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548화
「표류 4일째.」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유중혁은 자신의 복부를 찌른 날카로운 파편을 발견했다. 유중혁은 침착하게 파편을 제거하고 선체를 점검했다.
「표류 6일째.」
유중혁은 방주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법 시스템은 먹통이었고, 주변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가까운 행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표류 11일째.」
방주에 내장되어 있던 몇몇 안전장치들이 소멸하면서, 유중혁의 몸에도 이상이 발생했다.
[시스템의 항상성이 깨진 상태입니다!]
[혼돈의 힘이 당신의 전신을 침식합니다.]
[당신의 설화가 조금씩 붕괴하고 있습니다.]
뭔가 문제가 발생했는지, 시스템을 통해 구현된 기능들이 모두 마비되었다. 유중혁은 차분하게 자신의 설화들을 점검했다. 다행히 그의 설화들은 모두 무사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감쌉니다.]
지옥의 불길이 추위로부터 그의 몸을 보호해주었다.
「표류 21일째.」
안나 크로프트가 입혀준 우주복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우주복에 내장된 보호 기능이 아니었다면, 육체가 망가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을 것이다.
유중혁은 어떻게든 방주의 동력원을 고쳐냈다. 썩 훌륭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방주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충돌로 인해 비축해두었던 연료통이 폭발해서, 방주는 이제 그의 설화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었다.
자동 항법 장치와 자율 항해 시스템은 고치지 못했다. 이제 그는 직접 운항을 해야 했다.
「표류 34일째.」
어떻게든 다시 항로를 찾아야 했다.
「표류 42일째.」
설화를 소모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깜빡 정신을 잃는 기간이 늘어났다. 어둠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었지?
일순간 목적이 흐릿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어떤 이야기를, 환생한 김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일행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를 되살리기 위해서.
왜? 김독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무엇이었더라.
「표류 58일째.」
방주의 창에 비친 추레한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본 순간, 유중혁은 잊고 있었던 질문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의 세계에서,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맞다. 그것을 김독자에게 물어보려고 했었다. 녀석은 무엇이든 알고 있었으니까.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는 김독자. 모든 것을 계획하고,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보기 위해 자신의 생을 던지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인간.
그런 놈이라면 알 것 같았다.
김독자라면, 유중혁 그 자신보다도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회귀가 끝난 회귀자는, 이제 무엇이 되는가.
이지혜는 밤마다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에게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악몽이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어쨌거나 그가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이제 사라졌고, 시나리오는 끝이 났다.
회귀자 유중혁은 자유가 되었다.
하지만 비로소 얻은 자유 앞에서, 유중혁은 자신이 결국 무엇을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표류 83일째.」
표류가 길어지면서 피부의 표면을 덮고 있던 설화들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우주 바깥으로 흩어지는 설화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항해는 계속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표류 102일째.」
유중혁은 한수영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읽으면, 이 시간을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표류 111일째.」
김독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유중혁은 희미한 기대감을 가졌다.
이 이야기 속의 김독자라면 그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차근차근, 유중혁은 김독자의 삶을 따라 읽었다.
그가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고, 모르는 내용도 있었다. 어떤 문장에 이를 때면 독서를 멈추기도 했다.
「주인공과 조연들이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홀로 이야기의 마침표 뒤에 남겨진 기분. 허무함과 배신감 속에서, 어린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쳤다.」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유중혁은 그 단어가 몹시 낯설었다. 한때는 알았는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엿본 0회차의 기억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그의 삶이 아니었다.
「표류 128일째.」
오직 ‘멸살법’에 의존하며 삶을 연명하는 김독자의 모습이 그에겐 낯설었다.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이야기 따위가, 어찌 삶을 지탱할 수 있는가.
「표류 154일째.」
유중혁은 조금씩 소설 읽기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자주 다시 읽는 대목도 생겼다.
「나는 적당한 기름기가 도는 뒷다리를 잡고, 통째로 살점을 뜯었다. 살점 사이로 은근하게 배어 나오는 육즙······ 나는 씹는 것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역시 책으로 읽는 것과 실제로 맛보는 건 다르구나.」
이제 막 시나리오에 진입한 김독자와 일행들이 땅강아쥐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이었다. 우주복 안의 코트에서 육포를 꺼낸 유중혁은, 그 대목을 다시 읽으며 육포를 뜯었다. 천천히 눈을 감으며 육질을 씹자, 지하철의 음습한 어둠 속에서 일행들이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표류 155일째.」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혼자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유중혁은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표류 211일째.」
유중혁은 혼자서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었고.
「표류 258일째.」
다시, 이야기를 읽었다.
「표류 279일째.」
유중혁은 김독자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표류 316일째.」
[당신의 설화들이 당신의 감정을 흡수합니다.]
한수영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소모된 그의 설화들이 잠깐씩 생기를 되찾았다. 소모되는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이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만 버틸 수도 없었다.
소설 속의 김독자가 말하고 있었다.
「“그러게, 끝까지 읽었어야지.”」
어떤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유중혁은 그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표류 333일째.」
불현듯 유중혁은 자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다.
「“설령 세계를 구해내도, 너는 구원 받을 수 없을 거다. 네가 세계를 구한 순간, 네가 버린 세계들이 너를 덮쳐올 거다. 하나의 세계를 구해도, 네가 버린 다른 모든 세계가 네놈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라고.”」
먼 우주를 바라보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이 1회차나 2회차였다면 어땠을까. 지난 생의 기억들을 모조리 잊었다면. 다른 회차의 삶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그는 지금처럼 헤매지 않고 답을 찾아냈을까. 지금처럼 고통받지 않아도 되었을까.
다른 이야기들처럼 ‘행복한 결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죽지 않기 위해 살아갈 수 있었을까.
쿠구구구구구.
방주의 선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주변으로 기감을 높이자, 후방에서 급습해오는 막대한 에너지의 후폭풍이 느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우주를 새하얗게 덮어오는 무리가 보였다. 그도 익히 아는 존재들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
세계선에서 버려지고, 시나리오에서 배척된 존재들.
어마어마한 ‘이계의 신격’의 파랑이, 이쪽을 향해 군집을 이룬 채 밀려오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공포의 냄새.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콰드득!
후방을 달리던 ‘이름 없는 것들’ 하나가 꿰뚫렸다. 족히 수천 개체는 되어 보이는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이, 양 떼를 몰 듯 ‘이계의 신격’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이름 없는 것들’이 사냥당할 때마다 해일 사이로 막대한 스파크가 발생했다. 점점 더 커지는 에너지의 폭풍. 이대로라면 휩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살려살려살려살려살려살려】
기어코 해일의 선발대가 방주를 추월했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이름 없는 것들’. 두족류를 닮은 그것의 눈동자가 흘끗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콰지직!
사냥개의 송곳니에 힘없이 몸통을 꿰뚫린 괴물. 그 괴물이 뿜어낸 새카만 설화 덩어리가 콕피트의 창문에 물감처럼 번졌다. 두족류의 괴물이 원망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스러지고 있었다.
언젠가의 유중혁 또한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그럼 나와 다른 사람들은 뭔데? 지혜 언니는, 현성 오빠는. 그리고 설화 언니는? 당신만을 위해서 싸웠던 사람들은, 당신에게 대체 뭐였는데?”」
그 순간, 유중혁은 자신의 ■■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회귀를 끝낸 회귀자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가 정말로 도달해야 할 결말은 무엇인지.
애초에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주의 콕피트를 개방합니다.]
콕피트를 열자마자 그를 향해 사냥개가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의 손잡이를 역수로 붙잡은 채 사냥개의 목을 날려버렸다. 갈라지는 이계의 파도가 그를 할퀴며 지나쳤다.
【뭐뭐뭐뭐뭐뭐뭐뭐】
【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너는】
흘러가는 ‘이름 없는 것들’들을 보며, 유중혁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읽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어쩌면 한수영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나의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끝나야 할 장소도 알고 있겠지.”」
이 이야기는, 환생한 김독자들에게 닿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그렇기에, 그는 다시는 지구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의 생존을 일행들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의 부재는 일행들에게 영원한 희망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수많은 세계를 파멸시킨 회귀자에게 어울리는 종장인 것이다.
【그르르르르······!】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쳐내며, 유중혁은 사라지는 이야기에 관해 생각했다.
“꺼져라!”
마력을 매질로 터져 나오는 사자후에, ‘이계의 신격’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있던 사냥개들이 고개를 들었다. 대열을 형성한 사냥개들이 일제히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팔에 구멍이 났고, 다리의 보호장구가 뜯겨 나갔다. 순식간에 넝마가 된 우주복 사이로 설화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있었다.
길었던 회귀행.
유중혁은 이것이 자신의 결말임을 알았다.
‘이것이 내가 보고 싶었던 끝이다.’
좀 더 훌륭한 결말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혹은 더 나은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유중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회귀자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결말은 없다는 것을. 어떤 분기에서 어떤 선택을 했든, 결국 후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걸.
그럼에도 후회하고, 또 후회한 끝에 결과를 번복하는 것.
【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너】
【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누구】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리고 적어도 몇 사람은, 그의 삶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
수천이 넘는 사냥개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속죄라도 하듯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의 일격 일격에 이름 모를 ‘이름 없는 것들’이 구명을 받았다.
전신에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망가진 수트에서 빠져나가는 설화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머리가 핑 돌며 시야가 깜빡거렸다. 유중혁은 마력을 쥐어 짜냈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절기(絶技).
파천유성결(破天流星決).
맹포한 검의 파편들이 유성우처럼 쏘아져 사냥개들을 꿰뚫었다. 하지만 검격을 피해 달려온 사냥개들이 있었다.
【크르르르릉!】
다음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리에 부딪치며 얼굴을 보호하던 장구류가 부서졌다.
[경고합니다! 당신의 설화가 흩어지고 있습니다. 방주로 복귀하십시오!]
[당신의 설화가······.]
부유하는 핏방울들이 얼어붙고 있었다. 사냥개들이 그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뜯겨 나가는 설화의 파편들 사이로, 한수영이 써준 이야기들이 부서지고 있었다.
‘······미아야.’
별가루처럼 흩어지는 설화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아무도 상상해주지 않는 고독한 우주를 가만히 생각했다. ‘이름 없는 것들’이 공허한 눈으로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쌓아온 이 이야기도 언젠가 잊힐 것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중혁은 마지막 힘을 다해 칼자루를 붙잡았다. 허벅지를 문 사냥개의 목을 찌르고, 몸통을 베었다.
회귀자는 오직 후회할 뿐, 포기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그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방법.
그것은,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콰드득!
무언가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시야가 붉어졌다.
천천히 감기는 눈.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츠츠츠······.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눈앞의 어둠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환시일까. 건너편에 무언가가 있었다. 새하얀 설화의 파편 사이로 흩날리는 흑색 코트 자락.
【한심한 꼴이군, 3회차.】
그곳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도와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