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546화
Epilogue 5. 영원과 종장
한수영과 유중혁은 들것에 실려 김독자가 있는 병원에 입원했다.
이설화의 잔소리를 한바탕 들으며, 한수영은 머릿속으로 생각한 계획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뒤, 그녀는 가능한 정확한 단어와 비약 없는 문장으로 일행들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정확히 말한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그걸 정확히 듣는다는 법은 없다. 고로 일행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뭘 하자고?”
정희원은 그렇게 되물었고, 신유승과 이길영은 자그맣게 입을 벌렸다.
한수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지금 무슨 말 하는 건진 알고 있는 거지?”
“······어? 이해했냐?”
“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 2년 전 기억을 벌써 잊었어? 집단 회귀 때 우리가 어떻게 됐는지······.”
“회귀하자는 게 아냐.”
“그거나, 그거나! 또 세계선을 넘게 되면―”
“다른 세계선의 미래를 뒤틀어버리자는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잖아. 그냥 그쪽에 소설 하나를 전해주자는 것뿐이야.”
묵묵히 대화를 듣던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다른 세계선의 독자 아저씨한테 이쪽에서 쓴 소설을 보여주자는 거죠? 제가 이해한 게 맞아요?”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한수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가장 오래된 꿈’은 김독자야. 그리고 그 김독자는 잘게 부서져서 세계선 전역으로 흩어져 다른 존재로 환생했어. 여기까진 이해하지?”
“······F 좀 받았다고 내가 진짜 바본 줄 알아요? 그래서요?”
“중요한 건 여기서부터야. 새롭게 환생한 김독자는 더 이상 ‘김독자’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오래된 꿈’도 아닌 건 아냐.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그 영혼들은 여전히 이 우주를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꿈’이야.”
그들이 마지막으로 [최후의 벽]에서 탈출했을 때, 지하철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주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즉, ‘가장 오래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때 김독자였던 영혼들은 이제 전 우주로 흩어져 환생했고, 환생한 곳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 우주들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유상아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상상력을 이용하자는 거군요.”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은 곧 현실이니까.”
“환생한 독자 씨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결말을 꿈꾸게 한다······.”
“맞아. 우리가 상상의 원천을 제공하는 거지. 이 세계의 결말을 그들이 꿈꿀 수 있게.”
한수영은 일행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야. 다른 세계선에서 태어난 누구도 해치지 않을 거야. 그냥 우린, 그 녀석들이 어떤 이야기만 읽게 만들면 돼.”
세계선에 흩어진 수많은 김독자들을 상상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났을 이들.
그들을 만나는 것도, 그들을 데려오는 것도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일행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적뿐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를 다시 불러올 기적.
허구라도 좋으니,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상상해준다면.
그 수많은 ‘김독자’들이, 단 하나의 우주를 상상해준다면.
잠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일행들의 얼굴에 비슷한 표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계획이 실현 가능할 리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한 난관이 몇 개나 있었으니까.
일행들을 대표해서 입을 연 것은, 30분 전 귀국한 이현성이었다.
“수영 씨.”
유중혁과 한수영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한국으로 돌아온 이현성. 언제나 정의와 투지로 타오르던 그의 눈동자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지쳤습니다. 이제 희망이 두렵습니다.”
사람을 정말 지쳐버리게 만드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이루어질 듯 말 듯,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이다.
한수영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말아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부탁이라는 말에 이현성의 눈가가 흔들렸다.
한 번도, 한수영은 그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나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건 알아. 그러니까 이건 그냥······ 일종의 의식이야. 지나간 일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 내가 남은 생을 어떻게든 잘 살아가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야.”
정희원이 물었다.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한수영은 대답 대신 병실의 간이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뒤 텍스트 파일 하나를 열었다. 일행들도 잘 알고 있는 파일이었다.
아직 제목이 ‘무제’로 남아 있는 소설.
한수영은 천천히, 그 소설의 제목을 타이핑했다.
*
그날부터 한수영은 일행들과 함께 집필에 착수했다. 한수영이라고 해서 모든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에,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서는 일행들의 기억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을 독자 아저씨한테 읽힌다······ 근데 어떻게 읽게 만들죠?”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읽게 만들어야 해. 자신이 이 세계를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엄청 재밌는 이야기를 써야겠네요.”
“독자 형은 재미없는 소설도 끝까지 다 읽었다며. 대충 써도 읽어주지 않을까?”
깐죽거리는 이길영을 보며, 한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혹시 모르니 최선을 다해봐야지. 다른 세계의 김독자는 인내심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니까.”
“저도 도울게요!”
“나도! 누나 요즘 10대들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지?”
소설은 주로 김독자의 병실에서 작성되었다. 한수영은 학교에서 강의를 한 후, 틈이 날 때마다 김독자의 병동을 찾았다. 다른 일행들 역시 돌아가며 병실을 찾아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내일 발표가 있어서―”
“끝나고 나서 도와줘도 돼.”
“안 돼요. 오늘 내 각성 장면이잖아요!”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이지혜는 한수영이 쓴 지난 원고를 살피며 계속해서 조잘댔다.
“와, 여기 진짜······ 하, 나 진짜 죽을 뻔했었는데.”
“······.”
“크으, 여기 다시 봐도 쩐다. 언니, 혹시 또 나 나오는 장면······.”
“자꾸 방해할 거면 그냥 가라 너.”
“아 왜 그렇게 쌀쌀맞아요? 나 설정 오류도 찾아왔는데.”
“오류? 어디?”
“나 이렇게 말 한 적 없어요!”
이지혜가 화면을 가리켰다. 곁눈으로 이지혜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한수영이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극장 던전에서 이지혜가 말하는 장면이었다.
“피치 못할 각색도 좀 있으니까 실제랑은 약간 다를 수도 있어. 근데 거긴······.”
「“네가 왜 혼자야? 우린 함께라고! 아니 잠깐만······ 네 곁엔 늘 내가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우리 아이를 생각······!”」
“우리엘이 알려준 그대로 쓴 건데.”
하루, 이틀, 사흘. 문장은 착실하게 쌓여 갔다.
과거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으면 잠든 김독자의 볼을 한 번씩 쭉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그러다 괜스레 원망이 커질 때면, 이상한 내용을 소설에 적기도 했다.
「“못 생긴 왕을 찾아!”」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를 테니까.
일행들은 고해성사라도 하듯 돌아가면서 병실을 찾아왔다.
“사실 이때 독자 씨 욕을 좀 했는데······.”
“아, 방금 그건 쓰지 마. 알겠지? ······쓰지 말라니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듯했고.
“아니, 누나! 내가 형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광신도처럼 표현해놓으면 어떡해?”
자신이 그 이야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 듯했다.
종종 울거나, 앞으로 써야 할 이야기의 단상들을 모아놓은 메모들을 읽기도 했다.
신유승이 물었다.
“근데 회귀는 왜 이렇게 부정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그 세계에서 김독자 인생은 한 번뿐이니까. 이거 보고 이상한 영향 받을 수도 있잖아. 아직 어린애일 수도 있는데.”
한수영의 말에 신유승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우린 회귀했잖아요. 그럼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게 쓰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냥 쓸 거야.”
“네? 왜요?”
“인간은 누구나 회귀자거든.”
얼마 전 유중혁과 싸우다 떠올린 문장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신유승이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문장을 바라보던 신유승이 창밖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회귀는 이 세계선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어요. 가끔 생각하면 꼭 어젯밤의 꿈처럼 느껴져요. 현재를 바꾸지 못한 과거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망상은 차이가 뭘까요?”
조금 놀란 한수영이 떨떠름하게 입을 뻐끔거리자, 신유승이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했다.
“너무 어렵게 썼다가 독자 아저씨가 못 알아들으면 어떡해요?”
“······김독자는 알아들을 거야.”
“은근히 아저씨 믿으시네요.”
“방해할 거면 이제 그만 가.”
“저 그동안 있었던 일들 모두 정리해 왔어요! 전에 물어보셨던 ‘범람의 재앙’에 관해서도······.”
모두가 신유승처럼 협력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일행들은 글쓰기에 방해만 됐다. 예를 들면 장하영의 경우.
“야! 나 2부 주인공이라며! 비중 뭔데? 장난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네가 진짜 주인공은 아니잖아.”
“아 그래도!”
“외전으로 써줄게. 분량 빵빵하게.”
“콜.”
침대차를 밀며 지나가던 이설화도 한마디를 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힐러들은 그냥 힐셔틀이더라구요.”
“······이설화 외전도.”
거기에 학교를 땡땡이치고 찾아온 이길영과 억울하다는 듯 아우성을 치는 이현성까지.
“내가 아바돈과 계약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다 생략됐잖아! 그리고 내 스킬이 얼마나 많은데 난 뭐 맨날 바퀴벌레만―”
“제 군생활 이야기가 완전히 편집됐습니다! 제가 이병때 일부터 열심히 설명해드렸는데······!”
“다들 그만 좀 해! 이건 김독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라고. 너희 이야기가 아니란 말이야.”
한수영의 소식을 들은 성좌들도 하나둘 찾아왔다.
예를 들면,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무장하고 정체불명의 문서를 한가득 안은 우리엘.
[이런 걸 쓰고 있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줬어야지. 내가 이만큼이나 방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데!]
“······이 자료 믿을 수 있는 거 맞아? 이지혜가 말해준 거랑 다르던데?”
[아니, 뭐, 쪼오금 틀릴 수도 있지만, 이 우주는 넓고, 많은 세계선에 많은 김독자가 살고 있고―]
이어서 제천대성.
[내 설화에 관해 쓸 거라면 서유기 완역판 정도는 읽었겠지?]
“만화로 읽었어.”
[그럼 서유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겠군.]
“삼장법사 아니냐?”
심연의 흑염룡.
[실망이군. 내 진명은 까먹은 거냐? 왜 2부가 됐는데도 내 진명이―]
“알려준 적 없잖아. 그리고 알려주지도 마.”
그렇게 대략 250화가 넘는 분량의 초고를 완성했을 무렵, 한수영은 누적된 피로로 거의 탈진할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소설을 쓰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퇴고가 필요한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량을 쌓는 것이 먼저였다. 왜냐하면······.
―한수영, 이번 주 토요일이에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