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544화 “······그냥 기록으로 남길 겸 썼어. 혹시 언젠가 김독자가 깨어날 수도 있잖아. 그럼 분명 모든 걸 다 잊은 후일 테니까.” 일행들은 한수영의 소설을 읽었다. 눈이 붉어진 신유승이 스크롤 좀 천천히 내리라며 타박을 했고, 이길영은 콧물을 훌쩍이며 마우스를 딸깍였다. 유상아와 정희원, 장하영은 파일을 복사해서 스마트폰으로 읽었다.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읽던 유상아가 옅게 미소지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죠, 참.” 그립다는 듯, 유상아가 액정 위의 문장을 쓸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김독자를 만질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병나발을 불던 이지혜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뭐야.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아, 누나!” 주정을 부리던 이지혜가 의자에서 이길영을 밀쳐내고 노트북을 차지했다. 뺨을 착착 두드린 이지혜가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화면에 집중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흐어어어엉! 이 소설 너무 슬프잖아!” “······이제 겨우 1화 읽어 놓고 무슨.” 팽, 하고 코를 푼 이지혜가 이길영 쪽으로 휴지를 던졌다. 열 받은 이길영이 뭐라고 쏘아붙이든 말든, 이지혜는 막무가내였다. 특히 스크롤을 호로록 내려 자신이 등장하는 충무로 씬을 읽을 무렵, 이지혜의 흥분은 정점에 달했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입구에, 긴 장도를 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드문드문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이지혜의 머리카락을 보며······ 크으으, 나 진짜 개 멋있다!” “아 진짜! 스크롤 다시 올려!” 이길영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이지혜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그래서 이담엔 어떻게 돼요? 김독자 어떻게 되는데······.” 조잘대던 이지혜가 결국 취기를 못 이기고 테이블에 코를 박았다. 노트북을 빼앗은 신유승이 대신 스크롤을 내리며 물었다. “······저도 나중에 나오나요?” “안 나오는 사람은 없어. 비중은 좀 다르겠지만.”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알아. 네 이야기도 많이 나올 거야.” 그들은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독자가 어떻게 되는지, 일행들은 무슨 일을 겪는지. 그들이 꾸었던 꿈이 어떻게 부서지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신유승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읽었다. 정해진 끝을 향해 한 문장씩 나아갔다. 그들이 바꾸지 못한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신유승은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읽었다. “······이거, 독자 아저씨가 읽었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우리가 형한테 가서 읽어줄까?” 한수영은 이설화의 병원에서 잠들어 있을 김독자를 떠올렸다. 이 소설은 그 녀석을 위해서 썼다. 하지만, 그 녀석이 읽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이 이야기의 완성은 아닐까.」 무언가를 잃은 자들의 온전한 마지막. 그것이 이 소설의 진짜 역할은 아닐까. 이들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진정한 독자는 아닐까. “다른 세계선의 아저씨도 책을 좋아하겠죠?” 고작 이 이야기로, 일행들이 구원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삶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멸살법’을 읽던 김독자가 그랬던 것처럼. “글쎄, 아마도.” “거기서도 아저씨는 분명 아저씨일 거예요.” “혹시 모르지 벌레가 됐을지도.” “뒈지고 싶으면 계속 지껄여라, 이길영.” “형이 벌레로 태어났으면 내가 키워줄 텐데. 책도 매일 읽어줄 거야.” 이길영의 헛소리를 들으며, 몇몇 어른들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유상아가 말했다.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 살아가든, 독자 씨는 독자 씨겠지.” 한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의 세계에서, 김독자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다. 거기서도 누군가가 쓴 이야기를 읽고,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감동하며 살아갈 김독자. 이곳의 사람들은, 그런 김독자의 이야기를 추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부디 그 세계의 김독자가 불행하지 않기를. 이곳에서 일행들이 그를 기억하는 만큼, 그가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부분부터 다시 읽기를 반복하던 신유승이 한숨처럼 말했다. “아까워서 못 읽겠어요. 너무 빨리 끝나버릴까봐.” “그렇게 빨리 끝나진 않아.” “다음 편도 계속 쓰실 거예요?” “응.” “다른 세계에도 이 소설을 보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만 읽기엔 너무 아까워요.” ······다른 세계? 뜻밖의 말에 한수영은 잠깐 멍해졌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잠시 생각하던 한수영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뉴스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광화문에 위치한 ‘시나리오 박물관’에 테러범이 침입하여······. “테러범? 요즘 시대에?” 장하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차피 시스템의 영향력도 거의 사라진 세계여서, 성유물을 가진다고 해서 뭘 제대로 해볼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정희원의 폰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네, 당신의 안전을 지키는 보안 업체! 아이언캡스 대표 정희원입니······ 네? 어디요? 누가 왔다고요?” 당황한 얼굴의 정희원이 고개를 들어 패널을 보았다. 패널의 자막이 이어지고 있었다. ―테러범의 정체는 과거 ‘패왕’이라 불리었던 초월좌로 알려져······. ······패왕? 잠시 후, 화면 위에 테러범의 신상이 떠올랐다. ―테러범, 패왕 유중혁 (33, 무직) * “막아!” 출동한 전경들이 박물관을 봉쇄하며 다가오는 사내를 막아섰다. 하지만 사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진압봉을 피했다. 새카만 코트가 흩날리며 사내의 손바닥이 움직이자, 달려오던 전경들이 파도처럼 흩어졌다. “으아아아악!” “시스템의 힘이다. 빨리 보안 업체에 연락해! 정부 소속 성좌들에게도―” 유중혁의 [주작신보]가 샛노란 불꽃을 튀기며 나아갔다. 걸음마다 새겨진 가공할 열기에 전경들이 기겁하며 물러났고, 유중혁은 어느새 [시나리오 박물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멸망한 시대의 성유물들을 보관하는 장소. 민간인들에게는 공개되어 있지 않은 귀중품들을 모아 놓은 장소가 그곳에 있었다. 유중혁의 뒤를 쫓던 전경이 외쳤다. “어차피 전대의 초월좌일 뿐이다! 박물관 인근에는 북두의 성좌님들께서 합심해 만든 절진이―” [‘칠성오행진(七星五行陣)’이 발동합니다!] 유중혁은 눈앞을 가로막은 진법의 구성을 살폈다. 칠성과 오행의 순리에 맞게 생문과 사문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무림 계통의 진법. 유중혁의 눈동자가 황금빛 광채를 토하며, 그의 [흑천마도]가 정확히 일곱의 점을 찍었다. 쿠르르르릉! “미친, 저게 무슨······!” 멸망의 시대를 잘 알지 못하는 젊은 전경들이 입을 벌렸다. 그들 역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20년 전에는, 저 하늘의 별들을 오시하는 인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성좌들과 맞먹는 인간이라니. 그런 인간이 존재했을 리 없다 믿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그 살아있는 증거가 있었다. 붕괴한 진법 사이로 발을 내딛는 유중혁.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먼지구름 사이로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패왕,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당신은 성유물 따윌 훔칠 필요가 없을 텐데요. 정부 소속의 화신, 한동훈이었다. 직접 이야기하는 대신 상대의 눈앞에 메시지를 띄우는 것으로 유명한 화신. 유중혁은 눈앞의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박물관의 첨탑 쪽을 턱짓했다. 첨탑 위에는 작은 배가 상징물처럼 걸려 있었다. “저 배가 필요하다.” ―저건 모형입니다. 날 수 없는 배에요. “그건 사용해 보면 알 수 있겠지.” ―당신이 세계 정부에 정기 보고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세계 정부는 당신을 묵인했습니다. 멸망의 시대에 당신이 이룬 업적들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입니다.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한 한동훈의 전신에서 강렬한 투기가 터져 나왔다. 그 역시 시나리오 세대의 생존자. 시나리오가 종료된 무렵에는 ‘그림자의 왕’으로 이름을 알렸던 강자였다. “나를 막겠다고?” 유중혁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동시에 일대의 인간들이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표정이 굳어진 한동훈이 수신호를 보냈다. ―전원 전투 준······! 메시지가 채 이어지기도 전에, 박물관의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죽은 매미처럼 떨어졌다. 투둑, 툭······. 추락한 대원들이 벌레처럼 몸을 비틀었다. 몸의 곳곳에 남은 점혈의 흔적. 함께 출동한 화신의 숫자는 물경 삼십을 넘었다. 그런데 그 삼십 명의 정예가, 눈치챌 틈도 없이 당했다. “비켜라.” 한동훈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1864회차의 시나리오가 끝난 후 지난 20년 간, 그가 아는 최강의 화신은 예언자 안나 크로프트였다. 살아남은 화신들 중 유일하게 성좌에 비견되는 존재. 하지만 그녀가 온다고 해서, 저 괴물을 막을 수 있을까. ―한동훈, 응답하세요. ······한동훈?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 한동훈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의 전신을 옥죄고 있었다. 대체 누가 저 초월좌를 막을 수 있을까. 지금쯤 다른 행성에 있을 무림계 초월좌들? 아니면 세계 투어 중인 성좌들? 아니, 설령 그들이라 해도 무리일 것이다. 눈앞의 괴물은 초월좌들 중에서도 최상격에 이른 존재. <스타 스트림>이 무너진 후, 성좌들은 이제 예전과 같은 힘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한동훈 대장! 피하십시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인 것과 한동훈이 눈을 질끈 감은 것, 그리고 귀청을 찢는 굉음이 터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시무시한 마력파가 한동훈의 몸을 밀쳤다. 개연성 후폭풍이 일어날 정도의 충돌을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츠츠츠츠츠······. 부서진 바닥의 홈을 붙잡고 간신히 그 후폭풍을 견뎌냈을 때, 그는 믿을 수 없는 정경과 마주했다. “시발, 오랜만에 힘쓰려니까 힘들어 죽겠네.” 누군가가, 패왕의 검을 막고 있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힘을 개방합니다!] [‘관리국’의 설화 파편들이 ‘거짓 종막의 설계자’를 지지합니다!] 이 세계에서, 괴물 유중혁을 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초강자. 그녀의 전신에서 솟아난 보랏빛 마력이 주변을 불길하게 물들였다. “유중혁, 대체 뭔 뻘짓을 하는 거냐?” 흑염마황 한수영.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왜 신경 쓸 일이 아냐? 우리 옛 회귀자께서 무려 테러리스트가 되셨다는데.” “······.” “과거의 전우가 타락했으니, 그 갱생을 책임지는 것이 슈퍼히어로의 의무―” 콰아아아앙! “빌어먹을, 뭐야? 대체 이게 뭔 지랄인데!” “비켜라. 네놈과 말싸움할 생각 없다.” “아니, 말을 해. 네놈은 옛날부터 그게 문제야. 2년 동안 멀쩡히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이러는······.” 쐐애애액! 품속에서 단검을 꺼낸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유중혁의 공세를 막아냈다. 충만한 검강의 폭격에 그녀의 신형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녀가 밀려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 박물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 유중혁이 이곳을 급습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성유물 한두 점 따위 가진다고 해서 더 강해질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유중혁이 탐낼만한 성유물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그때, 한수영의 눈에 들어온 무언가가 있었다. “너. 설마.”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은은하게 번져가는 불온한 기파. 한수영의 목소리에 차가운 분노가 어리고 있었다. “저거 때문이냐?”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동자. 그 망막 위로 첨탑에 조형된 [최후의 방주]의 상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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