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539화 설원에 폭발음이 일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휘둘러 ‘심연을 좇는 사냥개’를 쳐낸 후 열차의 지붕 위에 올라섰다. 심상치 않은 폭음이었다. 열차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빌어먹을! 숫자가 너무 많잖아!] 사냥개들을 상대하던 심연의 흑염룡이 역정을 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냥개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이고 전격을 내리쳐 사냥개들을 태워버리던 제천대성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아직 999회차 녀석들에 견주기엔 역부족이군.] 다시 한번 지하철 안쪽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유중혁은 자기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저건 뭘까. 지하철의 앞칸에서 설화 조각 같은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의 구멍으로 뭔가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기겁한 우리엘이 소리쳤다. [유중혁! 피해!] 다음 순간, 열차에서 방출된 사냥개들이 유중혁을 새카맣게 덮었다. * 파스스, 흩어지는 검은 조각들. 쉼표 형태의 구멍을 중심으로 눈앞의 문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수영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앞을 보았다. 3807칸으로 넘어가는 객실 입구 근처에 활자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도」 「당신들과」 채 문장조차 되지 못한 그 말들을 보는 순간, 한수영은 반대쪽에서 문을 건드린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설화들이었다. 김독자의 아주 작은 파편들. 한수영의 눈이 점점이 떨어진 그 파편들을 따라갔다. 객실의 중심으로 향할수록 떨어진 설화의 조각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작아진 김독자의 몸이 객실의 중앙에 붕 떠 있었다. 눈을 감은 김독자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황홀한 빛을 내뿜는 김독자의 몸에서 눈부신 설화 조각들이 흘러나왔다. 조각들은 지하철의 창을 투과해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었다. “아······?” 한수영의 곁에 있던 김독자의 아바타가 소리를 냈다.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아바타가 어린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아······ 아, 나는······.” 그 말을 하는 순간, 강력한 힘이 김독자의 아바타를 끌어당겼다. 그를 부르는 힘. 아바타의 몸이 조금씩 분해되고 있었다. 분해된 조각들이, 그의 본체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돌아보는 눈동자가 한수영의 시선과 마주쳤다. 한수영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잡아!” 손은 닿지 않았다. 아바타가 분해되고 빨려 들어가는 속도는 더 빨라졌다. 손끝을 스치는 아바타의 조각들. 한수영의 손끝에 단어들이 걸려들었다.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가. 환영처럼 잘게 흩어진 김독자의 아바타가 본체로 빨려 들어가며 밝은 빛을 토했다. 그러나 아바타의 설화를 온전히 흡수했음에도 김독자의 몸은 다시 자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몸에서 방출되는 설화의 양이 더욱 많아지고 있었다. “김독자!” 한수영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걸 막아야 한다. 저걸 막지 못하면, 그들은 영원히 김독자를 잃게 될 것이다. 힘껏 응축한 근육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그렇게, 한수영이 허공의 김독자를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콰아아아아아! 「더 이상 은 안 돼」 굉음과 함께 강풍이 불어닥치더니 김독자의 몸에서 뭔가가 폭발했다. 김독자의 설화들이 범람하고 있었다. 새카맣게 흘러나온 문장들은 이내 객실 전체를 뒤덮더니 한수영을 집어삼켰다. “모두 조심해!” 살이 쓸리는 느낌과 함께 한수영의 몸이 마구 밀려났다. 김독자가 멀어지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잡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성좌의 격을 개방했고, 거대 설화들의 힘을 빌렸음에도 급류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김독자! 멈ㅊ―!” 김독자의 몸에서 나온 문장들이 그녀의 전신을 할퀴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평생을 견뎌온 문장들. 한 사람의 생이 만들어 낸 절망. 사위를 까마득히 덮은 활자의 파도는 마치 깊은 어둠 같았다. 그녀가 이해하고 있는 김독자는 티끌에 불과했다. 일순간 압도되어버린 한수영은 말조차 잊은 채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런 한수영의 등을 지탱한 것은 유상아였다. “정신 차려요!” 활자들의 틈새로 어렴풋이 보이는 김독자의 모습. 이지혜가 외쳤다. “······애잖아? 아저씨 왜 저렇게 된 건데!” “형아!” “다들 뭉쳐요!” 일행들은 파도를 견뎌내기 위해 서로의 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역부족이었다. 밀려나고, 또 밀려나고. 이대로라면 객실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열차 밖으로 방출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전신을 펼쳐 출입구를 막아섰다. “흐아아아압! 제가 지탱하겠습니다!” 이현성이었다. 꽈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이현성의 [강철화]가 발동했다. 출입구의 금속 물질과 동화된 그의 팔다리가 네트처럼 일행들을 떠받쳤다. 이현성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스치는 김독자의 설화를 보았다. 「이현성에게 김독자는 너무 어려웠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된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이현성이 소리쳤다. “버틸 수 있는 건 조금뿐입니다! 빨리!” 무장성채의 포탑을 소환해 이현성의 뒤를 지탱한 공필두도 외쳤다. “내가 도우면 좀 더 버틸 수 있다! 빨리 놈을 구해!” 일행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 손을 붙잡아요!” 한팔로 이현성을 붙잡은 정희원이 손을 뻗었다. “모두 설화를 개방해요!” 그 손을 이설화가 잡았고, 다시 신유승과 이길영이 이설화의 손을 붙들었다. 아이들의 손은 이지혜와 연결되었고, 페르세포네와 이수경이 그 뒤를 이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 이수경의 손을 잡은 장하영이 외치자, 유상아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수영 씨!” 마지막으로 그 손을 붙잡은 것은 한수영이었다. “······잡았어.” [거대 설화, ‘운명대적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일행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거대 설화가 거친 폭풍에 저항하고 있었다. 폭풍 속의 부표처럼 한수영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뒤의 일행들 덕분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듯이, 일행들은 활자의 파랑 속에서 서로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김독자를 향해 정희원이 외쳤다. “독자 씨! 우리 왔어요! 조금만 참아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일행들은, 마치 하나로 이어진 단단한 문단 같았다. 손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를 느끼며 한수영도 깨닫고 있었다. 저 깊은 어둠을 표현하기 위해 말이란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위로하기 위해, 이야기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김독자!” 문장과 문장이 서로를 떠받치듯 단단히 붙든 손. 그 손에 의지한 채, 한수영은 한 걸음 한 걸음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어두운 활자에 가려진 김독자는 얼굴만이 간신히 드러난 상태였다. 「지 금 너희 가 하는 일 은 무의 미 해」 [제4의 벽]의 목소리와 함께 파랑이 점점 더 거세어졌다. 「김 독 자 는 하 나 야」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지금 저 김독자가 작아지고 있는 이유. 어려진 김독자의 얼굴은 언젠가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을 닮아 있었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잊고. ‘멸살법’을 읽었던 기억조차 잊어갈 것이다. 우주의 대순환 속으로 돌아가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에게 구원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들이 기억하는 ‘김독자’는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손끝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한수영은 손을 내밀었다. 김독자가 눈앞에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의 독자.」 그 김독자가 바로 저기에 있는데. 고작 사 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한수영에겐 마치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무한의 여백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벽이 자신과 김독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개자식아! 내 소설 읽어주기로 했잖아!” 들려주고 싶었다. 네가 희생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누구보다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니까. “‘멸살법’이 다 뭔데! 허구의 세계 정도는 몇십 개든, 몇백 개든 만들어 줄 수 있어!” 외치는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졌다. 그토록 많은 문장을 썼지만, 단 한 사람조차 구할 수가 없다. 어지러운 사위 속에서 김독자의 모습이 흐려지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계획을 잘못 세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훨씬 더 강한 특성을 배웠어야 했다. 더 지독한 설화를 쌓았어야 했다. 애초에 김독자를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일찍 김독자의 계획을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멸살법’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이야기의 작가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작가. 순간 한수영은 고개를 들었다. 「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할 수 있어」 누군가가 대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1863회차에서 온 기억들이 설화가 되어 요동치고 있었다. 한수영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목탄처럼 까맣게 타들어 간 손가락. 그녀는 주인공이 아닌 작가였다. 펜을 쥔 듯 한수영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허공에 만들어지는 궤적. 그 궤적이 활자를 그렸고, 활자는 곧 단어가 되었다. [당신의 특성이 극한까지 활성화됩니다!] [경고합니다! 당신에겐 ‘덮어쓰기’의 권한이 없습니다!]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한수영은 멈추지 않았다. 작가가 독자에게 닿기 위한 방법은, 애초에 하나뿐이다. 「한수영은 상상했다. 언젠가, 또 다른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녀는 가장 힘 있고 곡진한 문장으로 사내의 손을, 팔을 다리를 그렸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만들어 낸 인물.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고결한 정신을 가진 존재. 기나긴 회귀를 끝내기 위해 하늘의 모든 별을 떨어트리고, 결국에는 세계의 시스템조차 부숴버린 사내. 츠츠츠츠츠츠츠―! 모든 등장인물은 곧 작가의 화신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작가 본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손끝을 떠난 등장인물들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한수영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설계자’가 자신의 모든 설화를 개방합니다!] [당신의 새로운 성흔이 개화합니다!] 저 빈 여백을 메울 단 하나의 낱말. 한수영이 절규하듯 외쳤다. “유중혁―!”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의 활자들이 갈라졌다. 파천검도(破天劍道). 오의(奧義). 암해참(暗海斬). 새카만 밤바다를 가르는 한 자루의 검. 사내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초월좌의 투기가 활자의 어둠을 밝혔다. [성흔, ‘등장인물 소환’이 발동합니다!] 그녀가 썼지만, 그녀가 모르는 인물. [등장인물, ‘유중혁’이 부름에 응답합니다!] “꽉 잡아라.” 빛살과 함께 현현한 사내. 유중혁의 강인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한수영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으며 마주 외쳤다. “너나 꽉 잡아!” 이현성부터 유중혁까지. 일행들의 설화가 하얗게 빛났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을 잃었다. “중혁 씨! 부탁합니다!” “사부! 빨리!” 그러나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손을 뻗었다. 단 한 사람만큼의 거리.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다면 닿지 못했을 그 거리가 마침내 좁혀졌다. 활자들을 헤치고 뻗어진 유중혁의 손. 김독자를 보호하던 문장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수천 번의 회귀를 거쳐온 손이, 오랜 기억을 꺼내듯 김독자의 멱살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김독자.” 그리고 다음 순간, 전원이 꺼지듯 세상의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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