “아······ 벌써 거기까지 알고 계셨군요. 맞습니다. 그 사람은 자길 다른 이름으로 부르길 좋아한다더군요.” 다른 이름? “그자는, 스스로를 ‘참독자’라고 자칭합니다.” ······뭐라고? “왜 스스로를 그런 호칭으로 부를까 이야기가 분분했습니다만. 저희들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계시를 다 읽었다고 주장하는 걸 보면 이야기의 텍본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놈의 정체가 더욱 의심스럽다. 놈이 이용했을 걸로 추정되는 정보를 생각해 보면 도저히 ‘완독자’ 같지는 않았는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사이, 어느덧 충무로역이 가까워졌다. 날수로 따지면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충무로역의 알싸한 공기를 맡으니 어쩐지 고향이라도 돌아온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역으로 진입하려는 일행들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까, 나 아직도 알몸이었잖아. 왜 아무도 말을 안 해주는 거야? 나는 이성국을 향해 말했다. “이성국 씨, 바지 좀 벗어봐요.” 졸지에 팬티 바람으로 걷게 된 이성국을 뒤로하고, 나는 앞장서서 충무로역으로 진입했다. 멀리서 화색이 되어 나를 맞이하는 유상아의 모습이 보였다. 글썽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가슴이 짠하다. 뭔가가 도도도 달려와 폭, 부딪치는 느낌이 나더니, 어느새 이길영이 내 오른쪽 다리에 붙어 있었다. “잘 있었냐?” 먼지투성이가 된 이길영이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심한 이지혜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듯했고, 공필두는 나를 보자마자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성좌, ‘디펜스 마스터’가 당신의 늦은 귀환을 질책합니다.] 하마터면 자기 화신이 죽을 뻔했으니, 이해못할 반응은 아니다. “유상아 씨!” 충무로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는 이현성과 정희원이 깜짝 놀라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플랫폼 곳곳에 늘어진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실제로 유상아도 한쪽 어깨에 천을 둘둘 감고 있는 채였다. 철길 곳곳이 시체에서 흘러나온 혈흔으로 낭자했다. 치열했던 싸움을 보여주는 흔적들이었다. 정민섭이 더듬거렸다. “저, 저거 <사도>들 아닙니까?” 제각기 2번, 3번, 4번, 7번의 표식을 단 남녀의 머리가 나란히 전시하듯이 플랫폼 철길 위에 놓여 있었다.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 생전 그대로의 표정으로 박제된 얼굴들. 누구의 솜씨인지 알 만하다. 나는 이길영에게 물었다. “유중혁은 어디 갔어?” 말하기가 무섭게, 회현 쪽 터널에서 불길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겠다. 오만하고 당당한, 걸음 그 자체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유중혁?” 녀석은 나를 보고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극장 던전에서의 일이 있었으니 보자마자 뭔가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근데 저건 또 뭐지? 녀석의 손아귀에서 덜렁거리는, 잘린 사람의 머리. 누군가가 “히익”하는 비명을 질렀고, 그와 동시에 유중혁이 잘린 머리를 이쪽으로 던졌다. 장난감처럼 데굴데굴 굴러온 머리에는 ‘1’이라는 표식이 새겨진 케이프가 씌워져 있었다. 첫 번째 사도였다. 유중혁이 대단하긴 대단하다. 도망가는 이놈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버렸다 이거지. 절반의 안도와 절반의 불안이 동시에 엄습했다. 아직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런데 다음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너였구나! 내 계획을 다 망쳐버린 놈! 그렇지?” 잘려나간 머리가, 갑자기 내게 말을 시작했다. “우와악! 뭐야!” 바로 곁에 있던 정민섭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가 잘려도 살 수 있는 스킬은, <멸살법> 내에서도 극히 드물다. [불사지체] 같은 스킬이 있다면 가능하긴 하지만, 그 스킬을 쓴다고 해도 저렇듯 목이 잘린 상태에서 멀쩡할 수는 없다. 게다가 목이 잘린 부위에서 피도 흐르지 않는······. 잠깐만. 설마? 이성국과 정민섭을 통해 전해 들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곁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계시를 모두 읽었고, 자신을 ‘참독자’라 주장하는 녀석. 시나리오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서울 전역에 나타나 하차자들을 자신의 슬하에 끌어들인 녀석. 거기다 결계를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고, 목이 잘려도 죽지 않으며, 피도 흘리지 않는다······. “아바타(Avatar) 능력······.” 확실했다. 눈앞의 이 녀석은 가짜였다. 잘린 머리가 계속해서 말을 지껄였다. “와, 진짜 감탄했다. 유중혁을 사칭한 것도 모자라서, 사도들을 일망타진하고, 용까지 빼앗다니······. 너 정체가 뭐냐?” 그렇군. 이놈도 내 정체는 모른다 이거지? “넌 뭔데?” 내가 알기로, ‘멸살법’ 전체에서 ‘아바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물은 정말 극소수다. 그리고, 그런 특성을 얻게 되는 직군은 대개 정해져 있다. 주로 창작업에 종사하며,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아 해리성 인격장애나 자아분열이 자주 발생하는 직업.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놈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너, 혹시 ‘작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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