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535화
[<스타 스트림>이 자신의 창조주를 바라봅니다.]
피곤함에 젖은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노곤한 의식 속에, 한수영은 도깨비 왕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만 주무십시오. 고결한 신이시여.”
다음 날, 마침내 ‘멸살법’의 마지막 화가 완성되었다.
*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마지막 문장의 타이핑을 끝낸 후, 한수영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날이 찾아오자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녀의 길었던 연재가 마침내 끝났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도깨비 왕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감동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예.”
“유료화 안 하면 안 되냐?”
“신님, 제가 하지 않아도 시작될 이야기입니다.”
완고한 신도처럼 말하는 도깨비 왕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창밖으로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저 해가 뜨고, 다시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면 세계에는 종말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김독자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난 이제 사라질 운명이겠지?”
츠츳, 츠츠츳······.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그녀의 설화들이 꿈틀거렸다. 뛰어나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혼을 바쳐야만 완성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에게 ‘멸살법’ 또한 그런 소설이었다.
[당신의 존재 설화가 위태로운 상태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맞다면, 그녀의 자아는 본체의 까마득한 무의식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본체가 [아바타] 스킬을 익힌 후에야 간신히 약간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겠지. 그리고 1863회차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한수영은 멍하니 창가로 다가갔다. 창백한 하늘 너머로 빛이 밝아오고, 별들이 물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쓰여있고, 동시에 쓰여지고 있다.】
그녀를 1863회차로 보냈던 ‘이계의 신격’은 그렇게 말했다. 순환을 반복하는 우주. 그곳에서 결과는 원인을 만들고 원인은 다시 결과가 된다.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결과는 원인을 부정하고, 원인은 결과를 잡아먹음으로써 존재한다. 그 아득한 법칙을 느낀 순간, 한수영은 이 세계가 마치 체스판 같다고 생각했다. 존재도 근원도 알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의지가 지배하는, 극도의 완결성만을 추구하는 체스판.
종말의 시나리오를 창조한 그녀조차, 우주의 체스판 위에서는 한 조각 ‘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밀려오는 수마를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의 정신력이 한계치에 이르렀습니다!]
한수영은 끔찍한 피로감을 견디며, 더듬거리며 옷을 입고 방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난 사람들은 출근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도깨비 왕이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 한수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동안 소설 편집한다고 고생했어.”
“지금 밖으로 나오면 당신은 죽습니다.”
알고 있다. 이제 해가 뜨고 있으니까.
한수영은 동이 튼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내 역할은 끝났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줄 거잖아. 정해진 시각에 녀석에게 파일을 주면 끝이야. 혹시 몰라서 전에 너랑 얘기한 수정 버전도 좀 써놨는데······ 그건 미완성이니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하지만······.”
“10년이 넘는 세월이었어.”
한수영은 자신보다 몇 뼘은 더 큰 도깨비 왕을 노려보았다.
“한 번쯤은 내 마음대로 하면 안 되냐?”
그녀가 이 세계에 온 이유. 그것은, 1863회차에서 본 김독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천천히 몸을 푼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미노 소프트에 출근하고 있을 김독자를 상상했다.」
종종 도깨비 왕에게서 들은 소식들이 있었고, 김독자 스스로가 댓글로 전한 말들도 있었다. 그녀는 이제 김독자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작가님! 올해부터 저 자취합니다!
―저도 이 근처 사는데. 소설 속에서 보니 신기하네요.
―미노 소프트라고 아세요? 작가님 소설도 게임화되면 좋을 텐데. 제가 한 번 건의를······.
그가 언제 자신의 비극에서 독립했고, 어디에서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은 어떤 모양인지까지.
[본체의 자아가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경고합니다! 당신의 자율 행동 시간은 종료되었습니다!]
[더 이상 통제권을 행사하면 당신의 자아는······.]
한수영은 메시지를 무시하고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오직 김독자가 썼던 말들을 생각하며, 있는 힘껏 달렸다.
―작가님. 정말 몇 번이나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들을, 그녀는 잊게 될 것이다.
[당신의 행동이 개연성에 심각하게 위배됩니다.]
1863회차의 기억을 잊을 것이고.
자신이 어떤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잊을 것이다.
[당신의 설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잊더라도······.
「한수영이, 천천히 달리기를 멈췄다.」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본 뒤, 오랜 세월 동안 텍스트로 존재해 온 사람.
「멀리서 김독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얼굴 그대로의 김독자였다.
그녀의 1863회차를 찾아왔던 사내.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던 사람. 특유의 알랑거림이 얄미웠던 사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 함께 거짓말을 하며 이죽거릴 수 있어, 즐거웠던 사람.
“―――.”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어서 그런 것인지, 점차 육체의 통제권을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수영은 비척거리며 김독자를 향해 다가갔다. 곁을 지나치는 몇몇 사람들이 수상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김독자가 지하철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읽으며 내려가는 김독자.
그가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
가까스로 외친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필사적으로 김독자의 뒤를 쫓아갔다.
―작가님이 써준 이야기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요.
유일한 독자의 말을 읽으며 한수영 또한 살 수 있었다.
유중혁의 다음 생을, 가까스로 쓸 수 있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10대를,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 날들을 다시 한번 견딜 수 있었다.
―이번 열차는······행······.
플랫폼에 서서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김독자가 보였다. 활자가 만든 작은 세계에 숨어, 자신을 지키고 있는 한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곧 시작될 멸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김독자.
장대한 ‘멸살법’의 세계를 살아갈 김독자.
자신이 동경하던 주인공을 만날 김독자.
‘구원의 마왕’이 될 김독자.
일행들을 위해 몇 번이나 자신을 희생하고.
그 결과로, 1863회차에 자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올 김독자.
어떤 이야기를 너무나 사랑한 대가로 ‘가장 오래된 꿈’이 될, 김독자.
[당신의 정신력이 붕괴합니다!]
[본체가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습니다.]
[당신의 설화가 소멸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고, 팔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몸은 점점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말해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가 태어난 것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앞으로 네가 겪을 일들은 결코 너의 죄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녀의 13년은, 오직 그 말을 전해주기 위해 존재했으니까.
「너는 이 이야기를 읽고 자랐지만, 이 이야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간신히 뻗은 그녀의 손끝이 김독자의 어깨에 닿았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합니다.]
톡, 하고 어깨의 감촉을 느낀 김독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밀려든 출근길 인파에, 김독자는 휩쓸리듯 지하철에 탑승했다.
인파가 빠져나간 휑한 플랫폼에 멍한 표정의 한수영만이 남아 있었다.
“······뭐야? 나 왜 여깄어?”
한수영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또 몽유병 도졌나?”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짜증을 냈다.
“아 시바, 오늘 연재분 아직 다 못 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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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예상 표절’이 잃어버린 기억을 표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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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츠츠츠······.
“한수영?”
츠츠츠······.
“한수영!”
찢어지는 이명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영!”
그리고 다음 순간, 한수영은 자신의 뒤통수에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와 함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 왜인지 때린 게 어떤 놈인지 알 것 같았다.
“중혁 씨! 그렇게 세게 때리면 어떡해요! 정신 차리자마자 죽겠어요!”
천천히 고개를 들자, 자신을 부축한 이설화와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도 있었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지혜······ 먼지투성이가 된 일행들.
한수영은 그들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네가 0회차가 떠올랐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겠네.”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기억났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한수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자욱한 활자로 이루어진 안개 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들이 방금 관통해 온 관문이었고, 그녀가 죽을 뻔한 관문이었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이지혜가 물었다.
“언니, 괜찮은 거예요? 아까 무슨 작품 계약하러 가야 한다면서 헛소리하던데―”
[설화, ‘예상 표절’이 이야기를 멈춥니다.]
한수영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왜 지금에서야 이 기억이 되돌아온 것일까.
······아니, 이 기억이 사실이기는 한 것일까?
「한때, 이 손으로 어떤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희미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기억들.
한수영은 순차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내가······ ‘멸살법’의―”
간신히 심호흡을 한 한수영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만 가지.”
그 목소리와 함께 한수영이 고개를 들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나리오 메시지를 보며, 한수영은 다시 한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째서 저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는 것인지 한수영은 잘 알고 있었다.
「일행들은, 다시 한번 99개의 시나리오를 헤쳐왔다.」
“······뭘 그렇게 얼빠져 있어요?”
그녀가 시작한 비극이었다. 그 비극을 정면으로 견뎌온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가요, 수영 씨.”
한수영의 등을 톡톡 두드린 유상아가 앞서 나갔다.
앞서 걸어가는 일행들의 등이 뿌옜다.
불가능했다. 단순히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해냈다.
저 멀리, 세계의 끝을 덮은 활자의 벽이 보였다.
‘최후의 벽.’
시선을 교환한 일행들이 하나둘 병장기를 뽑아 들자, 멀리서 성좌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유중혁도 [흑천마도]를 뽑았다.
“저 너머에, 녀석이 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관리국의 도깨비들과, 최후의 벽을 수호하는 도깨비 왕의 모습. 천천히 숨을 들이켠 한수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긴 이야기였다. 드디어 그 이야기의 끝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그녀가 쓴 결말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