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529화 이수경은 가장 어두운 별의 앞에 서 있었다. “같이 가주실 건가요?”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천천히 눈을 뜹니다.] 페르세포네가 묵고 있는 곳은 명계가 아니었다. <스타 스트림>이 무너진 후 명계와의 통로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공단의 별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온종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설화들을 헤아리듯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 ■■는 이곳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죠.]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남긴 온기. 이수경은 그것이 누구의 설화인지 알고 있었다. [설화, ‘가장 어두운 밤의 약속’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함께해주겠다던 명왕. 그는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끝에서 페르세포네를 대신해 죽었다. [가요. 그 애를 구해야죠.] * 정희원은 공단 별실의 낡은 문을 두드렸다. “계세요?” 손잡이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다. 곧바로 보이는 것은 그녀를 환영하는 홀로그램 피규어였다. 『김독자, 어룡에서 탈출!』 어룡에서 탈출하는 순간의 김독자가 그곳에 있었다. 심지어 홀로그램 피규어의 아래쪽엔 대사도 떠올랐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 볼까.”」 정희원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그 기이한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런 게 하나가 아니었다. 『김독자, 절대 왕좌 파괴!』 『김독자, 마계 해방!』 “······유승이나 길영이 방도 이 정도는 아닌데.” 정희원은 구경이라도 하듯, 그 피규어들을 둘러보았다. 연도순, 시나리오순으로 배치된 피규어들을 따라가고 있으니, 무릇 옛 생각들이 피어났다. 우리엘은 아마도 이 모든 순간의 김독자를 모두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개중에는 특별 소장품으로 보이는 오징어 뒷다리 같은 것도 있었다. 『오징어 김독자의 마지막 다리 made by Yangsan.』 의심스런 눈으로 유리관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그거 잘못 건드리면 우리엘이 화낼 걸.] 언제부터였을까. 유리관 곁의 테이블에 수척한 얼굴의 대천사가 앉아있었다. 아니, 이제 그녀가 대천사임을 알아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먼저 말을 걸어온 주제에 쳐다보지도 않는, 묵묵히 책의 페이지만 넘기는 여인. 정희원은 그녀의 긴 속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가브리엘. 우리엘은 어디 있어요?”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녀의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져가는 설화의 힘. 어쩌면 그것이 대천사의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에덴의 마지막 화신이여.] 고요히 책을 덮은 가브리엘의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이미 정희원이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세계선을 넘어본 적이 있어. 굉장히 아찔한 경험이었지. 그런데 너희가 하려는 짓은 그것보다도 더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에덴식 저주인가요?” [이곳이 너희의 현실이야. 도망가지 마. 기껏 <스타 스트림>을 무너뜨리고 얻은 결과를 다시 무로 돌릴 셈은 아니겠지?] 현실. 그 말의 무게가 괜스레 가슴을 짓눌렀다. 정희원은 대답 대신 방의 정경을 다시 훑어보았다. 우리엘과 가브리엘이 사용하는 이층 침대가 구석에 놓여 있었다. 그 위로 포스터처럼 붙어 있는 이라는 글씨. 「성운 ‘에덴’은 끝났다. 이곳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현실을 만드는 건 풍경이나 장소가 아니에요.” 에덴이 끝났음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이곳을 에덴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대천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단둘이라고 해도.」 “멋진 에덴이네요.”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리엘은 어디에 있죠?” [······뒤에.] 돌아보자, 그곳에 우리엘이 있었다. 군것질거리라도 한가득 사오는 길인지, 우리엘의 작은 품 안에 인스턴트 식품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깜짝 놀란 듯 동그랗게 뜬 에메랄드빛 눈동자. 정희원은 오랫동안 자신의 배후성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엘에게 대천사의 광휘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로 자라났던 날개는 사라져 있었다. 옷도 바뀌었다. 즐겨 입던 검은색 드레스 대신, 회색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우리엘. [희, 희원아.] 우리엘이 왜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 정희원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리엘.” 「사실 우리엘은 이곳에 남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자신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수행해 온 대천사. 그런 그녀를, 다시 한번 지옥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정희원은 입을 여는 대신 자신의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희미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옥염화]. 자신의 배후성이 건네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불꽃. 그 불꽃이 피어오른 순간, 방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똑같은 빛을 뿜는 조형물이 있었다. 정희원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의 인형. 이곳에는 김독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홀린 듯 다가간 정희원이 유리관 속을 바라보았다. [심판자의 검]을 쥐고, 새하얀 [지옥염화]를 내뿜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화신』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른 채,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우리엘.” [희원아.] 그 따뜻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희원은 깨닫는다. 이미 그녀의 배후성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때처럼, 다시 한번 내가 살아가는 걸 응원해줘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우리엘은 슬프게 웃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겠냐는 듯이. 그런 우리엘을 향해, 정희원이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번 나의 배후성이 되어줘요.” * “염룡이 이 자식 어디 갔어? 염룡아아!” “장군님! 우리 장군님!” 각자의 성좌를 찾아 나서는 한수영과 이지혜의 목소리. 난잡한 군중들의 한가운데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여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가 심통이 난 듯 뾰로통한 얼굴. 유중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에 있으면 너는 안전하다.” “······.” “이 세계는 곧 안정될 거다. 이제 이 세계에는―” “하지만 오빠가 없잖아.” 유미아가 반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중혁은 그것에 대해 한마디를 하려다 말을 바꾸었다. “다시 돌아올 거다.” “언제요?” “다른 세계선의 끝을 보고, 김독자를 구하면.” “그게 언젠데요?” 유중혁은 답하지 못했다. “위험할 거다. 너를 그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거짓말.” 유미아의 전신에서 희미한 초월형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초월좌의 격. 지난 몇 달 간의 수련으로, 놀랍게도 유미아는 초월좌의 제1형을 각성했다. 역대 최연소 초월좌. 그야말로 놀라운 재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와 그렇게 말할 거면 왜 내가 훈련하는 거 안 말렸어요? 나도 길영 오빠랑 유승 언니랑 같이 훈련받았다고요.” “······.” “솔직하게 말해줘요, 오빠.” 흔들림 없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계획은 충분히 세웠다. 누구도 잃지 않도록. 그 어느 때보다 꼼꼼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계획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변수는 있는 법이고, 유미아는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시선을 낮춘 유중혁은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유미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같이 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유미아가 원하는 대답이었다. 작은 손이 유중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회귀하자마자 동료들이 바로 널 데리러 갈 거다.” “나 없었으면 ‘깃발 쟁탈전’때 다 죽었을 거면서.” 유미아는 그 말을 하며 입을 와왕, 하고 벌렸다. 그 입안을 들여다본 유중혁이 인상을 쓰며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야, 다 찾았어!” 흑염룡에게 헤드락을 건 한수영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 뒤에는 해상전신과 고려제일검의 양팔에 매달린 이지혜가 보였다. 유중혁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원숭이는?” 한수영은 말없이 턱짓했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거드름을 피웁니다.]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히죽거리는 제천대성이 둥둥 떠 있었다. “언제 온 거지?” [준비가 너무 늦는 것 아닌가? 네놈 때문에 막내가 죽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사지를 찢겠다.] 역시 격이 떨어지고 <스타 스트림>이 멸망해도 신화급은 신화급인 모양이었다. 시스템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저런 기백을 내뿜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천대성뿐이었으니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 네놈을 베어버릴 것이다.” 그 말에 제천대성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못다한 승부를 내도록 하지. 네놈이 과연 ‘은밀한 모략가’에 비할 수 있을지 반드시 시험해보겠―] “자자, 다들 준비 끝났지?” 한수영의 목소리에, 대기 중이던 화신들이 하나둘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회귀행에 참가하기로 한 <김독자 컴퍼니>들도 모두 모였다. 유상아,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길영, 이지혜, 이설화, 장하영. 거기에 이수경과 셀레나 킴까지. 그들을 배웅하며, 공단의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패왕, 내가 알려준 것들을 꼭 기억하세요.” “페이후. 네게 대륙의 미래가 달렸다.” “란비르 칸―”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도깨비 하나. “비유.” 신유승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공단의 사람들과 함께 남은 비유는, 미묘하게 우울한 표정이었다. 「비유는 함께 갈 수 없다.」 한명오의 딸이 그러하듯, 비유 또한 이 세계의 멸망이 시작되고 난 후 태어난 존재. 지금부터 그들이 가는 길에 비유는 ‘이야기꾼’이 되어줄 수 없었다. 비유는 일행들을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슬퍼하지 마. 어느 세계선이든 너흴 응원할 테니까. 나는 ‘도깨비 왕’이야. 조금 더 열심히 수련하면, 그리고 혹부리들이 남긴 유산들을 찾으면 나도 세계선을 넘을 수 있을 거야. 그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다릴게. 몇만 년이라도.” 비유가 바앗― 하고 울었다. 공단 전체에 불꽃놀이처럼 폭죽이 터졌다. “출발한다.” [성흔, ‘집단 회귀 Lv.1’이 발동합니다!] 마침내 유중혁이 회귀를 시작했다. 성흔 발동과 동시에, 유중혁과 일행들의 전신이 황홀한 빛살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때. “싸가지 없는 새끼들! 나는 데리러 오지도 않아―!” 멀리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공필두가 회귀행의 빛살 속에 끼어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사라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환히 웃는 비유의 표정이 일그러져 보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혼이 산산이 분해되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신유승이 이를 악물었다. 「유중혁은, 언제나 이런 순간을 홀로 견뎌온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신유승은 자신이 먼 은하를 유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빠르게 멀어져 가는 배경들. 세계선마다 다른 모양의 <스타 스트림>. 그 이야기의 잿더미 속에서 버려진 신격들이 일행들을 부르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이리이리이리이리이리이리】 한수영이 신유승의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신유승이 몇 번이고 멀어져가는 이계의 신격들을 돌아보았다. 지난 회차에서 김독자는 ‘이계의 신격’들을 구했다. 잊힌 이야기들에게 다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 우주에는 저렇게 많은 잊힌 것들이 남아 있었다. 한수영이 다시 말했다. “우리는 김독자가 아니야. 저 모든 세계를 구할 수는 없어.” 신유승도, 일행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눈앞의 세계 하나를 구하기에도 급급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끝을 보지 못한 이야기들이 모두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멀어진 이계의 신격들은 다시 아름다운 은하로 뒤바뀌었다. 모든 비극은, 멀리 있을 때는 저토록 아름답다. 한수영이 소리쳤다. “야,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 제대로 가는 거 맞―” 어디선가 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쩌저저저저적―! [세계선이 ‘집단 회귀’의 발동을 감지합니다!] [<스타 스트림>이 해당 성흔의 개연성을 지적합니다!] [해당 성흔은 개연성의 한도치를 넘어선 힘입니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츠츠츠츠츳! 한수영이 뭐라고 소리치는 순간, 시야가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한수영은 자신이 새하얀 설원 같은 곳에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야! 여기 어딘데?” 일행들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멍청한 표정을 한 유중혁뿐이었다. “······세계선이 엉켰다.” “그게 뭔 개소리야! 제대로 준비한 거 아니었어?” 눈을 감은 채 뭔가를 가늠하던 유중혁이 말했다. “준비는 제대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은······ 무사히 1865회차에 도착한 것 같군. 이곳에 온 건 우리뿐이다.” “여기가 어딘데?” “······아무래도 세계선의 틈새에 갇힌 것 같다.” 한수영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하얀 설원의 사이사이로 새카맣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둥둥 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설화를 모아 다시 성흔을 발동할 거다.” “얼마나 걸려? 빨리하라고.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하면 계획이고 뭐고 말짱 꽝이야!” 유중혁은 이미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 한수영은 바로 근처의 구조물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마치 새카만 흑연 같은 것이 그녀의 손에 묻었다. “뭐 이런 게······.”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구조물의 전체적인 형상이 그려졌다. 「ㅁ」 틀림없었다. 이 구조물은 분명 그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앞의 구조물은······. 「ㅓ」 천천히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구조물들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그것은 곧 문장이 되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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