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533화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대체 왜?
새벽 내내, 한수영은 혼이 빠진 상태로 있었다.
처음에는 유중혁처럼 회귀라도 한 것인가 싶었다.
[자율 활동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자율 활동 예정 시간은 약 14시간 후입니다.]
[육신의 통제권을 회수합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떠오르고 육체의 통제권이 사라지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달았다.
[당신은 본체의 자아가 잠들었을 때만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빙의한 것이었다.
‘······혹시 새로운 시나리오인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나리오 메시지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부스스한 얼굴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학교를 가는 어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14시간이 지난 뒤,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떴다.
[본체의 자아가 잠들었습니다.]
[자율 활동이 시작됩니다.]
[육체의 통제권을 이양받습니다.]
낮에는 종일 멍청한 13살짜리로 지내다가, 밤만 되면 귀신같이 육체의 통제권이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절규하는 것이다.
“······나보고 뭘 어쩌란 건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최초의 세계선’이라면, 지금 그녀의 행동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세계선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한수영은 심호흡을 한 후 일단 주변 상황부터 살피기로 했다.
비싸고 심플한 가구들이 들어간 세 개의 방과 거실.
한수영은 이 집을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파출부와, 종종 출입자를 감시하는 게으른 경호원. 그리고 주말마다 낯선 차를 타고 번갈아 찾아오는 부모님.
국회의원 아버지와 배우 어머니.
한수영은 한 번도 그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은 그녀의 존재를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들도, 그녀의 존재가 밝혀지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다 그대로네.”
한수영은 13살의 책상 위로 한가득 쌓인 책들을 후루룩 넘겼다. 그녀가 좋아했던 책도 있었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책도 있었다. 희미한 기억은 아마 또 다른 자신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묻은 손때로 봐서 모두 그녀가 읽은 책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생이 있다.」
별 시답잖은 글귀에 밑줄까지 쳐 놓은 것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돋았다.
이런 별거 아닌 문장이 쌓여서 인간 한수영이 된 거겠지.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이 시간에?
곧장 버튼을 눌러 현관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경호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화면 너머로 경호원이 기절해 있었다. 중절모를 쓴 중년인이 이쪽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깨비 왕입니다.
*
“넌 왜 그런 꼴인데?”
“여기로 왔더니 갑자기 인간이 되어버리더군요. 시스템 권한도 거의 몰수 당해서······ 너는 왜 어려졌습니까?”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내가 그런 게 아닙니다. 심오한 개연성의 영향으로······ 뭐, 아무튼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한수영은 한숨을 쉬며 도깨비 왕을 안으로 안내했다.
“혼자 사시는 겁니까?”
“그래.”
“남는 방이 많군요.”
“······미리 말하지만 재워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마라.”
도깨비 왕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간단히 티백을 우려 차를 내온 한수영이 물었다.
“그래서, 날 이 세계선으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지금부터 함께 ‘창조주’를 찾는 거죠.”
“어떻게?”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온 거냐?”
“짐작 가는 건 물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소설.”
한수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깨비 왕은 역시 ‘멸살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설을 쓴 사람이, 아마 이 우주를 설계한 ‘신’일 겁니다.”
tls123.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쓴 작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노트북을 가져왔다.
“안 그래도 벌써 찾아봤어.”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그 소설, 아직 업로드가 안 됐더라고.”
“······흠, 뭔가가 잘못된 겁니까?”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겠지. 올해 연재가 시작되는 건 확실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들은 게 맞다면 김독자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건 15살 때야. 내가 13살이니까, 그 녀석은 지금 15살이겠지.”
한수영은 언젠가 김독자가 주었던 꼬깃꼬깃한 수첩을 떠올렸다. 급했는지 별의별 정보를 다 적어놓고 갔던 녀석.
“15살의 그분이라······ 뭔가 귀여운······.”
“그보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뭡니까.”
“만약 이 세계에 ‘멸살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예?”
그 질문에 주춤하던 도깨비 왕이 이내 말을 이었다.
“흠······ 그러면 그분께서는 소설을 읽지 못하시겠지요.”
“읽지 못하니, 자연히 ‘멸살법’도 현실이 되지 못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여기서 파생될 세계선들은, ‘종말’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김독자가 ‘멸살법’을 읽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이 세계선의 멸망을 막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너의 생각은 대충 알겠군요. ‘멸살법’의 연재를 막으려는 것 아닙니까?”
“맞아.”
한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tls123이 인외의 존재가 아니라면, 자신의 힘으로 이 세계선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도깨비 왕이 태클을 걸었다.
“재밌는 생각이군요. 하지만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 소설 읽어본 적 있어?”
“아뇨, 없습니다. 너는 읽어본 적 있습니까?”
“어.”
한수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 소설 엄청 못 썼어.”
“······.”
“시작부터 설명투성이에 분량 조절도 제대로 안 되어 있고,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글이야. 오직 김독자 하나만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어.”
“호, 역시 대단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도깨비 왕이 실눈을 떴다. 한수영이 말을 계속했다.
“자기 소설을 다시 읽지 않는 작가는 없어. 게다가 웹소설 특성상 퇴고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오타 수정 때문이라도 자기가 올린 글을 몇 번이고 다시 눌러봤을 거거든. 그런데······ 100화 이후로 그 소설의 조회수는 모두 1이었어.”
그제야 한수영의 말을 이해한 듯, 도깨비 왕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맞아. 그 녀석이 내가 생각하는 멸살법의 ‘작가’야. 왜 본인이 써놓고 아니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어.”
버릇처럼 노트북에 켜놓은 빈 한글창.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한수영이 말했다.
“김독자를 찾아. 녀석이 빌어먹을 ‘멸살법’을 시작하기 전에.”
*
문제는 그 ‘김독자’를 어떻게 찾아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십니까? 시스템 권한이 없어서 직접 찾아야 됩니다.”
“대충 서울 어딘가겠지.”
“······다른 특징 같은 건 없습니까?
“뭐 어디 숨어서 판타지 소설 열심히 보고 있을 거고······.”
“그걸로 대체 어떻게 찾습니까?”
“아 몰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난 겨우 초등학생이라고.”
그 말을 한 뒤 한수영은 곧장 기절했다. 다시 일어났을 때 도깨비 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까 맨날 학교에서 졸았지.”
어쩐지 학교만 가면 잠이 쏟아지더라니······ 설마 다른 자아가 깨어나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도깨비 왕을 기다리는 것은 꽤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수영은 새벽 시간마다 틈틈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주로 하는 일은 블로그 탐방이었다.
“그 녀석 분명 블로그 했을 거 같은데······.”
그러다 심심해질 때면 노트북 안에 비밀 폴더를 만들어 소설을 써보기도 했다. 주로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간단한 엽편들이었다. 그런데 그 엽편을 완성한 다음 날,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낮에 활동하는 그녀의 13살짜리 자아가 일을 쳐버린 것이었다.
“수영아. 언제부터 글을 이렇게 잘 썼니?”
갑작스레 주최된 학교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버렸다.
심지어 내용은 자신이 새벽에 끼적인 엽편과 똑같았다.
“그냥 갑자기 파바박 써지던데요.”
생각해보면 그녀가 글깨나 쓴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13살부터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수영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한수영은 13살의 자신을 구경하며 살아가는 것에 제법 재미를 붙였다.
아마 15살의 김독자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한수영은 어쩐지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그 재수 없는 자식을 만나서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까.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월이 되었고, 10월이 되었다.
가끔 부모님이 집에 와서 그녀가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들을 놓고 갔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한수영은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왜, 아직도 tls123이 연재를 시작하지 않는 걸까. 자신이 무언가 잘못해서 미래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그럴 턱이 없었다. 그녀는 아직 김독자를 만나지도 못했다.
······만약 올해 안에 ‘멸살법’이 연재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 세계는 ‘멸살법’이 존재하지 않은 채로 존속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세계일지도 모른다.
‘멸살법’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가 멸망을 맞을 일도 없어질 테니까. 그러면······.
전화벨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보나마나 또 부모님이겠지 싶은 생각에 전화를 받은 순간.
―그분을 찾았습니다.
“뭐? 어디서? 아니, 지금 어딘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김독자를 찾았다. 드디어.
그런데 이어서 들려온 말은, [예상 표절]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여기가, 그러니까······ 병원 응급실이란 곳입니다.
*
한수영은 경호원의 눈을 피해 새벽 택시를 탔다. 병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새벽에도 분주하게 오고 가는 의사와 간호사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환자들의 비명. 빈 침대차 위로 뿌리 깊은 죽음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시나리오가 없는 곳에서도, 누군가는 계속해서 죽는다.
아주 작은 멸망들. 기록되지 못한 생이 스러지는 장소.
한수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침대차들을 살폈다.
“아―”
그곳에, 15살의 김독자가 누워 있었다. 핼쑥하게 질린 얼굴. 붕대를 감은 소년의 손목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아니, 우리 잘못이 아니라니까! 애가 학교에서―”
김독자와 닮지 않은 얼굴. 사촌 격쯤 되어 보이는 부부가 짜증을 내며 의사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쪽을 바라보다 도깨비 왕을 다그쳤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된 건데.”
“교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는군요.”
한수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김독자의 몸을 살폈다. 투박한 깁스와 붕대로 감긴 몸. 얼굴에 남은 짙은 피멍들.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팔이 힘없이 놓여 있었다.
한수영은 소년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손만큼이나 작은 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좀 해봐.”
“걱정마시죠. 죽을 상처는 아닙니다. 다행히 저층이었고, 나무에 부딪치면서······.”
“그런 말이 아니잖아!”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부부가 보였다. 한수영을 발견한 것인지 뭐라 고함을 치는 부부.
하지만 한수영에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대체 왜.
「“아마 그 소설이 없었으면, 그때 난 죽었을걸.”」
그것이 자신의 기억인지, 아니면 3회차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또또 오바 떤다.”」
「“진짜라니까.”」
먼 이명 속에서 낡은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도깨비 왕의 부축을 받아 병원을 나왔다.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새로운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찾았지 않습니까.”
“······.”
“직접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더군요. 그분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가공할 기운을 보셨습니까? 이제 그분이 자신의 세계를 열기만 하신다면―”
곧 이 세계선에 찾아올 종말이 기대된다는 듯, 도깨비 왕이 수다를 늘어놓았다. 한수영은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김독자는 열다섯 살에 그 소설을 읽었다고 했어.”
“예, 그러니 곧―”
“만약, 그 녀석이 그 소설을 읽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예?”
‘멸살법’이 시작되지 않으면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김독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저기요?”
“······.”
“지금 우는 겁니까?”
김독자의 비극은 흔한 것이었다. 아주 작은 시선들이 모인다면, 약간의 선의가 모인다면 극복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시선을, 선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새벽에나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는 13살짜리 초등학생이, 대체 누구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왜죠?”
그렇다고 저 도깨비 왕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말투도 이상한 데다 시스템도 못 쓰고, 신원 보증도 되지 않은 백수 도깨비를 어떻게 믿고······.
한수영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소설이 날 살렸어. 그러니 주인공에게 빚을 갚아야지.”」
김독자를, 구할 수 있는 것.
“너 돈 있어?”
“예?”
“오천 원, 아니 만 원만 줘봐.”
한수영은 곧바로 도깨비 왕의 돈을 빼앗아 근처의 PC방으로 달려갔다.
도깨비 왕이 비명을 지르며 쫓아왔다.
“그거 제 전 재산이란 말입니다!”
한수영은 졸고 있는 PC방 사장 몰래 후불 카드 하나를 집어 로그인을 하고 인터넷 창을 켰다. 항상 접속하던 웹소설 플랫폼의 주소를 입력한 뒤, 작가명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여전히, tls123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졌음에도 연재는 시작되지 않았다.
한수영은 잠시 화면을 노려보다가, 플랫폼의 [가입신청] 버튼을 눌렀다.
tls123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tls123이 김독자가 아니라면. 어쨌든 그 빌어먹을 소설을 쓴 게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해당 닉네임을 사용 중인 이가 없습니다. 닉네임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그게 누구여도 상관없는 것은 아닐까.
마우스를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비극의 버튼이 그녀의 손끝에 놓여 있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무수한 세계선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이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예.
그녀가 본 ‘작은 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tls123님.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한수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자율 활동 시간이 3시간 남았습니다.]
[본체가 깨어나면 당신의 통제권이 강제로 회수됩니다.]
한글창을 연 그녀는, 곧장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원고를 풀어내듯, 그녀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조금의 오타도 보이지 않는 타이핑.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도려낸 듯 정교한 문장들. 그러나 읽는 이를 배려한 배치도, 몰입을 위한 장치도 없는 서술들. 그녀는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은.
틀림없이, 이 이야기를 읽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것은 거짓이다.」
그녀의 손끝에서 수많은 세계가 멸망했고.
무수한 등장인물들이 죽어갔다.
「적어도, 이것이 진실이 되기 전까지는.」
[예상 표절]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범람했다.
어떤 것은 서사가 되었고, 어떤 것은 설정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한수영의 손가락이 멈췄다.
「자신을 덮친 까마득한 재앙 앞에서 유중혁은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예상 표절]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끝을 보기 전까지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중혁이 정말로 그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녀는 모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가상의 이야기니까.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니까. 그러니 그녀는 그 말을 쓰고 싶었다. 유중혁의 입을 빌려, 그 말을 써넣고 싶었다.
「“너도, 포기하지 마라.”」
깊은숨을 몰아쉰 한수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도깨비 왕이 황홀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깨비 왕.”
천천히 무릎을 꿇은 도깨비 왕이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나 잔다.”
[당신은 짧은 시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정신력을 소모하였습니다!]
[당신의 자아가 잠재의식으로 화하여······.]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상 위였다.
밤 12시. 의식을 잃은 사이 벌써 하루의 사이클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젠장,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한수영은 머리를 싸맨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에 새파란 노트북의 바탕화면이 보였다. 무심코 인터넷 창을 켜 연재 플랫폼에 접속했다.
어제 새벽 올린 글에 벌써 몇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노잼이라는 둥, 설명충이라는 둥 하는 악플들이었다.
“겨우 두 시간 동안 급하게 쓴 글인데 당연히······ 그리고 최대한 ‘멸살법’이랑 비슷하게 쓰려고 그런 거거든?”
그런 댓글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작가님. 정말 재밌습니다. 이거 연재 주기가 어떻게 되나요?
자신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쓴 터무니없을 정도의 순진함. 한수영은 그 이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댓글이 하나 더 달려 있었다.
―혹시... 내일도 연재하시나요?
한수영은 몇 번이고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작은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내가 이 말을 써도 될까.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한참을 망설이던 한수영이 댓글을 썼다.
이 모니터 너머에서 아직 살아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나는 유중혁이다’ 따위를 외치며, 어떻게든 자신의 멸망을 버티어 낼 한 소년을 생각하면서.
3149편에 달하는 회귀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 내일도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