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524화
유중혁의 [진천패도]가 허공을 갈랐다. 앞길을 가로막는 성좌들을 베었고, 그들의 수족이 된 화신들을 베었다.
유중혁은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의 뒤에는 함께 시나리오를 헤쳐온 일행들이 있었다. 이지혜, 이현성, 정희원, 신유승, 김남운, 이설화, 공필두······.
―시스템 오퍼레이션.
서울 7왕들도 함께 있었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과, 미희왕 민지원.
―가, 유중혁!
초월좌들의 왕 장하영도 보였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다, 패왕.
거기에 페이후나 란비르 칸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화신들.
그의 숙적인 안나 크로프트조차 그를 도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유중혁을 응원합니다!]
[성좌,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가 ]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그 어떤 회차도 그보다 완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군한다, 파천맹.”
파천맹(破天盟). 그것이 유중혁이 만든 연합의 이름이었다.
내가 완성했던 결말과, 1863회차의 한수영이 보여주었던 설계. 내가 알고 있는 ‘멸살법’의 모든 회차의 정수가 집약된 설화들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기염을 토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어떻게, 벌써······? 너는 아직 이곳에 올 수 없는―]
마침내 부서진 방주 너머에서, 경악한 도깨비 왕의 표정이 보였다.
유중혁과 파천맹의 일행들은 망설이지 않고 녀석을 향해 돌격했다.
[어리석은 화신들이여, 나를 죽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면, 너희도 사라질 것이다. 사건이 종결된 세계선은 버려진다. 그런 세계선은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다!]
도깨비 왕은 몸부림쳤다.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그는 자신의 모든 설화를 동원해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설화를 토하며 무릎을 꿇은 도깨비 왕은 주저앉으면서도 웃었다.
[너희는 끝이다. 곧 이 세계선의 멸망이 시작될 것이다. 그분께서, 이런 이야기를 원할 리······.]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멸망은 시작되지 않았다. <스타 스트림>은 건재했다. 도깨비 왕이 눈을 부릅떴다.
[<스타 스트림>의 최종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설마······?]
마지막 순간 도깨비 왕은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드넓은 [최후의 벽] 너머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누군가의 시선을 헤아리듯이.
그리고 다음 순간, [최후의 벽]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스타 스트림>의 전설, 패왕 유중혁.」
화면 위로 떠오르는 자막. 삑―하는 소리와 함께 패널이 꺼졌다. 검은 패널 위로 교실의 정경이 비치고 있었다. 옹기종기 앉은 아이들의 모습.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은, 패널 옆에서 강의를 준비하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유중혁이다.”
.
.
.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중혁 씨. 역시 강의 잘 하시던데요.”
“······재미없는 이야기라 다들 지루해하더군.”
무뚝뚝한 유중혁의 목소리에 이설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유중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코트를 걸쳤다.
「어느새, 0회차의 세계에서 시나리오가 종결된 것도 5년이 지났다.」
시나리오가 끝난 후, 유중혁과 동료들은 세계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한동훈은 정부 사람들과 접선해 체제를 만들었고, 이현성과 정희원은 범죄 단체의 테러를 제압했다.
이지혜는 국경을 지키며 외국 화신들과의 국제 협약을 도왔고, 이설화와 신유승은 시나리오 속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구조했다.
시설, [별 헤는 밤] 또한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설을 나서며, 유중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만든 고아들이었다. 이제 사라진 별들을 헤며 자라갈 아이들.
“그런데 아저씨.”
아이 중 하나가 유중혁의 옷깃을 잡았다. 유중혁이 돌아보자, 용기를 낸 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유중혁의 머리를 가리켰다.
“흰 머리.”
*
시나리오가 끝나고 7년이 지났을 무렵, 유중혁은 결혼을 했다.
상대는 이설화였다.
눈물을 찍는 이지혜와, 주례를 보는 공필두. 부케를 받은 정희원······ 대학 수업을 제쳐두고 달려온 신유승이 축가를 불렀다.
아이는 갖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이 세계에는 부모가 필요한 아이가 많아요.
그들은 시설을 세워 아이들을 돌보았다.
두 사람 다운 선택이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10년, 15년······.」
결말을 읽기 위해 점점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처럼, 0회차의 시간은 흘러갔다. 유중혁은 정직하게 나이를 먹었다.
정확히는, 오직 유중혁만이 나이를 먹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유중혁이 얻은 특성 때문이었다.
전설급 특성, [전력의 삶].
수천 번의 회귀 속에서, 유중혁은 한 번도 그 스킬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회귀자인 그는 선택할 필요가 없는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수명을 사는 대신, 자신의 모든 재능을 폭발시키는 특성.」
하지만 지금의 그는 0회차였다. 회귀로 얻은 경험도, 재능도 부족한 상황. 그랬기에 그는 그 특성을 선택했다. 이 특성이 있어야만, 남은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 올해 몇 살이죠?”
“나이 같은 건 잊었다.”
“음, 시나리오 끝난 지 20년이니까······ 맙소사. 벌써―”
“인간은 모두 늙다가 죽는다.”
“아 사부, 진짜······!”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이 있는 한, 불사의 꿈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파천검성이나 키리오스처럼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살아가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뿐만 아니라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면, 말 그대로 영원의 삶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이야기는 없다.」
관리국이 멸절하고, 성좌들이 추락한 밤하늘.
그 하늘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세계의 낮과 밤을 살아갔다.
「그리고 25년.」
마침내 반백의 머리가 된 어느 날, 유중혁은 도시를 떠났다.
“대장, 진짜로 이런 촌구석에 틀어박혀 살 거예요?”
“나는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다.”
“설화 언니는 어쩌고요?”
유중혁은 말없이 [진천패도]를 닦았다.
더 이상 벨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에서, 쓸모를 잃은 검을 수련하는 것. 그것이 유중혁이 자신에게 남은 삶을 쓰는 방식이었다.
“검 수련 같은 건 공단에서도 충분히······.”
그러나 신유승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맑은 [진천패도]의 검면에 유중혁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60대의 나이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리고 혼자 남은 이설화는, 유중혁이 없는 아주 긴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인 신유승이 뭐라고 입을 열려던 순간, 김남운이 끼어들었다.
“패왕, 이제 정말 다 늙어빠졌구만! 올해는 내가 이기겠는데?”
의기양양하게 외친 김남운이 붕대의 주먹을 풀며 유중혁에게 달려갔다.
“크아아아악! 팔! 팔! 아니, 눈!”
한 방에 나가떨어진 김남운이 끙끙거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피식거리는 일행들의 웃음소리. 손을 잡은 정희원과 이현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이지혜와 신유승이 투닥거리는 모습.
그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그 위로 겹쳐지는 문장을 읽었다.
「어쩌면, 나 역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
아마도 조금은 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았던 세계는 <스타 스트림>이 멸망하고 시스템의 힘이 약화되고 있으니까.
내 세계의 사람들은 유중혁처럼 늙어갈 것이다. 그렇게 늙어가는 일행들 속에서, 나 역시 그들과 함께 늙어갈 수도 있었다.
떠나는 일행들을 보는 유중혁의 백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노인이 되었음에도 조금도 굽지 않은 등.
피부에는 여전히 탄력이 있었고, 팔의 근육도 굳건했다.
그럼에도 분명 유중혁의 눈에는 예전과 같은 총기가 없었다.
「김 독 자 너 무 오래 있 었 어」
[제4의 벽]이 말했다.
「하 나의 꿈 에 너무 오 래 있으 면 힘들 어 져」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가장 오래된 꿈’이고,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0회차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면, 결국 모든 비극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 이야기만 붙잡고 있으면―
“구원의 마왕.”
고개를 든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이 이야기가 궁금한가?”
나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 세계에는 이제 시나리오가 없다. 자극도, 파격도 없다. 그런데 너는 왜 아직, 이 이야기를 보려 하는 것인가?”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이것이 자신이 보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답합니다.]
“너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유중혁의 등 뒤에서 설화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 ‘마계의 봄’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 ‘빛과 어둠의 계절’이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설화들이, 나를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때의 내가 얻었던 설화들. 그 설화가 빚어낸 기억들이, 유중혁의 등 뒤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설계했고, 유중혁이 실천한 세계. 그리하여 완성된 0회차의 이야기.
“때로는 이 평화가 환상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이에 의해 삶이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유중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이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나는 잠깐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늘 고민했었다.”
허공을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그의 검격에 그의 설화가 담겨 있었다. 정해진 법칙을 누구보다 잘 운용하는 화신. 평생에 걸쳐 시스템과 싸워온 유중혁은, 사실은 그 시스템이 있을 때 더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과, 자신의 이해득실을 분별하는 능력. 전장의 유불리를 계산하는 재능.
“그런데 요즘은 가끔 궁금하군. 네가 돕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이기지 못한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지.”
0회차를 실패한 유중혁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이후의 유중혁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결말에 도달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네놈도 알고 있겠지. 이제 내 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