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56화 [육체의 재생이 시작됩니다.] 실수로 떨어트린 물감이 번져나가듯, 시야가 천천히 개어나간다. 주변의 명암과 채도가 불분명했다. 뼈와 모세혈관, 소화기와 호흡기, 안구가 통째로 재생되는 과정.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감각들이 혼란스럽게 엉켜들었다. 어쨌든, 충무로는 유중혁이 나섰으니 안심이다. 아무리 <사도>들이 강하다고 해도, 본래의 3회차보다도 더 강해진 유중혁을 이길 수는 없겠지. 그나저나······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다. 1인칭으로 유중혁이 되는 경험이라니. 가능하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죽음으로 인한 정신 충격을 상쇄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사용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사용 보상? 멀리서 소리치는 정희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붙잡고 있는 이현성의 경악한 얼굴.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며 충격에 빠진 정민섭과 이성국. 다행히, 일행들은 모두 무사하다. 너무 늦지 않은 것이다. “독자 씨!” 내 이름을 숨겨야 한다는 것도 잊었는지, 정희원이 외쳤다. 갸오오오오! 사실, 이젠 숨길 필요도 없겠지만. 흐으으으읍. 새롭게 만들어진 폐부에 공기가 차올랐다. 근처에는 아직도 무자비한 살해를 이어가는 레서 드래곤이 있었다. “역시 유중혁님!” “기사회생을 사용하신 건가?” 그 많은 선지자들 중 살아남은 것은 이제 극소수뿐. 물론, 나는 ‘기사회생’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각한 상처를 회복하는 것과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니까. [‘불살의 왕’의 특전이 완료되었습니다.] [카르마 포인트 100을 소진하였습니다.] [육체의 노폐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며 육체의 성능이 상승합니다.] [체력과 마력 레벨이 각각 1씩 상승합니다.] 거기에 부활 보너스까지. 이래서 ‘불살의 왕’이 사기다. ‘멸살법’ 전체에서도 이 특성을 얻은 사람은 미국의 셀레나 킴 뿐이었다. [현재 카르마 포인트 : 0/100] [다음 부활을 위해 포인트를 채우십시오.] [동족의 생명을 구해낼 때마다 1 카르마 포인트를 얻습니다.] ‘불살의 왕’의 특전은 ‘부활’이다. 물론 무조건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카르마 포인트’라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 첫 부활만큼은 100포인트를 제공하고 시작하기에 다행이었다. 갸오오오오!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살아나자마자 죽어줄 수는 없지. 포인트가 0이 되었으니 부활 특전은 당분간 쓸 수 없다. 마침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숫자 ‘2’가 적힌 발판. 다른 사람들은 벌써 각자 발판에 자리를 잡은 뒤였다. “현성 씨, 저쪽으로 가요! 우리가 옆 발판으로 갈 테니까!” 정희원의 빠른 판단에 이현성이 내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고열 속에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괜찮으십니까?” “보시는 대롭니다.” “······잠시 제 눈이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 라고 물어도 자세히 설명해 줄 시간은 없었다. [앱솔루트 실드를 발동합니다.] 눈앞에서 화르르륵, 하고 갈라지는 파멸의 불꽃. 예수님이라도 영접한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이현성을 향해, 내가 물었다. “현성 씨, 뭔가 걸칠 거 없습니까? 판초 우의나······.” “제가 군인이긴 해도 그런 것까지는······ 아.”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이현성이 내 몸을 훑어보았다. 부활을 한 건 좋은데, 하나를 생각 못했다. 그나마 보호구 역할을 하던 [외장 강화 수트]는 녹아버렸고, 잡다하게 주워 놓은 아이템들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즉, 나는 지금 알몸 상태다. “······아니, 그건 됐습니다.” 슬그머니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올리던 이현성의 손이 원상복귀했다. 사람이 아무리 희생정신이 강해도 정도가 있지. 어차피 당장 필요한 건 옷이 아니라 떨어진 아이템들이었다. ‘파멸의 불꽃’이라고 해도 [성유물]이나 시나리오의 핵심 아이템을 녹이지는 못한다. 실제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레서 드래곤의 발치를 굴러다니고 있었고, 시나리오 아이템인 [갈색 깃발]도 그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하필 저기에 떨어져 있다니··· 다른 사람도 쉽게 못 줍는 위치라 망정이지. 실드가 해제됨과 동시에 멀리서 일행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달려온 것은 정희원이었다. “독자 씨!” 나를 향해 달려오던 정희원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흑염룡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은근슬쩍 등을 돌려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살포시 어깨와 등을 덮는 촉감이 느껴졌다. “안 봤으니까 걱정마요. 지금 그딴 거 신경 쓸 때에요?” ‘그딴 거’라는 말에 조건반사처럼 몸이 움찔했다. 판초우의 같은 것이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거적이었다. [사명대사의 거적]. 그러고 보니 정희원이 이걸 갖고 있었지. “고맙습니다, 정희원 씨.” 지금은 이거라도 감지덕지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조금 서운해합니다.] “움직이죠.” 갸오오오오!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의 불뿜기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공격을 피했다. 정희원과 이현성이 먼저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달리는 내내 내 아랫도리쪽에서 덜렁거리는 ‘흑염룡’을 신경 써준 모양이었다. 거적이 생각보다 누추해서, 앞을 다 가리질 못했다. 눈치 없이 곁을 달리던 정민섭이 물었다.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대표님? 다른 <사도>들도 모두 죽어버렸는데······.” 정민섭의 말대로 남은 <사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 증거로 녀석들이 죽은 자리에 청빙환들이 남아 사리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소화 시간이 긴 아이템인데다, 열기에 강한 물질이라 불꽃에도 녹지 않은 모양이다. 휘이이익!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레서 드래곤의 앞발. “끄아아악!” 일행을 쫓아오던 두 명의 선지자가 고깃덩이처럼 으깨졌다. 나는 곧장 플랫폼 중앙을 가로질러 깃발과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넣었다. [‘갈색 깃발’을 되찾았습니다.] [깃발의 가호를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일행뿐이다. 이리저리 방법을 생각하는 사이, 벌써 발판 활성화 타임이 다가왔다. [숫자 발판들이 활성화됩니다!] “모여요!” 운 좋게 숫자 ‘5’가 뜬 발판이 활성화되었다. 문제는, 이번에 활성화된 발판이 하나뿐이라는 것. 허공에서 중급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아직도 잘 버티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계속 그런 운이 따라줄까요?] 다음번에는 이 발판 위에 뜬 숫자가 3이나 4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행은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하물며 6이 뜨는 경우에는······.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앱솔루트 실드를 가동합니다.] 간신히 10초를 또 벌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후우······, 저 망할 자식. 독자 씨, 어떡하죠?” 이현성과 정희원도 지친 모습이었다. 숨도 쉬기 힘든 고열 속에서 벌써 십여 분을 도망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아깐 못 잡는다면서요?” “저것만 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청빙환’을 가리켰다. 마침 청빙환의 숫자는 정확히 우리 일행과 같은 다섯 개. <사도>들이 준비해온 저 아이템을 먹는다면, 레서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다음 ‘전체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놈을 죽일 수 있느냐인데. [앱솔루트 실드가 해제됩니다.] “달려요! 그리고 일단 바닥에 떨어진 거 하나씩 주우세요!” 내 말과 동시에 일행들이 튀어나갔다. [마력에 4100코인을 투자하였습니다.] [마력 Lv.16 -> 마력 Lv.25] [당신의 영혼이 세계와 감응합니다!] 남은 시간에 폭딜을 넣기 위해서는, 근력보다는 마력을 올려야 한다. 나는 주워든 청빙환 하나를 꿀꺽 삼켰다. [냉기 속성이 일시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40%의 냉기 속성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데미지를 넣는 건데. 어떻게 한다? 무작정 달려드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현성은 [태산 부수기]가 있지만 민첩이 부족하고, 정희원은 민첩은 뛰어나지만 한 방이 부족하다. 놈의 취약부위를 공격하면 좋을 텐데. 혹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그런 건 못 보나? 아, 그러고 보니······.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미 사용 중입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의 보상 획득이 가능합니다.] 아까 ‘사용 보상’이 있다고 했지. [당신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경험하였습니다.] [당신이 몰입했던 주인공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뭐?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날아드는 레서 드래곤의 앞발을 미처 보지 못했다. 날쌘 정희원의 몸이 나를 밀쳤고, 내가 있었던 자리가 폭삭 내려앉았다. 콰아앙! “뭘 얼빠져 있어요!” 정희원의 핀잔이 날아들었지만,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몰입했던 주인공의 스킬 중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다. 이 말은 곧, ‘유중혁’ 녀석의 스킬 하나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획득할 수 있는 스킬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오호라, 선택지까지? 청빙환을 먹은 지금, 유중혁의 스킬 중 하나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호신강기나, 파천검도 같은 것만 가져와도······! [획득할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1. 냉기 저항 2. 화염 저항 3. 거짓 간파 ······제기랄, 그럼 그렇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 주어진 선택지들 중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거짓 간파’지만, 지금의 내겐 쓸모없는 스킬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유용한 것은 2번의 ‘화염 저항’인데······. 그오오오오오―! 포효하는 레서 드래곤이 화염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 행동이 끝나면, 이제 곧 ‘파멸의 불꽃’ 페이즈가 시작될 것이다. 생각하자. 나는 ‘독자’야. 내가 읽어온 것에 답이 있다. [특성 효과로 이미 읽은 내용에 대한 기억력이 상승합니다!] 머릿속에서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레서 드래곤의 공략법. 12회차, 14회차, 17회차의 일부 정보들.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 “독자 씨, 빨리······!” 서서히 눈을 감았다 뜬다. 그리고. “냉기 저항을 획득한다.” 결정을 내렸다. [스킬 ‘냉기 저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정희원 씨, 이현성 씨! 아직 청빙환 안 먹었죠? 나한테 전부 주세요.” “네?” “이성국, 정민섭! 너희도!” 청빙환을 막 입에 넣으려던 정민섭의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빨리!” “아, 넷!” 네 알의 청빙환이 금방 모였다. 나는 쏟아지는 화염을 피하며, 그것을 동시에 입에 털어 넣었다. 확신한다. 이것이 최선이다. [청빙환을 복용하였습니다.] [속성 중첩 효과로 청빙환의 속성 데미지가 증가합니다!] [200%의 냉기 속성 데미지가 추가됩니다.] [심장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당신의 전신을 뒤덮습니다.] 보통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청빙환은 영약 같은 이름과 다르게, 사실은 독의 일종이다. 한 알만 먹어도 한겨울에 알몸으로 있는 것처럼 오한이 깃드는 물건인데, 다섯 알을 먹으면 그 자리에서 동사하는 게 당연했다. 어디까지나, 보통이라면 그래야 했다는 뜻이다. [전용 스킬, ‘냉기 저항 Lv.5’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유중혁의 숙련치를 일부 계승한 모양인지, 시작부터 스킬의 레벨이 5다. “모두 내 뒤쪽으로 와요!” 나는 일행들을 향해 외치며 칼자루를 쥐었다. 종전에 유중혁이 되었던 기억 때문일까. 미묘하게 칼을 쥐는 감각이 달라졌다. [‘신념의 칼날’이 발동합니다!] 기이이잉!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특수 옵션이 발동합니다.] [에테르 속성이 ‘어둠’으로 변환됩니다.] [청빙환의 효과로 에테르 속성에 ‘냉기’가 추가됩니다.] 에테르 블레이드가 검푸른 빛을 띠었다. 냉기와 어둠의 중첩. 촤아아아악! 검푸른 에테르 블레이드가 불길을 가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근력을 폭발시켜 레서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부터는 총력전이다. [성흔, ‘칼의 노래’를 발동하였습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무작위로 깃듭니다.] 나오는 구절에 따라 버프 능력이 달라지는 칼의 노래. 제발, 이상한 구절만 나오지 마라. 「야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렇게 하면 패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건 또 무슨 구절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레서 드래곤’의 몸 곳곳이 다른 색깔로 보이기 시작했다. 몸피의 대부분은 초록색으로 보였지만, 유독 붉은색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의 전투를 응원합니다.] 그제야 충무공의 뜻을 알아챘다. 그렇구나. 저곳이 바로 놈의 약점이다. 나는 타오르는 길을 달려, 레서 드래곤의 날갯죽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첫 번째는 엷은 적색. 갸아아아아아! 몸부림치는 놈의 날갯죽지 밑으로 들어가, 뒷발의 아킬레스 건을 끊는다. 두 번째는 짙은 적색. 캬아아아아아! 꼬리를 피하며 뛰어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앞발이 나를 노리고 날아왔다. 퍼어억! [‘갈색 깃발’의 효과로 방어막이 활성화됩니다.] 불꽃은 막을 수 없지만, 평범한 공격이라면 몇 대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나는 포효하는 놈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그대로 칼을 꽂았다. 푸욱! 놈의 가슴은, 거의 핏빛에 가까운 적색이었다. 캬아아아아악! 레서 드래곤이 발악을 시작했다. 갈색 깃발이 만든 방어막이 순식간에 파괴되었고, 놈의 입에서 불꽃이 집결되기 시작했다. [5급 화룡종, 레서-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준비합니다.] 마침내 전체 공격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이제 실드는 없다. 기이이이잉! 마력 전부가 빠져나가며, 길쭉해진 에테르 블레이드가 녀석의 가슴팍을 난자했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폭발적인 냉기 데미지가 놈의 가슴에 작렬했다. 퍼버벅, 퍼버버벅! 하지만 놈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캬아아아아! 조금만 더. 캬아아아악! 조금만... [5급 화룡종,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가 ‘파멸의 불꽃’을 사용합니다.] 눈앞에서 끓어오르는 불꽃. 맞으면 죽는다. 멀리서 일행의 외침이 들렸다. 그 외침을 들으면서도, 나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러 댔다. 할 수 있다. 내 계산이 틀릴 리 없다. 말하자면 이건, ‘독자’의 오기다. 만약, 내가 유중혁이었더라면.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는 검격에, 날카로운 감각이 깃들어 온다. 기이이이잉!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었던 유중혁의 일검. 그 마법 같았던 한 수가, 머릿속을 강하게 잠식한다. 온 힘을 다해 움켜쥔 칼자루.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린다. 적어도 단 한 번. 그 ‘일검’의 티끌만이라도 흉내낼 수 있다면. 갸오오오오오―! 검이 움직였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살점이 폭발하는 소리. 눈앞을 적시는 레서 드래곤의 핏물과, 놈의 일격을 맞아 허공을 날아가는 내 몸. 고열의 먼지 바닥을 몇 바퀴나 구른 뒤, 참았던 울혈을 토해냈다. 고개를 흔들어 시야를 되찾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레서 드래곤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몸을 떠는 순간. 파스스슥. 타오르던 ‘파멸의 불꽃’이 조용히 꺼져가는 게 보였다. 거대한 녀석의 눈꺼풀이 한 번 꿈틀대더니, 육중한 거구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쿠웅! 놈의 심장에 꽂힌 신념의 칼날이 조용히 울고 있었다. [소재앙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를 최초로 퇴치하였습니다.] [최초로 다섯 번째 시나리오의 클리어에 기여하였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전신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 주먹을 움켜쥘 힘조차 없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 [불가능한 업적 달성으로 인해 보상 정산에 시간이 소요됩니다.] [일부 하급 도깨비들이 관리국에 「개연성 적합 판단」을 요청하였습니다.] 허공에 나타난 중급 도깨비가 고요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달콤한 보상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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