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542화
1865회차의 끝은 그 어떤 세계선보다도 완벽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끝나고 어느새 한 달. 시나리오로 인한 피해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회귀자들의 도움으로 각국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했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직장인들은 출근을 시작했다. 거리에는 새로운 세계의 안녕을 위한 슬로건들이 잔뜩 붙었다.
그 낯선 거리 위에서, 이지혜는 펜스 너머로 펼쳐진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저 애가 그 친구구나.”
정희원의 말에, 이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장에서 그녀의 친구가 달리고 있었다. 나보리.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죽였던 친구. 그 친구가, 이 세계선에서는 살아있었다. 살아서 숨을 쉬고,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지혜야, 돌아가지 않아도 돼.”
이지혜의 눈이 보리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친구. 항상 꾸는 악몽에 등장했던 친구.
보리를 구하면, 악몽도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기억은 그렇게 간단히 소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악몽은 더욱 생생한 형태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몇 번이고 같은 시나리오를 살았고, 꿈속의 보리를 죽였다. 그럴 때마다 이지혜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가 구한 것은 죽은 보리가 아니었다는 것.
그저 다른 세계선의, 또 다른 보리였을 뿐이라는 것.
“지혜야.”
이지혜는 한참이나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유랑 약속했으니까요.”
“······.”
“반드시, 다시 세계선을 넘어 그곳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렇게 약속했으니까요.”
정희원은 그런 이지혜의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가면 쓸쓸하겠지. 거긴 이곳에 있는 것들이 없을 테니까.”
이지혜가 웃었다. 눈을 닦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쓸쓸하지 않아요. 이 안에 있으니까.”
그 말을 하는 이지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은 것일까.
정말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은 왜 여기까지 온 것일까.
“가자. 언니가 오늘 맛있는 거 쏠게.”
*
“오라버니.”
유미아가 오라버니라고 부를 때는, 무언가를 부탁하고 싶을 때다.
오랜 회귀를 통해 유중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미아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 이상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유중혁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의자 위에 올라간 유미아가 유중혁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
―그들이 살았던 이야기는 비극의 시나리오.
―세계는 멸망의 포연으로 덮였고, 그들은 소중한 것을 잃었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말에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장송곡이냐?”
[요즘 유행하는 노래야. 너희들을 칭송하는 이야기지.]
킬킬 웃은 비형이 방주의 문을 열었다.
설화 에너지가 충전된 방주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나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회귀자들이 방주에 탑승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남기로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공필두. 그의 뒤로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수영은 공필두가 회귀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남아. 여기도 지킬 사람이 있어야지.”
공필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남을 사람 없어?”
한수영이 차분히 목소릴 높였다.
“신중하게 생각해. 이제 가면 부모님이랑 연인, 친구······ 아무튼 기타 등등은 두 번 다시 못 봐. 괜찮겠어들? 잘 생각하라고······.”
한수영의 손을 신유승이 꼭 붙잡았다.
“여긴 우리 세계선이 아니잖아요. 독자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김독자 컴퍼니>의 화신과 성좌들은 대부분 귀환을 선택했다.
그들의 중심에 침대차에 실린 어린 김독자가 있었다.
[오― 페르세포네, 정말 떠날 셈이오?]
질척거리다 못해 구애의 댄스를 추고 있는 하데스를 보며 한수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하데스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그런 하데스를 향해 페르세포네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미안해요, 하데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알던 ‘페르세포네’가 아니에요.]
[당신은 페르세포네요.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자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가 작게 도리질을 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소.]
[당신의 세계선은 이곳이에요. 당신은 명계의 왕이고요. 부디 체통을 지키세요.]
[내 세계는 당신이야, 페르세포네!]
비형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한수영을 향해 물었다.
[물으나 마나겠지만······ 정말 갈 거냐? 이곳에 남으면 평생 대접받으며 살아갈 수 있어.]
“그런 것 때문에 이 세계선으로 온 게 아니야.”
한수영은 침대차에 누운 어린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지난 몇 달간, 한수영과 동료들은 <스타 스트림> 전역을 뒤져 김독자를 살려낼 방법을 골몰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방법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죽은 듯 산 듯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형, 굿바이 선물로 관리국 설화 좀 나눠줘.”
[······관리국 설화를?]
“우리 세계선의 시스템이 망했거든. 혹시 모르니 조금만 받아가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인 비형이 설화의 일부를 한수영에게 계승했다.
그때,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뛰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덥수룩한 턱수염이 자라난 덩치. 이현성이었다.
“빨리 출발해주십시오!”
자세히 보니, 이현성의 뒤를 쫓아오는 군용 차량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아직도 수배 중이었지.”
쓰게 웃은 한수영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출발한다.”
마침내 「최후의 방주」가 떠올랐다.
―<김독자 컴퍼니>의 영웅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지켜보았다. 방송국 헬기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출항을 중계했다. 일행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기자들이 외쳤다.
―왜 울고 계십니까? 당신들이 이 세계선을 구했습니다!
지상의 정경이 서서히 멀어졌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우리,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던 걸까요.”
한편의 지독한 악몽처럼 세계가 멀어지고 있었다. 기억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변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이긴······.”
방주의 가속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계선의 은하. 저 먼 세계선의 어딘가에는 환생한 김독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한수영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무리해서라도 항로를 튼다면 어떨까. 저 먼 별들 어딘가에서 태어난 김독자의 환생체를 만나러 떠난다면 어떨까. 그러면,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그게 정말로 김독자가 원하는 일일까.」
방주의 창문으로 곁에 선 유중혁과 유상아의 동시에 얼굴이 비쳤다. 그 둘 역시 자신과 같은 표정으로, 자신과 같은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이 계획은 영원히 실천될 수 없다는 것을.
방주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새로운 세계선으로 진입합니다!]
“벌써? 이거 겁나게 빠른―”
마치 대기권으로 돌입하듯 방주가 급강하를 시작했다.
잠깐 중력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굉음과 함께 선체가 어딘가에 부딪쳤다. 내부가 일순간 암전되었다 되돌아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싼 채 한수영이 일행들을 살폈다.
“젠장, 낡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고물이잖아, 이거. 모두 괜찮아?”
“전 괜찮아요! 다른 분들은······.”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한수영은 선체를 조작해 출입구를 열었다. 천천히 열린 문 아래로 계단이 내려갔다.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 땅을 밟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떻게 된 것일까. 무장 군인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이현성이 그녀의 뒤로 숨었다.
“수영 씨!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설마 여기서도 저를······.”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우리 고향이라고.”
이현성을 뒤로한 한수영이 말했다.
“환영 인사가 너무 거친데? 니들 나 누군지는 알아?”
껄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한수영을 향해 총구가 일제히 움직였다.
“경고하는데, 그거 당기면 니들 전부―”
그때, 한수영의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한 기시감이 드는 중년의 얼굴. 어깨 아래까지 흩날리는 금발. 붉게 소용돌이치는 적안의 눈동자. 그 눈동자의 주인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한수영?”
한수영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목소리.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년인이 손으로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한수영······ 정말 당신이 맞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수영은 울컥 뭔가가 올라올 것 같았다.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간 한수영이 안나 크로프트를 마주 보았다.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수영은 나오는 대로 물었다.
“우리가 떠나고 몇 년이나 지난 거야?”
“······20년입니다.”
한수영이 떨리는 입술로 그 세월을 삼켰다. 현기증이 났다. 누가 이곳에서, 그 끔찍한 시나리오가 있었다는 것을 믿을까.
서울은 더 이상 그녀가 기억하던 장소가 아니었다. 완벽하다 생각했던 1865회차만큼이나 완성된 도시. 가로수의 짙은 녹음과, 먼 공터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
20년.
그렇구나. 우리가 없는 세계에서, 너는 이 세계를 살았구나.
그래서 이 세계를 이만큼이나 바꾸어냈구나.
“한수영?”
깜짝 놀란 안나 크로프트가 비틀거리는 한수영을 부축했다. 싫은 녀석의 품이었다. 그럼에도 그 어깨에 매달린 채, 한수영은 울음을 터트렸다.
마침내 다시 만난 1864회차.
그들이,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완수했던 세계.
누군가는 돌아왔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떤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과거로 남았다.
멀찍이 펼쳐진 [공단]의 풍경.
색이 바래진 김독자의 동상이 그곳에 있었다. 어색한 듯 포즈를 취한 김독자의 옆으로, 거대한 오징어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김독자의 귀환을 기념하며」
그 괴상망측한 오징어를 보며 한수영은 끅끅거리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 뭔가가 바뀔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한수영은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찾아낸 세계의 결말이었다.
*
일행들이 돌아온 지 2년이 지났다.
2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그렇기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났다.
이현성과 정희원이 공단을 떠난 일. 신유승과 이길영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일. 이지혜가 첫 중간고사에서 F를 맞은 일, 등등.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사건들을 단 하나로 요약하자면,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김독자 컴퍼니>는 해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