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화

547화 본래였다면 초고가 완성되는 시일은 길게 잡아 2년 남짓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선에는 그만한 여유가 없었다. ―시스템이 힘을 잃는 속도가 너무 빨라요. 이번 주를 넘기면 이제 방주를 쏘아 올릴 설득력이 부족해질 수 있어요. 결국, 한수영은 2부까지의 원고를 탈고한 시점에서 1차 전파를 시작하기로 했다. 드디어 원고 발송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에, 일행들도 들뜬 분위기였다. 유상아가 물었다. “파일은 어떻게 담아갈 거죠? USB?” “여러 수단을 준비하긴 할 건데······ 기본적으로는 설화의 형태로 가져가야 해.” “전달은 누가 할 건데요?” “당연히 나지.” “안돼요. 수영 씨가 가면 이곳의 독자 씨는 어쩌고요?”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김독자라 해도, 그 역시 김독자다. 만약 김독자에게 무슨 일인가 생겼을 때 관리국의 설화를 가지고 있는 한수영이 없다면, 그의 본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유상아가 말했다. “내가 갈게요. 나는 독자 씨가 환생한 세계선의 좌표를 알고 있어요.” 그러자 정희원이 만류하며 나섰다. “상아 씨는 여기 지켜야지! 내가 갈게. 좌표 알려줘.” “아냐! 형은 내가 만나러 가겠어!” “당연히 아저씨의 화신인 내가 가야죠!” “아니지, ‘구원의 마왕’에 관해서라면 제일의 권위자인 내가······!” 이길영과 신유승, 심지어 장하영까지 나서자 장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성좌들도, 화신들도 서로 자기가 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 일행들을 보며, 유상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 아니에요. 세계선을 넘는 게 위험한 일이란 건 다들 알고 계시죠?” “그거야······.” “제가 추적한 게 맞다면 세계선의 좌표는 우주의 최외곽 지대에 있어요.” “최외곽 지대?” “‘시나리오’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세계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김독자가 환생한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곳의 지구와는 근본 체계부터가 다를 수도 있었다. “시스템의 가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약해질 수도 있어요. 그럼 스킬이나 성흔의 힘도 자연히 약해지겠죠. 항해 거리도 만만치 않을 거고요.” 이야기를 듣던 안나 크로프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시험 비행 중인 방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1인용으로 만들어진 거라 설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특히 암흑 단층을 지날 때 후폭풍을 견디는 게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계의 신격’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계의 신격. 그 말에 몇몇 일행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을 쫓아오던 ‘심연을 좇는 사냥개’들을 떠올린 것이다. 심지어 안나 크로프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혼이 흩어진 세계선도 너무 많습니다. 적어도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번 이상 세계선을 넘어야 할 수도 있는데······ 다들 그만한 각오는 된 겁니까?” 수십만 번. 하루에 세계선을 하나씩 넘는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몇백 년이 넘는 항해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김독자를 위해서라고 해도, 그만한 세월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너희들은 무리다.” 시스템의 가호를 최소한으로 받아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 아득한 시간의 격류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리하여, 일행들 중 이 미션을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내가 가겠다.” 탑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마침내 최후의 방주의 이륙일이 다가왔다. 한수영은 멀리서 한창 출발 준비 중인 유중혁을 보고 있었다. “이딴 건 입지 않는다.” “패왕, 입어야 합니다. 당신도 이제 예전과 달라요.” 5년 전의 김독자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다. 예언자가 회귀자를 챙기고 있다고 말하면,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 귀찮게 하는군.”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초월좌라고 해도 시스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게 아닙니다. 초월좌는 시스템에 대립하며 성립하는 존재. 시스템이 사라지면 초월좌의 힘도 조금씩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중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안나를 노려보다가, 이내 장비를 하나둘 걸치기 시작했다. “전투에 불편한 복장이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잖습니까.” 두툼한 우주복을 입고 뚱뚱해진 유중혁의 모습은 그야말로 볼 만했다. 한수영이 놀리듯 말했다. “잘 어울리네.” “······시끄럽다.” “잘 생각해. 진짜로 갈 거야?” 출항을 앞둔 이 시점까지도, 한수영은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 일은 아닐까.」 이번 항해는 지금까지의 회귀나 세계선 도약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과거를 바꾸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세계선에서 [최후의 벽]을 열 재료를 탈취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말하자면 순례행에 가까웠다. 그들이 그토록 찾아온 사람을 기리는 순례행. “원고를 내놔라.” “그놈의 말버릇은 회귀를 멈춰도 그대로네.”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오른손을 펼쳤다. 그동안 그녀가 개발한 성흔의 힘이 그 손끝에 감돌고 있었다. [성흔, ‘클라우드 시스템’이 발동 대기 중입니다.] 언젠가 [제4의 벽]이 김독자에게 파일을 줬던 것과 흡사한 방식. 불확실하지만 세계선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예상 표절]의 힘을 발전시켜 만들어 낸 성흔이었다. “이 성흔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는 원고 공유가 가능해. 몇 번이나 지구를 왕복하긴 힘들 테니까, 클라우드로 원고를 계속 보내줄게.” “네놈의 고유 성흔을 배우란 거냐? 지금 그럴 시간이―” “시간이 없지. 하지만 이 성흔은 금방 배울 방법이 있어. 너 지금 배후성 없지?” 순간, 유중혁은 한수영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깨달았다. “네놈 지금―” “나라고 좋아서 이러겠냐?” 유중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자신의 특성창을 띄웠다. 그의 성흔인 [회귀]가 사라질 때, 그의 배후성도 함께 사라졌다. + 배후성(背後星) : 없음 + 그는 이제, 완전한 자유의 몸이었다. “나보다 나약한 놈을 배후성으로 삼으란 건가?” “전에 내가 이겼잖아.”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군.” “또 붙어 볼래?” 한 마디도 안 지겠다는 듯 다투면서도, 두 사람은 [배후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되었습니다!] [화신, ‘유중혁’이 성흔 ‘클라우드 시스템’을 계승했습니다.] [두 존재의 가상 클라우드가 연결되었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네. 김독자 그 자식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귀환하게 되면 네놈을 죽이고 배후 계약부터 해지할 것이다.” “그럴 수 있으면 한번 해 봐.” 그 말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명심해. 절대 다른 세계선을 파괴하지 마. 그냥 이야기만 퍼뜨리면 돼. 그 세계의 김독자가 읽을 수 있게.” “알고 있다.” “죽지 마라.” “금방 오겠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구태여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빠.” 울먹거리는 유미아가 유중혁의 우주복을 붙들었다. “거짓말! 안 돌아올 거잖아! 못 돌아올 거잖아!” “나는 너를 두고 죽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미아의 어깨를 한수영이 굳게 쥐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동생과 눈을 맞춘 유중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한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돌아서는 유중혁이 한수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아를 잘 부탁한다. 유중혁은 그 뒤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최후의 방주]에 탑승했다. 안나 크로프트의 신호와 함께, 방주의 시동이 걸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일행들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는 방주. 콕피트가 닫힌 방주 안으로 일행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헐떡거리며 달려온 이지혜가 이륙을 시작한 방주를 올려다보았다. “인사 안 해?” “지금 인사하면 왠지 마지막 인사 같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이지혜의 눈은 이미 그렁그렁한 상태였다. 다른 일행들도 방주를 올려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상아가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은 소설 속에 모두 있으니까요. 중혁 씨도 언젠가 그걸 읽겠죠.” “쟤가 읽는 게 뭐 중요해요. 형이 읽는 게 중요하지.” 이길영, 신유승, 정희원, 이현성, 장하영, 유상아, 이설화, 이수경, 공필두. 거기에 성좌들까지. 모두가 방주의 비행을 지켜보았다. 신유승이 물었다. “독자 아저씨가 정말 우리 이야기를 읽어줄까요?” 모른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고, 유중혁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먼 우주의 먼지로 사라질 수도 있다. 떠나는 유중혁 역시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떠났다. 유중혁 그 자신을 위해서. 혹은 일행들을 위해서. “김독자라면 읽겠지.” 적어도 유중혁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의 사람들은 그의 소식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나랑 약속했거든.” 은하를 향해 도약하는 방주의 불꽃. 다른 외계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탐험선을 보듯이, 일행들은 멀어지는 방주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그들의 생으로 쓴 이야기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방주’가 대기권에 진입합니다.] [사용자 유중혁의 목적지 설정을 기다립니다.] 유중혁은 유상아가 알려준 세계선의 좌표들을 입력했다. 가장 가까운 세계선 좌표조차 까마득하게 떨어진 곳이었다. 유상아의 말대로, 그곳에는 <스타 스트림>이 없을지도 모른다. [차원 가속을 시작합니다.] [필요한 에너지의 일부를 코인으로 대체합니다.] 다른 세계선에서 모아온 코인들이 에너지원으로 투입되었다. 시스템이 약화되면서 코인 또한 가치를 잃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대했던 설화였다. 지구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세계선 도약을 위해 암흑 단층을 통과합니다.] 유중혁은 유상아의 말을 떠올렸다. ―독자 씨가 환생한 세계선들은 굉장히 멀리 있어요. 평범한 방식으로 세계선 도약을 했다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에요. 김독자가 환생한 세계는 ‘멸살법’의 바깥. 이 세계선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곳이었다. ―아마 세계선을 도약할 수 있는 ‘문’을 경유해야 할 거예요. 얼마나 지났을까. 전방에 하나둘 거품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색의 거품들이 심상치 않은 기류 속에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온한 감각. 유중혁은 이 감각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았다. 츠츠츠츠츠······. ‘이계의 신격’의 부왕(副王)이자, 세계선을 넘는 차원문의 주인. 언젠가 김독자에게 1863회차의 문을 열어주었던 존재.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눈앞의 대상은,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 한 그조차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너 는 ······ 모 략 이 아 니 군】 거품의 바다 사이로 거대한 눈동자가 보였다. 유중혁은 그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방주의 속도를 높였다. 최외곽지대의 세계선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길 지나쳐야 했다. 【그 곳 은 이 야 기 의 바 깥 이 다】 “상관없어.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유중혁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갈아 넣으며 방주를 돌진시켰다. 부왕은 딱히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공허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꿈 의 바 깥 을 꿈 꾸 는 자 여 네 가 꾸 는 꿈 은 이 룰 수 없 다】 문과 충돌하는 순간 눈앞의 시야가 이지러졌다. 유중혁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을 덮쳐오는 폭풍을 견뎌냈다. 맹폭한 스파크가 그의 전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유중혁은 전신이 산산이 으깨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참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어지러워진 머릿속으로, 한수영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넌 왜 그렇게까지 김독자를 구하려 하는 거냐? 이미 동료는 많이 잃었을 텐데. ―동료를 많이 잃어봤다고 해서 상실이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방주의 내부에서 폭음이 터졌다. 부서진 기기의 파편들이 우주를 부유하고 있었다. ―놈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다.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려 퍼지며, 뭔가가 유중혁의 폐부를 찔렀다. [세계선 좌표를 읽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경고합니다! 좌표 인식 장치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선체 내부의 온도 조절 장치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 . [선체의 항해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스파크가 유중혁의 전신을 점령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며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있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