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55화 Episode 12. 1인칭 주인공 시점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죽음 중 하나가 ‘분신’이라는데, 방금 나는 그걸 겪었다. 뇌세포 속 뉴런이 일제히 발광하는 것 같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정신적 고통을 감쇄합니다.] 서서히 고통이 줄어든다. 이번에도 [제4의 벽]인가. 이 스킬의 도움으로 난관을 벗어날 때면, 언제나 이상한 기분이 든다. ‘멸살법’은 분명히 현실이 되었고,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매번 느껴지는 이 ‘벽’은, 대체 뭘까. ······.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됐다. ‘불살의 왕’ 특성은 무사히 얻었고, 나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동족불살(同族不殺)의 조건을 길의 끝까지 지켰을때에만 얻을 수 있는 특성, 불살의 왕. 이름과는 다르게, 사실 이 특성의 특전은 ‘불살’이 아니라 ‘불사(不死)’에 더 가깝다. 어디까지나 조건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제 곧 육신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확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전용 스킬 충돌 오류로 ‘불살의 왕’의 특전 활성이 지연됩니다.] ..응? 스킬 충돌 오류라고? [사망으로 인해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어어, 하는 느낌과 함께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아니 잠깐만. 이럴 때가 아닌데? 「“젠장, 그놈만 아니었더라도.”」 일순, 현기증이 몰려들며 사위가 밝아졌다. 그리고 나는, 어떤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십악 공필두는 플랫폼 안쪽을 서성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입술을 비죽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그걸 실천할 용기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으음······ 독자 형.” 무릎을 살포시 누르는 중량감에, 공필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열 살 남짓이나 되었을까.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잠든 소년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런 꼴이······.” 잠든 이길영의 보얀 피부를 내려다보던 공필두가 살포시 인상을 썼다. 간만에 예전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린아이. 분명, 그에게도 이길영 또래의 딸이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필두 씨, 이제 우리 그만······. ―아빠. 언제까지 땅 타령만 할 거야? 그도, 분명 가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땅을 사고, 그러다 투기에 손을 뻗고, 운이 좋아 건물주가 되고, 세입자를 들이고······. 마침내 충무로의 ‘큰 손’이 되었지만, 그 ‘큰 손’이 실은 작은 가정하나 지킬 수 없는 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외로 괜찮죠? 사람들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거.” 고개를 드니, 선이 고운 얼굴의 미인이 보인다. 유상아. 이틀 전, ‘충무로’의 부대표가 된 여자. “빨리 이 떨거지 데려가.” “조금 전까지 웃고 계셨으면서······.” 공필두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실룩였다.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유상아가 공필두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저씨, 근데 ‘땅’을 얼마나 많이 갖고 계셨어요?” “뭐?” “따지고 보면 ‘건물주 연합’은 전부 땅을 가진 사람들인데, 유독 아저씨만 ‘땅부자’ 특성을 얻으셨잖아요.” “······땅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좋은 땅이어야지. 순진하기는.” “그럼 좋은 땅은 어떤 땅인데요?” “비싼 땅이 좋은 땅이야.” “어떤 땅이 비싸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땅.” “아저씨가 가진 땅이 그런 땅이었어요?” “그래.” 내가 원한 땅은 아니었지만. 공필두는 자신을 바라보는 유상아의 눈을 마주보았다. 이 여자의 호기심은 묘하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뭐랄까. 알 수 없는 불편함을 품고 있달까. 투둑. 툭. 툭. 먼 곳에서 아주 얇은 실들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유상아의 안색이 굳어졌고, 공필두의 무릎을 베고 자던 이길영이 번쩍 눈을 떴다. 파르르. 이길영의 손등에 붙어 있던 바퀴벌레가 더듬이를 떨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4호선, 회현 쪽 터널.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상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공필두가 스킬을 전개했다. [등장인물 ‘공필두’가 스킬 ‘무장지대 Lv.8’를 발동합니다!] 위이이잉― 공필두가 입술을 깨물었다. 뭐랄까, 땅부자들만이 가지는 직감이랄까. 그런 게 있다. 이것은. “어이! 모두 모여!” 누군가가, 그의 땅을 빼앗으려 할 때의 느낌이다. 두두두두두! 공필두의 포탑들이 일제히 불을 뿜자, 어둠 속에서 피를 뿜으며 무언가가 쓰러졌다. 땅강아쥐들이었다. “적습이에요! 모두 공필두 씨를 중심으로 자리 잡으세요! 아침에 연습했던 대형으로 가겠습니다!” 유상아의 외침과 동시에, 플랫폼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달려왔다. “A조는 전방 포탑의 근처로, B조는 포화의 사각으로, C조는 공필두 씨의 곁을 지키세요!”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사람들이 미리 연습한 대열을 이루었다. 달려들던 땅강아쥐들은 사람들의 빠른 대처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긴급 방어전’을 치렀을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한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수십의 땅강아쥐들이 바닥에 쓰러지자, 충무로 그룹원들의 머릿속에는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쉽다. 역시, 모두가 협력하면 할 만한 거구나. 그리고, 터널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하멜른의 피리] 정도로는 안 되나?” “유중혁이가 먹은 곳인데 겨우 9급 지하종으로 비빌 수나 있겠냐?”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남녀가 나타났다. 네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공필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저놈들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다른 놈들이다. “빌어먹을······ 빨리 사무라이 계집애 불러!” “벌써 왔거든?” 서늘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새파란 장도를 꺼내든 이지혜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사무라이라고 하지 마. 천벌 받기 싫으면.” 툴툴대는 대답에도 불구하고, 공필두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지혜는, 그만큼 커다란 전력이 되는 존재다. 그럼에도 공필두는 불안했다. 불안했기에, 겁먹은 짐승처럼 먼저 으르렁거렸다. “너흰 뭐냐? 어디서 왔어!” “정말이었군. 해상제독과 무장성주가 한 팀이 되다니.”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공필두가 물었다. “무슨 헛소리냐? 빨리 전열을 물려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쏴 죽여버릴 테니까!” 그러나 다섯 남녀는 공필두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기들끼리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용잡이’에 차출된 게 누구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거기에 <사도>는 아니지만, 꽤 쓸만한 놈 하나.” “서울 바깥에 있는 놈들 빼면 남은 건 우리 다섯이군.” “우리 다섯이면 충분하죠. 빨리 쓸어버립시다.”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배가 불룩 나온 30대 사내였다. 어깨에 ‘7’이라는 숫자가 적힌 사내. 눈썹이 짙고 얼굴에 피지가 번들번들한 그는, 이지혜의 새하얀 다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내가 ‘해상제독’을 맡지. 바다만 없으면 저년은 별거 아니거든.” “뭐 이 새끼야?” 이지혜가 뾰족한 소리를 지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필두가 포탑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젠장, 그냥 다 뒈져라!” 두두두두두! 케이프에 ‘4’라고 쓰여 있는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십악은 십악이군. 조금만 늦게 왔으면 우리가 쓸렸겠어.” “세 번째와 네 번째. 너희들이 공필두를 맡아라. 절대 방심하지 말고, 가장자리의 포탑부터 하나씩 공략해.” 이마에 ‘3’을 써 넣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습니다. 십악쯤 되면 우리 둘은 가줘야죠.” “그리고 두 번째, 너는 나머지를 해치워.” 그 말에 뺨에 ‘2’라고 적힌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에 작은 피리를 쥐고 있는 여자였다. “난 왜 잔챙이죠?” “네가 맡는 게 가장 적절해.” “당신은 뭘 할 건데요?” 그러자 어두운 케이프에 ‘1’이 쓰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깃발 꽂이’를 점거하겠다.”」 잠깐 몰입이 흐려지며, 의식이 되돌아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 지난 번 ‘어룡’의 뱃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땐 유중혁의 모습을 봤었지. 그나저나 놀라웠다. <사도> 놈들이 준비를 많이 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가지고 온 아이템들만 봐도 놈들의 철저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필두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마력탄 분해 실드]에, 땅강아쥐들을 부리는 [하멜른의 피리]까지. 놈들은 정말로 충무로를 공략하여 유중혁을 손에 넣고, 이 세계를 집어삼킬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뭐, 뭐야! 해상제독이 초반부터 이렇게 셌었나? 이봐, 뭔가 잘못된 거 아냐?” 가장 먼저 앓는 소리를 낸 것은 일곱 번째 사도였다. 이지혜의 날카로운 검술이 일곱 번째 사도를 조금씩 압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시점의 이지혜는, 본래의 ‘3회차’에 나오는 이지혜보다 월등히 강했으니까. “젠장, 공필두 포탑이 이렇게 단단했어?” 곤란에 처한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두 번째 사도도, 유상아의 [실 묶기]와 이길영의 ‘묠니르의 천둥’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결국, 앞으로 나선 것은 ‘첫 번째 사도’였다.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충무로의 일행들을 향해 던졌다. 콰아아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충무로 플랫폼 일대가 폭발로 뒤덮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대량 살상 마력탄] 상위 괴수종들에게는 큰 타격을 주기 힘들지만,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더없이 강력한 대량 살상 무기. 강서와 강남 지역에서 등장하는 일부 재료들과 [도깨비 보따리]로 구입할 수 있는 몇몇 아이템들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병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놈이 바로, <사도>들의 ‘왕’. 놈의 등 뒤에 꽂힌 ‘보라색 깃발’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희뿌연 먼지 속에 드러난 충무로의 플랫폼.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놈들이 저걸 가지고 있다면, 전세는 이제 이쪽이 불리했다. 먼지가 가라앉은 곳에, 쓰러진 충무로의 그룹원들이 보였다. 날카로운 파편에 맞아 피를 토하는 사람들. 유상아와 이길영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방호벽]을 가진 공필두조차 기습을 온전히 피해내지 못했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휴, 이제야 맘에 드는 모양새가 됐네. 그렇지?” ‘일곱 번째 사도’가 교복이 찢어진 이지혜의 머리를 잡아 들었다. 전방에서 폭발을 맞은 그녀는, 일행 중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조연이면 조연답게 굴어, 응?” “개자식······ 커헉!” 배에 주먹을 맞은 이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이 년은 내가 가져도 되지?” “그걸로 뭐하게? 시간도 없는데.” “뭐 하긴? 내가 뒤쪽까진 못 봐서 모르겠지만, 어차피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한테 존나 따먹히다가 비참하게 버려질 운명 아니야?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이지혜의 작은 몸이 인형처럼 허공에서 흔들렸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도······와······줘.」 충동적인 분노가 머릿속을 휘감았다.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분명 이지혜는 ‘등장인물’이다. [전용 스킬, ‘제 4의 벽’이 희미하게 진동합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이라고 해서. [과도한 몰입으로 ‘제4의 벽’의 일부 기능이 제한됩니다.] 너무 몰입한 것일까. 일순 시야가 흔들리며 어지러운 구토감이 찾아왔다. [과도한 몰입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시점을 1인칭으로 변경합니다.] 사위가 그대로 한 바퀴를 돌더니, 의식이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나는, 정말로 충무로에 있었다. ······어떻게? 이지혜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순간, 플랫폼의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있었다. 느릿하게 시야가 움직인다. 나는 이지혜를 향해 걸어갔다. 정확히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천천히, 그러나 착실하게. 그녀와 내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곱 번째 사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넌 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느낌. 평소와 미묘하게 다른 시선의 높이와, 이질적인 오감(五感). 그 순간, ‘나’는 내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헛웃음이 나온다. 싫다. 진짜 싫은데. 이지혜의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였다. “아······.” 수백만 번도 더 반복해온 일을 하듯, 칼자루를 쥐는 나의 손. 그립에 감긴 손가락의 감각이 낯설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지어는 아름답기까지 한 발도(拔刀). 나는 생전 처음 느끼는 환상적인 감각에 전율했다. 소리 없는 칼날이 움직였고.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뭔가가 스쳐갔고. 뭔가가 잘려나갔으며.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지혜를 붙잡고 있던 ‘일곱 번째 사도’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휑해진 놈의 목 위로, 울컥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의 손이 움직여 떨어지는 이지혜의 작은 몸을 받았다. “아, 아······.” 꺽꺽거리는 이지혜를 가볍게 플랫폼 위에 내려놓는다. 몸을 일으키자, 눈을 부릅 뜬 사도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세 번째 사도였다. “너는······ 대체 누구지?” 우습다. 그보다 더 멍청한 질문이 있을까. 천천히 입이 움직였다. 마치 내가 원래부터 이 사내였던 것처럼. “나는 유중혁이다.” 세상에서 가장 냉혹하고, 가장 고독한 목소리. 마침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이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너희는, 모두 여기서 죽을 것이다.” 이제 충무로는 안전할 것이다. . . 유중혁의 몸에서 빠져나온 의식이, 천천히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해제됩니다.] [스킬 충돌 오류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지연되었던 ‘불살의 왕’의 특전이 재발동합니다.] [당신의 육신이 죽음 속에서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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