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540화
암막 커튼이 내려온 무대처럼 어두운 공간.
한수영은 그 속에서 눈을 떴다. [진실의 눈동자]가 팽창하며 희미한 푸른 빛을 내뿜자, 조금씩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은 세계선의 결정적인 개연성을 어그러뜨렸습니다!]
[당신의 행동이 ‘가장 오래된 꿈’의 ■■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장 오래된 꿈’의 ■■이 변화합니다!]
이어서 떠오르는 알 수 없는 메시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김독자를 구하는 것뿐.
한수영은 앞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안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뭔가가 보였다.
“유중혁. 거기 있어?”
“있다.”
더듬거리며 다가간 한수영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야! 애 멱살을 잡고 있으면 어떡해?”
“애가 아니다. 김독자다.”
“애가 된 김독자잖아!”
황급히 김독자를 빼앗아 든 한수영이 김독자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희미한 숨이 느껴졌다.
하지만 왜일까. 뭔가 상태가 이상했다. 툭 건드리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얘 상태가 왜 이래?”
“설화가 지나치게 손상됐다. 생사환도 먹여 보았는데······ 전혀 듣질 않는다.”
이설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다른 일행들의 기척은 없다. 아공간에 갇힌 것은 유중혁과 자신, 그리고 김독자뿐이다.
한수영이 적의에 찬 눈으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이런 짓을 할만한 범인은 하나뿐이었다.
“제4의 벽! 그만 내보내 줘!”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중절모를 쓴 소년 도깨비가 서 있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무구함으로 가득 찬 소년의 얼굴. 한수영은 잠시 [제4의 벽]을 바라보다 물었다.
“······그게 네 본 모습이야?”
「그 래」
기억으로 엿보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중년 도깨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제4의 벽]이 말했다.
「아 주 오 랜 세 월 이 지 났 어」
한수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제4의 벽] 또한 김독자와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 아득한 세월을 견디는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아이처럼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한수영은 쓰러진 김독자의 옷깃을 고쳐주며 물었다.
“넌 내 명령을 받아서 김독자를 지키고 있었던 거지?”
「그 랬던 거 같 아」
“김독자에게 ‘멸살법’ 파일을 준 것도 너였지? 그 뒤에도 계속 김독자를 도왔잖아.”
[제4의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추억을 헤집듯 아련한 눈빛으로 김독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수영의 말투에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그런데 왜 김독자가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거야?”
「······.」
“말해!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너희는 독자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
[제4의 벽]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너희는, 정말로 아무것도 몰라.」
“······김독자를 데려가겠어. 이 녀석이 ‘가장 오래된 꿈’으로 살도록 놓아둘 수는 없어.”
항전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한 태도에, [제4의 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긴장하며 주먹을 쥐는 한수영을 대신해 유중혁이 앞으로 나섰다.
“이 녀석을 우리가 데려가면, ‘가장 오래된 꿈’은 공석이 되는 건가?”
한수영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를 구하고 나면, ‘가장 오래된 꿈’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이 세계는 ‘가장 오래된 꿈’이 꿈을 꾸기에 유지된다.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굴러갈 수 있는 우주에서, 누군가는 꿈을 꾸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대신하겠다.”
“뭐? 야! 갑자기 뭔 헛소리야!”
“내가 ‘가장 오래된 꿈’이 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상상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네가 어떻게 그걸 해! 차라리 내가 할게. 난 김독자 이 자식보다도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한수영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다. 어떻게 해서든 저 미친놈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제4의 벽]은 유중혁의 편이 아니었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 너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될 수 없어. 너는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럼 역시 내가―”
「한수영, 너도 마찬가지야.」
“그럼 이 녀석 자린 누가 대신하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이 녀석은 반드시 데리고 나갈 거야. 아무리 너라도 우릴 막을 수는 없어.”
[제4의 벽]은 잠시 한수영과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데려가.」
“뭐?”
「그냥 데려가. ‘그 김독자’를 데려가도, 이제 이 우주는 멸망하지 않으니까.」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기에, 한수영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돌아보니 유중혁도 비슷한 상태였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런 엔딩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정말, 이런 결말을 맞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이 <스타 스트림>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친절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서서히 표정이 굳어진 한수영이 되물었다.
“왜 이 녀석을 데려가도 우주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거지?”
「너희가 아는 김독자는 이 우주 전체로 흩어졌어.」
“뭐?”
한수영은 멍하니 자신의 품에 안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한 팔에 감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맣고 연약한 체구.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느낌이었다. 설마, 김독자가 이렇게 된 이유는······.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한 짓이 아니야. 그가 스스로 원했던 거지. 그는 너희가 이럴 줄 알고 있었으니까.」
솜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우주를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는 ‘가장 오래된 꿈’이 되어야만 한다.
김독자가 구해지면, 누군가는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한다.
김독자가······ 그 김독자가, 과연 그걸 몰랐을까?
「너희는 멍청한 짓을 했어. 독자가 원하는 결말이 곧 결말이야. 왜 그 결말을 바꾸려고 했어?」
이쪽을 보는 [제4의 벽]의 표정이 섬뜩했다. 증오도, 원망도, 슬픔도 아닌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와 유중혁을 향하고 있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4 9 % 의 김 독 자를 가 진 것에 서 만 족 했 어 야 지」
서서히 부서지는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 말 너 희들 만 특 별 할 수 있다 고 생 각 했 어? 우 주의 법칙을 파 괴한 너 희에 게 제 대로 된 결 말이 존 재할 거라 믿 었 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너 희는 결 말을 망쳤 고 불행 해 질 거 야」
.
.
.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서울에 있었다. 1865회차의 광화문. 그들이 시나리오를 준비했던 장소. 모든 시나리오가 종료된 광화문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발을, 한수영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자신의 팔에 안긴 작은 김독자의 모습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새어 나오는 숨소리.
“사부!”
멀리서 이지혜가 달려왔다. 바로 옆을 부리나케 뛰어오는 유상아와 정희원의 모습도 보였다. 일행들은 무사했다.
“수영 씨! 독자 씨는?”
한수영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장하영이 김독자를 안아 들었다.
“김독자! 애 손이 얼음장이야! 누구 장갑 없어?”
순식간에 김독자를 둘러싼 일행들. 모두가 각자의 감정에 취해 있었다.
보얀 김독자의 뺨을 붙잡은 채 정희원이 울었고, 곰만한 덩치의 이현성이 김독자의 맨발을 조심스레 감쌌다. 유상아도 이번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신유승과 이길영은 이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런 꼴이 같잖다는 듯 인근 벤치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공필두의 모습도 보였다.
“······독자는 잠든 거니?”
그렇게 묻는 이수경을 향해,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지금의 한수영이 쥐어 짜낼 수 있는 에너지의 전부였다.
차츰 감정을 다스린 일행들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제일 먼저 나선 것은 팔을 걷어붙인 정희원이었다.
“이번엔 진짜 매달아 놓을 거야. 공단 앞에 매달아 놓을 거라고. 나 농담 아니니까 아무도 말리지 마.”
“그래도 지금 독자 씨는 어린앤데······.”
“근데 아저씨는 계속 이런 상태인 거예요?”
“형, 일어나 봐요! 사실 부끄러워서 잠든 척하는 거죠?”
“뭔가 부작용으로 어려진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좀 어려졌으면 어때. 우리가 키워주면 되잖아!”
“형이랑 같이 학교 다닐 수도 있을까?”
“야, 아저씨가 진짜 애가 된 줄 알아?”
그렇게 티격태격하길 몇 분.
김독자의 이곳저곳을 진맥하던 이설화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독자 아저씨 깨어나면 우리 기억하겠죠? 또 막 기억 다 잃어버린다거나 그런 거 아니겠지?”
「그런 일행들에게, 한수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수영은 떨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더듬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그 빌어먹을 벽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 아까부터 왜 그렇게 조용해요?”
유상아의 물음에, 한수영이 시선을 피했다.
“수영 씨?”
이어서 유상아의 시선이 유중혁을 향했다. 그리고 유상아는, 놀라운 광경을 목적했다.
“······유중혁 씨?”
유중혁의 표정이 창백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정신 방벽이 맛이 가버린 것인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유상아는 유중혁의 그런 모습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73번째 마계에서, 김독자가 ‘이계의 신격’과 함께 소멸했을 때.」
일행들을 헤치고 다가간 유상아가 김독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부러질 것처럼 연약한 손목. 옅은 맥박. 하지만 의사가 아닌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유상아는 이설화에게 물었다.
“설화 씨, 지금 독자 씨는―”
“······영혼이 완전히 손상됐어요.”
영혼이 손상되었다.
순간 일행들의 표정에 비슷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림자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희원이 말했다.
“방법이 있겠죠? 예전에도 잘 고쳐냈잖아요.”
그들은 이미 비슷한 일들을 겪은 적이 있었다.
영혼 손상은 곧 설화의 손상, 나아가 테마의 손상을 의미한다. 언젠가 이수경 또한 그런 병증에서 되살아난 적이 있었다.
신유승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그때랑은 다르잖아요! 이 세계의 아일렌에게 도움을 구하면 돼요. 그리고 성유액도 미리 많이 확보해 놨잖아요!”
신유승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신유승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도리질을 반복하는 신유승의 어깨를, 유상아는 조심스레 감쌌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설화 씨.”
고개를 푹 숙인 이설화가 김독자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김독자의 연약한 가슴팍에서 작은 설화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김독자의 설화였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새로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아주 작은 글귀처럼 반짝이는, 그의 작은 설화.
[성좌, ‘구원의 마왕’의 ■■은 종장(終章)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누구도 쓰지 않은 에필로그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