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530화
전지적 독자 시점.
그 문장을 본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김독자 스킬 이름인데?”
세계선의 틈새에 왜 이런 게 새겨져 있는 것일까.
문장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머니의 행동을 납득할 이유도,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에세이를 쓴 것도.」
「내가, 살인자의 아들이 되어야만 했던 것도.」
문장들은 일정한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유창하게 뻗어가는 문장들. 그 순간 한수영은 깨달았다.
‘회귀’라는 것은 거슬러 올라간 세계선의 ‘어느 시점’에서 새로운 세계선을 뻗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세계선을 거스르던 중, 이 틈새에 걸린 것이라면 어떨까.
그런 것이라면, 지금 이 문장들이 있는 이 시점은―
“유중혁! 이거―”
돌아보았을 때, 유중혁 또한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쾅, 콰앙―!
설원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그들이 끼어있는 세계선의 틈새를 두드리고 있었다.
「“뱉어! 뱉으라고!”」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설마 이 상황은······.
「나는 미친 듯이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모든 행동이, 말들이 전부 시나리오가 되어 벽 위의 문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닥쳐! 이건 내 감정이야!”」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문장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수영은 알 수 있었다. 이 글자들의 너머에 김독자가 있다. 멸살법의 3회차. 그 과거의 어딘가에서 싸우는 김독자.
「김독자는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이 벽을 부술 수 있을까? 설마, 이것이 ‘멸살법’을 읽은 대가일까. 그걸 읽어서, 내 모든 현실조차 소설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한수영은 확신했다.
“[암흑성]의 그때야.”
“······암흑성?”
“김독자가 ‘꿈을 먹는 자’와 싸운 후의 상황이라고. 녀석이 언젠가 그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 자기 스킬 안에 갇혀서······.”
최종 시나리오에 도전하기 직전, 한수영은 김독자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것도 있었고, 지난 일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혹시나 과거에 풀지 못한 사건들이 미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누가 날 불렀었는데······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꼼짝없이 망했을걸.
“야! 김독자!”
“한수영,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이미 기록된 과거다.”
틈새는 틈새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가 틈새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곳에도 문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이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닐까.
한수영은 다시 한번 거대한 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새까만 입자 같은 것이 묻어 나왔다.
그것은 흑연이 아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아주 작고 고운 까만색 입자.
한수영은 글씨를 보다 강하게 움켜쥐었다.
만약 이것이 기록된 이야기라면, 그 기록을 바꿀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화신, ‘한수영’의 새로운 설화가 깨어납니다!]
츠츠츠츠츳!
엄청난 스파크가 터져 나와 그녀의 전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계의 모든 문장들이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바보 같은······ 지금 그럴 때가―!”
[설화, ‘퇴고 전문가’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츠츠츠츠츳!
“야! 정신 똑바로 차려!”
문장을 쥐자 그 문장에 담긴 생이 전해졌다. 김독자의 생이었다. 이 문장을 [최후의 벽]에 써넣기 위해 살아왔던 김독자의 생.
한수영은 [제4의 벽]과 씨름하는 김독자를 향해 외쳤다.
“이건 네 스킬이잖아! 네 스킬에, 네가 먹히지 말라고!”
기록된 문장을 수정하듯, 그 문장 전체의 기틀을 잡고 흔든다. 어쩌면 그녀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김독자는 혼자서도 위기를 잘 이겨낼 것이고, 그녀의 목소리는 김독자에게 영영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수영은 [벽] 위에 그녀의 문장을 남겼다.
츠츠츠츠츠츳!
어쩌면, 벽 너머의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니까.
“한수영, 회귀가 시작된다!”
“닥쳐! 너도 빨리 한마디 해!”
환한 빛살 속에서 한수영과 유중혁의 모습이 다시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습이 사라지기 직전, 인상을 한껏 찌푸린 유중혁이 한 마디를 남겼다.
“스킬을 해제해라, 김독자.”
*
유상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주변에 희미한 볕이 감돌고 있었다. 눈앞의 모니터가 일렁였다. 모니터에는 그녀가 열람하던 인사기록부가 띄워져 있었다.
“······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다시 한번 눈을 깜빡이자, 연약한 육신의 감각이 느껴졌다. 스킬과 성흔의 힘을 잃어버린, 시스템의 축복에서 벗어난 화신의 육체. 이것이 인간의 감각이었다.
돌아온 것이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회귀 시점을 확인할 것. 비상 연락망을 통해 일행들과 교신을 시도할 것. 그리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오래된 이름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김민우 대리와 장은영 부장. 그리고······.
“하하, 요즘 인사팀 어때? 상아 씨 할 만해?”
시비라도 걸러 온 것인지 껄렁거리며 다가오는 사내. 강영현 전무였다. 그리고 그 뒤를 굽신거리며 따라오는······ 재무팀의 한명오 부장도 보였다. 눈치를 살살 보던 한명오 부장이 그녀를 향해 헤실헤실 웃었다. 그는 지난 4년간 그녀가 알던 한명오가 아니었다. 그녀가 알던 한명오는, 이번 회차로 넘어오지 못했다.
“유상아 씨. 이번 바이어 건 아주 훌륭했······.”
유상아는 말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강 전무를 지나치고, 복도로 뛰어들었다. 갑자기 현실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정말로 회귀는 성공한 것일까.
그녀가 한때 잘 알았던 세계의 정경이 흘러갔다.
그녀는 한때 이곳으로 정시에 출근했고, 때가 되면 퇴근했다.
그것이 이 세계의 규칙이었고, 그 규칙에 충실히 따랐다.
“아니 이봐! 유상아 씨!”
똑같은 모양의 사원증. 한때는 그것을 목에 걸기 위해 애썼던 적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줄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며 QA팀 부서에 도착했을 때, 유상아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있었다.
“어? 유상아 씨?”
주머니에 넣은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을 지적하는 톡들. 뒤쪽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
유상아는 한 걸음 한 걸음 파티션을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 그녀가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헤드폰을 쓴 채 그녀를 올려다보는 사내.
파티션 구석에서 항상 충전 중이던 보조 배터리.
그곳에 그녀가 기억하는 김독자가 있었다.
시나리오가 시작하기 전의 김독자.
유상아는 자기도 모르게 김독자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엇······?”
동그랗게 눈을 뜨는 김독자. 그녀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란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하지만 그녀가 듣고 있는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었다.
「“유상아. 왜 그렇게 냉정해? 이 김독자가 김독자인 것처럼, 그곳에 남겨진 김독자도 김독자야. 너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한수영의 말.
그때 자신은, 왜 그렇게 냉정하게 반응했던 것일까.
“독자 씨.”
이제는 안다. 김독자의 이 얼빠진 표정을 보고서도, 모를 수는 없다.
「“수영아. 나한테도 소중한 기억은 있어.”」
그녀는 한수영처럼 ‘작가’도 아니었고, 유중혁처럼 ‘주인공’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상아였다. 김독자의 회사 동료이자, 김독자의 친구인 유상아.
괜스레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렸음에도, 유상아는 환히 웃었다.
「이 김독자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돌아왔다.」
김독자의 입술이 뻐끔거린다. 그녀를 알아보는 듯, 김독자의 혼탁하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돌아온다.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튀어 오르는 스파크를 본 순간,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잊어버린 이야기를 찾으러 가요.”
*
유상아는 김독자를 이끌고 곧장 회사를 빠져나왔다. 혹시 몰라 사무실 복도를 달리며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회사 그만두시고, 메뚜기나 한 마리 잡아두세요!”
광화문역에 내렸을 때, 그들을 제일 먼저 맞은 것은 정희원이었다. 멀쩡한 세종대왕상과 이순신 상 아래에서 정희원이 손을 흔들었다.
“유상아 씨!”
반가움의 해후 겸 힘껏 포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직 도착한 것은 정희원뿐인 모양이었다.
“독자 씨 상태는 왜 그래요?”
“······기억 상태가 온전치 못한 모양이에요. 현실 인식에 혼란을 겪고 있어요.”
아무래도 아바타 상태라 그런 것이려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중혁 씨랑 수영 씨는요?”
“아직 연락이 안 돼요. 중혁 씬 몰라도 수영 씨는 제일 먼저 전화 돌릴 사람인데······.”
이미 회귀가 성공한 지도 몇 시간이 지난 상황.
전화를 빌려서라도 연락을 했을 사람에게 연락이 없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일행들은요?”
“길영이는 지방에 있고, 유승이랑 지혜는 조금 늦을 거 같대요. 그리고 현성 씨는―”
“헉! 헉! 희원 씨! 상아 씨!”
멀리서 양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커다란 곰이 보였다. 곰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엥? 군부대 안이라 못 나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탈영했습니다.”
“······그래도 되는 거예요?”
“곧 세계가 멸망하는데 그런 게 뭐가 중요합니까.”
“곧이라 말하기는 좀 시간이 남았는데요.”
정희원은 그 말을 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에 표시된 일정 화면을 보여주었다.
「시나리오 시작까지 D-28」
이현성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시나리오 시작 하루 전으로 회귀하는 게 목표 아니었습니까?”
“차라리 잘 됐죠. 준비할 시간도 벌었으니 더 많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우우웅.
미리 접속하기로 약속한 톡방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희원은 번역기를 돌려 메시지들을 읽었다.
―중국의 페이후 나는 무사히 도착한. 미세먼지가 있다.
―인도의 란비르 칸, 잘 도착했습니다. 그리운 냄새와 함께.
―일본의 아스카 렌입니다. 익숙한 천장. 아무 문제 없습니다 (`・ω・´ ).
회귀에 성공한 세계선 최강의 100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일행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을 시작하죠.”
*
「D-21」
―군부대에서 다수의 총기를 무단 탈취한 ‘이 중위’에 대한 수배 명령이 내려져······.
―최근 인터넷에서 번지기 시작한 갑작스런 ‘종말론’에 일부 전문가들은······.
「D-14」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종말론’이 벌써 2주일째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종말론자 ‘셀레나 킴’은 2주 뒤 찾아올 격변에 대비하여 준비물을 언급하며······.
―재계의 일부 유명 인사들조차 종말론에 동조하여 대중들의 비난을······.
「D-7」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연구 중이던 미생물 앰플이 대량으로 탈취당해······.
―최근 10대들 사이에서 개구리 알을 수집하는 열풍이······.
「D-1」
―마침내 종말론자 ‘셀레나 킴’이 공지한 ‘멸망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D-DAY」
이설화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앰플을 내려다보았다.
―앰플 안에 살아있는 벌레나 벌레 알들을 넣어 놨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열람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비상 앰플 배치도 뿌렸어요.
―이제 행운을 빌어야죠.
「종말 4시간 전」
―인도 뉴델리, 준비 완료했습니다.
―중국 베이징, 준비 완료.
―미국 워싱턴, 준비 끝났습니다.
「종말 1시간 전」
―대한민국 서울, 준비 완료.
「종말 10분 전」
―신유승, 이길영 팀. 3호선 지역 배치 완료했습니다.
3호선 압구정역.
멀리서 달려오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며, 신유승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잘 되겠지?”
“당연하지. 너 개구리 알 몇 개 가지고 있어?”
“102개. 너는?”
“524개.”
신유승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길영의 페트병을 노려보았다.
“야, 너 혼자 그렇게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아 다들 앰플 하나씩 있는데 뭐. 그 시커먼 놈보다 강해지려면 이번에는 부유하게 출발해야 돼! 이것만 있으면······!”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이길영의 손끝에서 페트병을 탈취했다.
깜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에 익숙한 사내가 서 있었다.
“시커먼 놈!”
“중혁 아저씨?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성흔에 문제가 생겨서 늦었다.”
숨을 헐떡이는 유중혁이 이마를 닦으며 페트병을 품에 넣었다.
“김독자는?”
“상태가 안 좋아서 설화 언니가 데리고 있어요. 아직 시나리오 이전이라 그런지 잠깐 괜찮았다가 또 의식불명이에요.”
“작전 준비는?”
“모두 끝났어요.”
신유승은 긴말 대신 유중혁에게 예비용 스마트폰 하나를 건넸다.
투덜거리던 이길영도 품속에서 페트병 하나를 더 꺼냈다.
“흥, 뺏어갈 줄 알고 미리 하나 더 만들어 놨거든?”
「PM 6:55」
멀리서 지하철이 달려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지하철에 탑승했다. 평소와 똑같은 냄새의 3호선 지하철. 누구도 종말 따윈 생각하지 않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흘러가는 터널의 어둠을 보며 이길영이 문득 중얼거렸다.
“······근데 정말 시나리오가 시작될까?”
이길영이 약간 자신 없는 표정으로 유중혁 쪽을 흘끔거렸다. 지난 28일 동안, 이길영은 일행 중 누구보다 열심히 종말을 준비해왔다. 그랬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이길영은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 이길영을 향해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시작될 거다. 지금까지 1864번이나 그랬으니까.”
홀로 오랫동안 종말을 기다려온 사람의 말이었다. 유중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조용히 자신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분전, 2분전, 1분 전. 그리고.
「PM 7:00」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철이 급정거를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지하철의 어둠에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 오직 세 사람만이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다.
새카만 어둠을 밝히듯, 유중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전명 <오징어 포획>,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