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531화
「다시, 종말 1시간 전.」
“······빌어먹을, 여기가 어디야.”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든 채, 한수영은 재빨리 시야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본 것은 눈부신 빛살 속에서 사라지던 유중혁의 모습. 한수영은 재빨리 자신의 육체를 점검했다.
성공이다.
부쩍 얇아진 팔뚝과 탄력을 잃어버린 근육.
그동안 쌓아온 설화도, 단련한 스킬과 성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만 다시 시작된다면, 그런 문제들에 대해선 대처법을 이미 생각해두었으니까. 문제는······.
“젠장, 시간 얼마 안 남았네.”
하필 스마트폰 배터리가 거의 다 떨어져서 일행들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톡방에 올라온 일행 배치도를 간신히 다운 받아 확인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자식들, 나 없이도 잘 준비했네.”
잠깐 살피는 것만으로도 작전 현황을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전 전체를 총괄한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데 배치도를 읽던 한수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녀석······.”
한수영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아슬아슬하지만 시간은 충분할 것 같았다.
*
「종말 30분 전.」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는 이지혜의 눈앞에, 검은 머리통이 불쑥 나타났다.
“울찌, 오늘 야자해?”
“아니, 어, 응.”
벌써 돌아온 지 28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별명이었다.
울찌.
그 별명을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었나.
자신에게 또 다른 별명이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다.
“진짜? 그냥 물어본 건데. 웬일로?”
웃는 듯한 눈매.
이지혜는 지난 4년간 단 하루도 그 눈매를 잊은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작은 체구에 창백한 피부. 단추 하나가 떨어진 교복 마이. 실밥이 뜯어진 명찰에 적힌 이름.
「눈을 뜨면, 핏빛으로 충혈된 눈동자가 그녀를 보고 있다.」
떨리는 오른손이 체육복 바지를 움켜쥐고 있었다.
「“지혜야, 괜찮아.”」
이지혜는 필사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살아.”」
“이지혜?”
허공에서 다가오는 친구의 손. 이지혜는 거의 발작적으로 그 손을 피했다.
“······아, 미안. 뭐라고 했어?”
“어디 아파?”
“아냐, 괜찮아.”
“일곱시 쯤에 같이 튈까?”
“절대 안 돼!”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주변에 앉아있던 반 친구들이 순간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지혜가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좀 있으면 고3이잖아. 공부해야지.”
“······울찌, 너 정말 어디 아파?”
「종말 20분 전.」
야자 1교시를 시작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이지혜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꼬깃꼬깃 포장된 작은 상자였다.
“보리야, 이거.”
“뭔데?”
상자를 발견한 친구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지혜는 상자를 넘겨주는 대신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절대 지금 열어보지 마. 6시 50분 되면, 그때 열어봐.”
“뭐 벌레 같은 거 넣은 거 아냐? 나 심장 약한 거 알지?”
그 말에, 이지혜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걱정 마. 절대로 널 죽게 두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지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교실 사물함 뒤쪽에 숨겨 놓았던 긴 장도를 꺼냈다. 놀란 친구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어디가?”
“똥.”
이지혜는 그대로 교실 밖으로 나왔다. 마침 당직 교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지혜. 뭐하냐? 들어가! 야자 시작했다! 너 등에 멘 그건 뭐―”
“선생님. 오늘 당직이세요?”
호리호리한 체격에 핼쑥한 눈매. 뿔테 안경을 쓴 윤리 교사.
적어도 이지혜의 기억 속에서,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선생님, 이따가 교무실 2번 캐비닛 꼭 열어 봐요!”
교사는 유유히 자신을 지나치는 이지혜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뭐? 너 어디······억, 애가 무슨 힘이, 야! 이지혜!”
이지혜는 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계단을 주파하고, 교무실로 들어가 방송실 열쇠를 훔쳤다. 다시 곧바로 3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내내 이지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태풍여고’ 지역의 첫 번째 시나리오는 다른 지역보다 몇 분 일찍 시작했다.」
이지혜가 이곳에 미리 배치된 것 또한 그 때문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따자 익숙한 방송실의 정경이 보였다. 태풍여고의 방송실은 제법 장비 품질이 훌륭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사시 지역 회선으로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권한도 갖추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자신을 찾는 선생의 외침을 들으며, 이지혜는 미리 준비해 둔 예비 동력원을 꺼냈다. 그리고 침착하게 방송 장비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선을 연결하는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 연결되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방송부원을 했었고, 점심시간이 되면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적어도 멸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살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이지혜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날 교실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이지혜.”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엔 예상 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수영 언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수영이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지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안색이 영 안 좋네.”
“괜찮아요.”
잠시 침묵하던 이지혜가 말했다.
“시나리오, 시작되는 거 맞겠죠? 아님 저 정학당할 수도 있어요.”
“시작될 거야. 근데 꼭 여기서 시작할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다른 곳으로 가.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여기가 내가 시작해야 할 장소에요.”
이지혜가 웃었다.
“여기가 ‘상처받은 검귀’가 태어난 장소니까요.”
이지혜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제 모든 장비 세팅은 끝났다.
「종말 10분 전.」
그리고 그것이 시작되었다.
쿠구구구,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의 형질이 뒤바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을 찢는 듯한 소리.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이런, 예정보다 일찍 채널을 열어버렸네. 아, 아, 잘 들리시나요?]
이지혜는 한수영을 돌아보았다. 한수영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다. 우습게도, 그들은 이 순간만을 줄곧 기다리며 살았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일단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 상황은 영화 촬영이 아닙니다. 테러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은―]
그것은 그녀가 가장 증오해온 도깨비의 음성.
교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들.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준비한 작전을 시작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이지혜는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재난 방송을 시작합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
―모두 잘 들으세요. 교실에 계신 분들은 청소용구함을, 교무실에 계신 분들은 2번 캐비닛을 열어보세요! 빨리!
이지혜는 알 수 있었다. 지금쯤 다른 일행들도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이 광경을 도깨비가 띄운 패널 화면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서로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적어도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지혜는 일행들을 생각했다. 이 세계로 오기 전, 일행들과 한 약속을 떠올렸다.
「“······적어도 무엇을 죽일지는 스스로 선택할래요.”」
신유승은 강아지를 죽이고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이모를 구할게.”」
이길영은,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살릴 것이다.
「“또 군대 가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이현성은 군대를 나올 것이며.
「“그때 그 할머니를 꼭 구하고 싶어요.”」
유상아는 구하지 못했던 이를 구할 것이다.
「“개연성이 허락하는 기회는 한 번뿐이다. 두 번이나 ‘집단 회귀’를 사용할 수는 없어.”」
유중혁은, 더 이상 회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회차에서 ‘상처받은 검귀’는 되지 않을래요.”」
학교 내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 무렵, 이지혜가 입을 열었다.
―모두 하나씩 찾으셨죠?
마치, 한때의 김독자가 사람들을 향해 메뚜기를 던졌던 것처럼.
―그거, 힘껏 바닥으로 던져요!
그 말과 함께, 이지혜는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앰플을 터트렸다.
[당신은 총 133개체의 생명체를 학살하였습니다.]
[학살 내역 : 개구리 알 133개]
[저항력이 없는 생명체를 살해하였기에 획득 코인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총 6650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
.
.
[메인 시나리오 #1 – 가치 증명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그들은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눈치챈 담당 도깨비가 이지혜의 눈앞에 나타났다.
[무슨······ 이봐 당신! 대체 뭐야? 어떻게 이런 짓을······!]
그리고 다음 순간, 시나리오 전체에 개연성의 후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막대한 코인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지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츠츠츠츠츠츳!
[성좌님들! 오해십니다! 국장님··· 아닙니다! 이건 제 잘못이······ 관리국 재고는······ 으아아아!]
채널이 해체되는 소리와 함께, 하급 도깨비가 비명으로 스러졌다.
「PM 7:00」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방송실 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이 비치고 있었다.
하늘 저편에서 균열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3호선의 지하철.」
“모두 침착하세요! 다들 이거 쥐고 던져요! 빨리!”
「광화문.」
“당황하지 말고, 모두 받은 병 바닥에 터트리세요! 살 수 있어요!”
「병원.」
“아직 앰플 못 받으신 분!”
서울의 모든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예정된 시나리오가 변하고 있었다.
[시나리오 전 지역에서 믿을 수 없는 업적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관리국에서 대량의 코인이 반출됩니다!]
폭발하는 코인들 속에서, <스타 스트림>이 전율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이 갑작스런 시나리오의 이변에 놀랍니다!]
[관리국의 도깨비들이 과도한 코인의 반출에 경악하며······!]
[한반도 시나리오를 감시하던 다수의 성좌들이······!]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코인의 세례. 하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풍경이었다. 곁을 돌아보자 한수영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치, 저 밤하늘 어딘가에서 그들을 보고 있을 누군가를 찾듯이.
“가요, 아저씨 구하러.”
그들의 작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시금 의식이 깨어났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몸에 힘을 넣어 보았다. 팔, 다리, 어깨······ 예전과는 확실히 몸의 감각이 달라져 있었다.
「김 독자 많 이작 아 졌 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작아진 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손가락의 마디가 1cm는 더 짧아졌다. 나는 약간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몇 회차까지 봤더라?”
「7 8 6 회 차.」
무언가를 전력으로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유중혁과 동료들이 하나의 회차를 살 때 나 역시 하나의 회차를 살았다.
2회차를, 3회차를, 4회차를, 다시 5회차를······.
「그 것이 가장 오래 된 꿈 의 숙 명」
그 무수한 선택들이 만들어 낸 설화들을 읽고 또 읽었고, 다시 거기에서 파생된 세계선들을 보고 또 보았다.
「김독자는 먼 해안가를 걸어가듯이 세계를 읽었다.」
설화의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 나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이 뭔가를 잃어버렸다. 불현듯 무언가 생각나 돌아보면, 그곳에 발자국들이 있었다. 발자국은 밀려온 파도에 금세 지워졌고, 나는 그 흔적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범람하는 설화 속에서 뭔가를 잊어가고 있다는 기억이 들 때면, 나는 내가 살았던 회차를 생각했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했다.
그러면······.
“······어?”
손끝이 벌벌 떨렸다.
내가 살았던 것이 몇 회차였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 보이는 것은 유중혁의 지난 회차들뿐이었다.
「끝내 남는 것은,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뿐.」
나는 부쩍 작아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긴 여정의 끝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
「김독자는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을 떠올렸다.」
결국 나는 내가 보았던 ‘가장 오래된 꿈’이 되는 것일까.
모든 기억을 잃고, 영원한 우주의 꿈을 꾸는 거대한 무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해내야 한다. 떠올려야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버릇처럼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해질 때면 나를 지켜주었던 작은 세계.
오래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버린 새카만 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간단히 설화를 조작해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자 익숙한 바탕화면이 떠올랐다. 그곳에,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한 한 편의 소설이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최종본).TXT
그동안 나는 일부러 최종본을 읽지 않았다.
그것을 읽으면 무언가가 결정되어버릴까 두려웠다. 앞으로 동료들과 살아갈 날들이, 누군가가 먼저 쓴 이야기에 좌우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김독자 컴퍼니>의 이야기는 끝났고, 나의 ■■은 정해졌다.
「이것을 읽으면, 내가 잊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tls123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작가는 ‘최종본’에 대체 무엇을 써두었을까.
작가가 낸 결말은 무엇이었을까.
본래 이 이야기는, 어디서 어떻게 끝나게 되어있었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파일을 향해 짧아진 손가락을 가져갔다.
마치 처음으로 ‘멸살법’을 읽었던 그 날처럼.
「그렇게, 김독자의 마지막 독서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