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532화 천천히 뻗은 엄지에 차가운 액정이 닿았다. 그 순간, 화면 위로 스파크 같은 것이 일렁였다. [새로운 파일이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수정본).TXT 그 짧은 사이, 파일명이 바뀌어 있었다. ······최종 수정본?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파일을 넘겼다. 그런데 왜일까. 스크롤이 파일의 거의 최하단에 있었다. 이제 막 편집을 끝낸 듯한 느낌이 드는 파일. 나는 무심코 스크롤을 더 내렸다. 내가 보지 못한 멸살법의 ‘에필로그’가 추가된 것일까? 본편이 끝난 지점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파일. 내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나는 무심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Epilogue 3. 작가의 말 모든 회차는 각자의 방식으로 결말을 맞이한다. 1863회차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스타 스트림>의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해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무수한 문장들. 눈앞에 쓰러진 ‘도깨비 왕’과, 그녀가 이끌고 온 1863회차의 일행들. “대장! 우리가 이겼어!” 눈물을 질질 짜는 김남운.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현성을 보며, 한수영은 자신이 해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것이 1863회차의 끝이었다.」 긴 싸움이었다. 3회차에 있었던 자신이 갑자기 1863회차로 소환되고,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끝을 맞이하기까지······. 도중에 몇 번인가 포기할 뻔도 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 ‘그 녀석’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영원히 잠드는 것보단 다음 시나리오로 가는 게 나아.”」 자신과 같은 3회차에서 온 녀석. 같은 코트에, 같은 무기를 쓰던 사내. 「“묵시룡이 해방되었다고 다 끝난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그녀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들고, 묵시룡을 해방시키더니 끝내는 유중혁까지 시나리오에서 이탈시켜버린 녀석.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순간의 정경이 선연했다. 하나의 ‘등장인물’이 자신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모습······. “대장, 해냈습니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이현성을 향해, 한수영은 손에 든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애들 부축해서 그만 돌아가.” “대장은······.” “나는 한 대 더 피우고 갈 거야. 먼저들 가.” “······그럴 수 없습니다!” ······둔한 녀석이 눈치는 빨라가지고. 한수영은 이현성의 곁에 있던 대천사에게 눈짓했다. “요피엘.”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3회차의 그 녀석과 함께 이 세계선으로 넘어온 대천사. [가자, 덩어리.] “아니, 대장님!” 일행들을 데리고 지구로 귀환하는 대천사를 보며, 한수영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꺼냈다. 멀어지는 ‘멸살법’의 일행들. 모든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는 충만감에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보며, 한수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날개를 펼친 요피엘이 멀어지며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홀로 갈 생각인가? 한수영은 대답 대신 담뱃불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모든 일행들이 사라졌을 무렵, 한수영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최후의 벽.」 이 세계선의 끝을 저지하는 벽이자, 우주의 삼라만상을 기록한 벽. 한수영은 이 벽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열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3회차의 한수영과 연결되면서 얼핏 엿본 광경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 회차를 방문한 김독자를 통해 얻은 정보들이 결정적이었다. [‘윤회를 결정하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미리 모아뒀던 [벽]을, 한수영은 하나씩 끼우기 시작했다. [‘선악을 가르는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불가능한 소통의 벽’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의 조각이 부족했다. 모든 우주를 통틀어 오직 단 한 녀석만이 가지고 있는 조각, [제4의 벽]. 한수영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벽의 홈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설화, ‘예상표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겐 그 [벽]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비슷한 조각은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설화, ‘궁극의 거짓’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수영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설화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단 한 번, 그녀는 [제4의 벽]의 실체를 본 적이 있었다. [진실의 눈동자]를 사용했다가 [제4의 벽]에 가로막혔을 때, 분명 그 벽의 일부를 보았다. [설화, ‘예상표절’이 한계치까지 발동합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한수영의 손가락이 설화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벽의 설화. 그 벽을 이루고 있을, 단 하나의 이야기. 츠츠츠츠츠츳······! 「“저는 독자입니다.”」 「김독자(金獨子). 아버지는 혼자서도 강한 남자가 되라고 내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다.」 다음 순간, 한수영의 손끝이 벽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다음은 팔이, 어깨가, 머리와 몸통이······ 그리고 마침내는 그녀의 모든 것이 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최후의 벽’의 시스템이 당신의 설화 정보에 놀라······.] [시스템이 일시적인 오류를 일으켰습니다!] 올라오는 구토감을 참아내며, 한수영은 바닥을 더듬었다. 성공했다. 이 빌어먹을 벽의 안으로, 무사히 진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그 방 안에는 바리바리 싸놓은 봇짐들과 자그마한 영상 패널 몇 개가 있었다. 패널에서 흘러나오는 설화는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에 도달했습니다.」 「‘구원의 마왕’의 ■■는 ‘영원’입니다.」 3회차의 결말. 그 녀석도, 자신의 세계선에서 시나리오를 끝까지 수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계의 유일한 독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에서, 오직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은 욕망만이 남은······ 무척이나 끔찍한 상상력을 가진, 어떤 아기.”」 그는 계속 작아져, 언젠가는 이 세계의 무의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할 것이다. 1863회차의 한수영은 그것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 그냥 알았다. ‘나라도 그런 식으로 결말을 맺었을 테니까.’ 이 세계는 이야기를 위한 세계. 유중혁의 이야기도, 김독자의 이야기도, 결국엔 하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일 뿐. 한수영은 화면 속에서 멀어지는 지하철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이 우주의 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몇 걸음 앞에서, 손수건에서 눈물을 콕콕 찍으며 화면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히익?] “네가 진짜 ‘도깨비 왕’이냐?” [······너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분명 그들이 죽였던 도깨비 왕이 눈앞에 멀쩡히 있었다. 한수영은 품에서 [흑천마도]를 뽑으며 물었다. “어쩐지 너무 약하다 했어. 왜 제대로 안 싸운 거지? 네놈은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어어, 잠깐만. 시나리오는 이미 끝났습니다.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양손을 흔드는 도깨비 왕에게서는 정말로 전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한수영의 전신에서 가볍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보는 도깨비 왕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의 눈동자가, 오류를 일으킨 [최후의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최후의 벽’을 복제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재능이······ 너는 대체 누굽니까? 너의 영혼은······ 마치 재능의 총화와도 같군.] “무슨 생각으로 그런 허수아비를 세워둔 거지? 이 세계선을 얕보는 거냐?” [허헛, 얕보다니요? 모든 세계선의 이야기는 소중하지요. 다만······ 이제 이 세계선은 별 의미가 없어졌을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설화가 방금 끝이 났으니까요.] 도깨비 왕은 그 말을 하며 패널을 다시 돌아보았다. 한수영이 조용히 설화를 일으키자, 도깨비 왕이 샐쭉 웃었다. [뭘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어차피 너희들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지 않습니까?] “이 세계선의 결말을 건드리지 마.” 그 말을 하는 순간, 패널 화면에 1863회차의 화면이 떠올랐다. 서로를 부축하는 이현성과 김남운. 일행들의 뒷모습이 풀샷으로 보였다. [아 물론입죠. 어차피 중요한 세계선도 아니고······.]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도깨비 왕을 보며, 한수영은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이렇게 이 회차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일까. 정말로 이렇게 끝나도 좋은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가장 오래된 꿈’께서는 그런 걸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테니.] 그 말에, 한수영은 자기도 모르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오래된 꿈’. 그녀가 알던 김독자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의 그 녀석이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본다고 응답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너의 세계에도 신을 믿는 자들이 있었죠. 인간이 부른다고 해서 그 신이 일일이 응답해 주덥니까?] “그거랑은 달라.” [뭐······ 맘대로 생각하시죠. 그보다 이몸은 이만 ‘탈주’ 하려고 하는데, 가 봐도 되겠습니까?] “어딜 가는데?” [이 세계선의 이야기도 끝났으니 저도 다른 곳으로 가봐야지요. 그동안 일도 열심히 했겠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어서······.] “시나리오 그렇게 대충 던져 놓고 내빼시겠다?” [성실한 도깨비 왕이 있는 세계선에서 태어나지 그랬습니까?] 인상을 찌푸린 한수영이 다시 기파를 방출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클리어 보상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냐?” ‘도깨비 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좋습니다. 소원 하나 들어드리는 것쯤이야.] “······그 녀석을 만나고 싶어.” 순간, 한수영은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거기도 네가 있으니까.”」 「“3회차에 있는 널 믿었거든.”」 이 답답함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녀석을 다시 만나면 그 답답함이 뭔지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깨비 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이라 함은······.] 한수영이 화면을 향해 턱짓하자, 도깨비 왕이 대경하며 외쳤다. [너는 눈깔이 삐었습니까? 그분은 이제 내가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른 세계선의 녀석이라도 좋아. 끝을 본 녀석이 아니라도 좋아.” 이제 화면 속에 김독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녀석을, 한 번만 더 만나고 싶어.” [그분은 이 우주에 단 하나뿐입니다.] 도깨비 왕이 저렇게 강경하게 말한다면, 정말로 안 된다는 뜻이겠지. 낙담한 한수영을 보며, 도깨비 왕이 의뭉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너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뭐?” [본래는 출입 금지되어 있는 세계선인데, ‘가장 오래된 꿈’이 새로 즉위하실 때 제가 출입 좌표를 외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가장 오래된 꿈’께서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한수영이 반색하며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제가 방문하려던 곳입니다. 이번 우주의 대서사시가 종료되면 꼭 그곳부터 가보고 싶었거든요.] 도깨비 왕은 그 말을 하며 양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 고고한 <스타 스트림>의 우주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숭엄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보며, 도깨비 왕이 말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우주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지. 이 교묘한 설화의 은하를 구축한 것은 누구인지. 이 세상에 ‘시나리오’라는 것을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결과가 원인을 만들고, 원인이 결과를 낳는 이 모순덩어리의 세계를 완성한 것은, 대체 누구인지!] 한수영은 도깨비 왕의 목적을 눈치챘다. 지금 저 녀석은, 이 우주가 시작한 세계선으로 향하려는 것이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시작된 곳.」 “너······!” 「tls123이 있는 우주.」 [나는 지금 나의 신을 만나러 갑니다. 원한다면, 너도 그 여정에 끼워드리지요!] 츠츠츠츠츠츠츳! 굉음과 함께, 그녀와 도깨비 왕 사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영혼 전체가 산산이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언뜻 도깨비 왕의 미소가 보였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만납시다.] 그것이, 한수영이 기억하는 1863회차의 마지막이었다. * 헉,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새벽 두 시였다. 등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똑딱거리며 들려오는 시계 초침 소리. ······꿈이었나? 한수영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다리에 감겨오는 보드라운 이불의 감촉. 어쩐지 침상이 낯설었다. 협탁에 둔 자리끼를 마시고 침실에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가 불을 켰다. 주황빛 백열등이 어둠을 밝히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까지 자란 단발. 눈을 가늘게 뜰 때면 더욱 도드라지는 눈물점. 틀림없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이었는데. “······이거 뭐야?” 갑자기 심장이 갑갑해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최초의 세계선’에 진입하였습니다.] 화장대 위에 진열된 프라모델들과 만화책. 한수영은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침상 옆에 놓인 익숙한 모양의 책가방. 이제 집안의 어둠이 낯설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책가방을 열자, 교과서가 나왔다. 교과서에는 단정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6학년 2반 2번 한수영. 한수영은 13살이 되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