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화
545화
한수영이 외쳤다.
“멍청한 자식아! 잊었어? 이 세계선의 방주는 이미 옛날에―”
유중혁의 검세가 한수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아차 하는 순간 쥐고 있던 단검이 허공을 날았다. 베인 찰과상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유중혁의 칼이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중혁 씨! 잠깐만요!”
“아니 사부! 돌았어? 이게 대체 뭔 난린데!”
뒤늦게 쫓아온 일행들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들 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검을 그었다. [흑천마도]에서 뿜어져 나온 가공할 마력파가 접근하던 일행들의 한 걸음 앞에 불타는 선을 그렸다.
“아무도 넘어오지 마라. 넘어오면, 모두 벤······.”
콰득!
순식간에 올려 찬 한수영의 왼발이 유중혁의 손목에 적중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흑천마도]가 궤적을 그리며 바닥에 꽂혔다. 한수영이 말했다.
“유중혁. 너도 알겠지만······ 나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 흐리는 걸 정말 질색하거든.”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 기분이 꽤 괜찮았어. 정확히는 네가 이딴 짓을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근 2년간의 평화가 너무 달콤했나 봐. 네가 어떤 놈인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걸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소설을 읽던 일행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읽는 동안 안정을 찾아가던 얼굴들.
그녀도, 일행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제야 간신히 그날로부터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얻은 참이었다.
선을 넘어 다가오려는 정희원과 유상아를 향해, 한수영이 손바닥을 펼쳤다.
“다들 물러나 있어. 아무래도 오늘 이 녀석이랑 끝장을 봐야 할 거 같으니까.”
그 말과 함께 한수영과 유중혁의 신형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다시 나타난 곳은 지상으로부터 수십 미터 떨어진 창공이었다.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수영과 유중혁의 주먹이 격돌했다.
쿠르르르릉!
한수영의 손날이 유중혁의 허리를 가격했고, 유중혁의 오른발이 한수영의 명치를 찼다. 성좌들의 안력으로도 따라가기 힘든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수영의 입가에 피가 맺혔고, 가드를 올린 유중혁의 팔에 피멍이 들었다.
전투를 지켜보던 이지혜가 기어코 자신의 검에 손을 올렸다. 그것을 말린 것은 유상아였다.
“언니?”
“지금은 그냥 두자.”
무언가를 예감하고 있는 듯, 유상아는 일행들을 제지하며 자신의 연화대를 펼쳤다. 곧이어 찾아올 후폭풍으로부터 민간인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다음 순간, 창공의 기후가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잊혀진 것들의 해방자’가 어둠 속에서 눈을 뜹니다.]
두 사람의 충돌에 오래된 설화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한수영은 온 힘을 다해 유중혁의 주먹을 까부수며 말했다.
“말해. 왜 오늘이야? 지난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왜 하필 오늘 이런 뻘짓이냐고.”
“알 필요 없다.”
“아하, 그러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고집을 굽히지 않는 유중혁을 보고 있자니, 치밀어오르는 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난 언제나 네가 싫었어. 항상 후회했어. 왜 너 같은 인간의 이야기를, 내 손으로 썼을까.”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
그럼에도 오늘의 한수영은 그 모든 말을 다 토해냈다.
“또 다른 나를 저주했어. 그 이야기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누구도 죽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김독자도―”
찰나를 파고든 유중혁의 주먹이 말을 끊었다. 굳게 입술을 다문 채 묵묵히 전투를 계속하는 유중혁. 제대로 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한수영은 왜 유중혁이 [최후의 방주]를 찾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우린 이미 실패했어. 실패하고 돌아왔으면 얌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야지. 그때 [제4의 벽]이 했던 말 다 잊었어?”
그것을 알았기에 견딜 수 없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4 9 % 의 김 독 자를 가 진 것에 서 만 족 했 어 야 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제4의 벽]의 목소리.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패배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 너는 그저 포기했을 뿐이다.”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마모된 설화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희미한 빛을 뿜는 파편들이 유중혁의 뺨에 내려앉았다.
뒤늦게 유중혁의 망가진 생김새가 눈에 들어왔다. 까치집을 지은 머리카락과 보기 흉하게 더럽혀진 얼굴.
한수영은 짧은 순간 숨을 삼키며 물러났다. 스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갑자기 오빠가 사라졌다며 울던 유미아. 간신히 복귀한 프로게이머 직을 뿌리치고, 증발해버린 유중혁.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봤어야 했을까.」
유중혁의 오른손에 황금빛 아우라가 집약되고 있었다. [파천붕권]의 오의. 지금의 유중혁은 진심이었다. 한수영은 재빨리 자신의 오른손을 펼쳤다.
[성흔, ‘등장인물 소환’을 발동합니다!]
적어도 이 스킬을 이용해 멀리 날려버리는 거라면―
[해당 인물은 더 이상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뒤늦게 깨닫는다. 눈앞의 유중혁은, 이제 그녀가 썼던 ‘멸살법’의 인물이 아니었다.
김독자의 종장이 찾아오고, ‘멸살법’의 이야기가 끝난 뒤 유중혁은 이제 ‘등장인물’의 직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허공을 격하고 황금빛 붕권이 날아들었다. 한수영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회피 스킬을 발동했다.
아슬아슬한 일격이 어깨를 스쳤다. 찌릿찌릿 울리는 강권의 후폭풍.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스킬의 힘을 거의 잃지 않았군. 시스템의 가호 덕분인가.”
한수영의 스킬들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1865회차에서 비형에게 받은 관리국의 설화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감각한 목소리로 유중혁이 물었다.
“이 세계에는 이제 시스템이 필요 없다. 너는 왜 그 설화를 받아온 거지?”
“당연히 김독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지.”
그들이 [집단 회귀]를 시도했던 이유 중 하나는 김독자의 아바타가 쇠약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수영이 관리국의 설화를 받아온 것은, 혹시나 김독자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뭐하러 그런 짓을 하지? 너도 알겠지만 놈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
“김독자는 아직 죽은 게―”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나를 막는 거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배후를 점한 유중혁의 주먹이 한수영의 등을 내리쳤다. 지상으로 추락한 한수영이 바닥에서 거친 먼지를 토하며 일어났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외쳤다.
“······유중혁, 정신 차려! 네가 이러는 걸 김독자가 원할 것 같아? 김독자가 말했잖아. 이 세계를 버리지 말라고. 네놈도 동의했잖아!”
“그래서 회귀하지 않기로 했지.”
“웃기지 마. 회귀할 수 없게 된 거겠지. 회귀가 아직 존재했다면, 네놈은 또다시 돌아갔을 거잖아!”
“그랬을지도 모르지.”
뿌연 먼지 사이로 유중혁의 황금색 안광이 빛났다. 그 눈이 한수영에게 묻고 있었다.
“너는 다른가?”
한수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손안에 남겨진 김독자의 설화들이 대답했다.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슬퍼합니다.]
미처 놓아주지 못한 말들이었다. 이 말들을 어딘가에 써넣으며 그녀는 삶을 견뎌왔다. 회귀하지 마라. 현재를 살아라. 그런 뻔한 과거의 말들을 복기하며, 한수영은 순간순간을 견뎠다. 그렇게 2년이었다.
“아무것도 잊지 못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로군.”
“닥쳐.”
순식간에 도약한 한수영의 주먹이 유중혁의 얼굴을 갈겼다. 두 사람의 주먹이 마주칠 때마다 그들이 공유하는, 함께 쌓아온 설화들이 요동쳤다.
[설화, ‘카이제닉스의 왕’이 동요합니다.]
열심히 견뎌왔다 믿었다. 써 내려간 문장만큼,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고 생각했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한수영은 그렇게 생존했다.
「회귀를 해야만 회귀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한평생을 흘러간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주먹의 뼈가 으스러질 때마다 설화가 조금씩 흩어졌다. 어떤 퇴고도 없이 보존된 날것의 기억들.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흩어지는 설화를 회수했다.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단 하나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지난 2년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숨을 몰아쉬며 한수영이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러면 뭐가 달라지는데.”
“······.”
“여길 떠나도 김독자는 찾을 수 없어. 그리고 갈 수도 없고.”
“······.”
“어차피 이 세계선의 [방주]는 박살 났어. 최후의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까먹었어? 저건 방주가 아냐. 우리는 이 세계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두 사람의 힘이 다시 한 번 충돌했다. 쿠드드드,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마력이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폭풍의 중심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그토록 많은 설화들을 모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이 무엇인지 모른다.”
허공에서 터져 나가는 맹렬한 설화. 소중한 설화들이 손상되는 것도 아랑곳없이, 유중혁은 주먹을 휘둘렀다.
“네가 나의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가 끝나야 할 장소도 알고 있겠지.”
순간, 한수영의 머릿속에서 문장들이 흘러갔다.
「그 유중혁이, 정말로 [최후의 방주]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을까.」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시나리오에 지쳐버린 회귀자는, 사실 시나리오가 있었기에 살아올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설화를 끌어모으는 유중혁. 마침내 회귀의 저주에서 벗어난 유중혁의 설화들이 한수영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라, 한수영.”
「이것이 유중혁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전신의 모든 세포들이 경종을 울렸다.
오랜 삶을 반복해온 회귀자.
수십 번이고 수백 번이고 묘사해온 눈동자 위에 떠오르는 감정. 한수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유중혁은 이곳에서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첫 문장을 쓴 존재에게.
“씨발! 넌 한 번도 내 맘대로 움직여준 적 없잖아!”
콰아아아아아!
전력을 개방한 유중혁이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둘러왔다. 위대한 설화들이 집약된 일격. 대결의 마지막 방점이 찍히려 하고 있었다. 한수영 또한 자신의 모든 설화를 방출했다. 그리고.
마치, 별이 폭발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졌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내지른 오른 주먹의 뼈가 모조리 부서졌다. 일행들의 외침과 사람들의 비명. 귀청이 찢어지는 통증 속에서, 한수영은 충격을 견뎠다. 온몸이 넝마가 되어있었다.
눈앞에, 유중혁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유중혁?”
가볍게 떨리는 유중혁의 손끝.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이 한수영을 올려다보았다. 한수영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을 토했다.
“······암흑성 때랑은 좀 다르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한수영의 양다리가 푹 꺾였다. 대체 언제 맞은 것일까, 무릎의 뼈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
“개자식이······.”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닥에 엎어졌다. 한수영은 기듯이 유중혁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한 대를 더 때려주지 않으면 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손이 유중혁의 뒤통수를 가격하려는 순간, 역시나 부들부들 떨리는 유중혁의 오른팔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허공에서 한참이나 힘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의 팔이, 이내 엇갈리듯 축 늘어졌다. 이제, 정말 조금의 기력도 남지 않았다.
하늘 위로, 두 사람의 설화가 부딪치며 찢어진 상흔이 남았다. 흉측하게 찢어진 하늘 사이로 먼 <스타 스트림>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밤하늘에 몇 남지 않은 별들이 그들을 향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한참이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김독자는 우주로 흩어졌다고 했다.”
잘게 흩어진 김독자의 영혼. 그 작은 파편들 속에는 얼마만큼의 김독자가 있는 것일까. 한수영도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작은 김독자들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계선의 어귀에서 무언가로 태어났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지구와 비슷한 곳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한반도가 아닌 다른 대륙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놈이, 행복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수영은 무엇인가가 끝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 어귀가 지독하게 아파왔다.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한수영은 똑똑히 들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소리. 그들의 길었던 애도가, 마침내 끝나는 소리. 오직 과거 안에서만 살아온 누군가가 마침내 그 과거를 놓아주는 소리였다. 그 순간 한수영은 기이한 배덕감에 사로잡혔다.
“김독자는······.”
「사실은 녀석이 포기하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모두가 이 오랜 슬픔을 놓아주더라도, 한 사람만큼은 자신의 삶을 망쳐가며 빌어먹을 짓을 계속해주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쿨럭거리는 유중혁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분명 잘 지내고 있겠지. 강한 녀석이니까.”
“······.”
“거기서도 나름대로 삶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 또 이상한 책 같은 걸 읽고 있을지도 모르고.”
“놈을 찾아가도, 녀석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지.”
그들의 애도는 여기까지였다.
세계선을 넘는 일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설령 그 ‘김독자’를 찾아가더라도,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 과거를 강요할 수도 없었다. 환생한 김독자는 김독자가 아니었다. 이제 이 우주 어디에도, 그들이 알던 김독자는 없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순간 이상한 말을 했다.
“그건 모르지. 녀석이 태어난 곳에도 ‘멸살법’이 있다면.”
순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멸살법이······.”
그녀의 의지를 거부하듯, 그녀의 입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이 된 김독자는, 우주 전체로 흩어졌다.」
그녀의 머리가 혼란스러운 문장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우주는 그런 ‘가장 오래된 꿈’의 상상으로 유지된다.」
「그렇다면, ‘가장 오래된 꿈’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이었다.
「“다른 세계선의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겠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 먼 우주의 건너편에서, 자신이 모르는 표정으로 누군가의 소설을 읽고 있을 김독자.
“그 녀석은······ 아직도 이 이야기의 결말을 궁금해할까?”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만약, 우주에 흩어진 무수한 ‘김독자’들이 동시에 어떤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왜 성좌들은 자신의 설화를 널리 알리려 하는 것일까.」
「어째서, 이 세계의 기반은 ‘이야기’인가.」
“자신이 ‘가장 오래된 꿈’이란 걸 잊은 그 모든 김독자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꿈꾼다면.”
다른 세계선에서 환생한 김독자들의 삶을 망치지 않으면서, 김독자를 되찾을 방법.
한수영은 몽롱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꿈꾸는 이야기가······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와 같다면······?”
상념이 깨진 것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새카만 그림자 때문이었다.
“공원을 만들 장소였는데, 두 사람 덕분에 난장판이 되어버렸군요.”
언제부터였을까, 안나 크로프트가 그곳에 서 있었다.
“또다시 세계선을 넘을 생각입니까?”
안나 크로프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망상을 한 것인지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른 세계선의 김독자들에게 자신이 쓴 소설을 꿈꾸게 만든다니,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는 이제 세계선을 넘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붉게 빛나는 안나 크로프트의 눈동자. 그녀의 시선이 박물관의 첨탑을 향해 있었다.
[최후의 방주]의 모형.
천천히 심장이 뛰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가능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쿠구구구구.
아주 천천히, 박물관 위의 모형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뜬 유중혁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그쪽을 보고 있었다.
방주. 그 크기는 무척 작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방주였다.
“혹시 몰라 20년 동안 부품을 모아서 고쳐봤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한 번은 당신들을 찾아가 보고 싶어서. 쓸 수 있는 부품이 많지 않아서 제대로 복원하진 못했지만······.”
천천히 부상한 방주가 캡슐처럼 열리더니 자신의 내부를 드러냈다. 혼자만이 간신히 탈 수 있을 듯한, 아주 작은 [최후의 방주].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단, 탑승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